# 185
“날 속였어.”
“그게 무슨 문제라도 돼?”
“문제가 되지. 내가 불쾌하니까.”
“속인 건 네가 먼저야.”
평범한 커피숍에서 오래된 연인이 나눌 법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걸 따지러 여기까지 온 거야?”
덴마크 코펜하겐 5성급 호텔의 식당에서 그들은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특별히 예약된 룸은 단 두 명이 식사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테이블이 있음에도 음식으로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이는 코스 요리보다 차려 놓고 먹는 걸 좋아하는 상엽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게다가 대화 도중에 누군가 들어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프러포즈를 받은 사이인데 너무 매정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프러포즈를 먼저 한 건 너라고.”
“인정해. 그래서 더 궁금해. 원래 좋아하는 여자가 대단한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면 남자는 궁금해지기 마련이거든.”
“이렇게 대화하니 훨씬 좋네.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상엽은 그녀가 본론을 꺼내 놓지 않자 식사를 시작했다.
“식으면 맛없어.”
그는 스테이크를 시작으로 접시에 비해 소량만 담겨 있는 음식들을 한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좀 로맨틱하게 먹으면 안 돼?”
“시간 없어. 나 바쁜 사람이야.”
상엽은 포크를 멈추지 않았다.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러 온 거 같은데.’
그는 의문이 생겼지만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자 결국 엘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부탁할 일이 있어.”
“알아.”
단답형의 단호한 대답에 엘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곧 말을 시작했다.
“전략을 세워 줬으면 좋겠어.”
“전략?”
“이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시작될 거야. 제2의 킹베어가 나오기 전에 쓸어버릴 생각이거든. 그런데 나는 우리 길드원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
“그래서 그 전략을 세워 달라고?”
“맞아.”
상엽은 드디어 식사를 마치고 입을 닦은 다음에 엘렌을 보았다.
“이 부탁을 들어주는 데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첫째, 너희들이 화이트 길드라는 거.”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이미 난 블랙 유저인 너와 협상을 했고 약속을 지켰으니까.”
“맞아. 그래서 나도 얻는 게 있어야 해. 그래야 의미가 있으니까.”
“좋아. 두 번째 문제는 뭔데?”
상엽은 그녀를 향해 또 하나의 문제를 말했다.
“변종들이 정리되면 슈렌트 길드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는 거.”
이 부분은 엘렌도 생각하지 못했다.
“유럽 최고의 화이트 길드가 드디어 독일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온다. 이게 블랙 유저 입장에서 어떤 의미일 거 같아?”
상엽은 자신을 철저히 블랙 유저로 속이면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너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거야?”
“당연하잖아. 너희들이 영토 복구를 끝내면 여러 단체에서 협력을 제안할 거야. 지난번에 내가 너한테 프러포즈 했을 때, 다른 국가들이 이미 반응을 보였을 텐데. 아니야?”
“그건 네가 만든 상황 아니었어?”
“전혀 아닌 건 아니지만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어. 결국 독일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국가들은 전부 너희들과 협력 관계가 되려고 할 거야. 독일을 복구하는 데 좋은 제안들이 있을 테고, 너희들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나오게 되겠지.”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엘렌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영토 복구에 모든 신경을 쏟느라 상엽처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거절이야?”
“아니.”
상엽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모든 상황을 감안해서 나한테 뭘 줄 건데?”
이 말을 하려 그토록 장황한 말들을 한 것이다.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먼저 제안해 보는 건 어때?”
“난 원하는 거 없는데. 곧 유럽을 떠날 거야. 너희들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거지. 이거까지 감안해서 제안해야 할 거야.”
상엽은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내가 할게. 결정되면 연락해. 그래도 그동안 정이 있으니 24시간은 기다려 줄게.”
“쳇. 야박하네.”
“24시간도 많이 준 거야.”
엘렌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뭘 원하는지 힌트라도 좀 주지 그래?”
“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 부족한 게 없거든. 그러니까 네가 찾아야 할 거야.”
상엽은 먼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런 이야기는 꼭 만나서 할 필요는 없었을 거 같은데. 직접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고.”
말을 꺼낸 상엽은 거침없이 물었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알았어.”
상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당을 나섰다.
코드 제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상엽은 성아를 불렀다.
“거짓말이 있었어?”
“한 번.”
진실의 신이었던 성아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거짓말을 알아낼 수 있어요.
상엽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능력이었다.
“어떤 부분이었어?”
“마지막에 한 말.”
상엽은 엘렌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점점 동공이 커졌다.
“마지막 말이라면 나 보고 싶어서 왔다는 거?”
“네.”
엘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상엽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내가 서양에서도 통하다니.”
상엽은 괜히 좌석에 몸을 묻으며 지긋하게 창문 밖을 보았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 거짓말은?”
“없었어요.”
“내가 블랙 유저인 것처럼 속였어.”
블랙 유저인 척 말을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블랙 유저라고 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말에 동의를 한 듯 말을 했지만 이건 거짓말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건 상엽의 어설픈 추리였다.
“속인 것은 알아요. 다만 이는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이에요.”
“너 융통성이라는 말 알아?”
“알아요.”
“머리로만 알지 말고 이제 실천을 좀 할까?”
상엽의 지적에 성아는 지침을 정리했다.
“앞으로 누군가 수호자에게 거짓을 말하면 알려 주겠어요.”
“습득은 빨라서 좋네.”
“그럼 당신은 또 하나의 거짓을 말했어요.”
“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엇을 속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성아가 진실을 말했다.
“당신은 전략이 준비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했죠.”
“흠!”
상엽은 빠르게 스쳐 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속했던 24시간이 지났다.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상엽은 이미 12시간 전에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미치겠네.”
상엽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전략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본래 독일의 요청을 거절하려 했다.
‘내가 대형 길드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들이 시크릿 유산 조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합치면 한 조각이 남습니다. 현재 다방면으로 이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여섯 조각의 시크릿 유산 중에 그들이 세 개를 보유하고 있고, 코드 제로에 두 개가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가 다크 마켓에 나와 있는 것이다.
시크릿 유산의 인기가 꽤나 높지만 나머지 다섯 조각이 그동안 한 번도 마켓이나 거래 조건으로 나오지 않아 팔기로 결정한 것이다.
루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완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유산 완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라도 조각이 부족하면 소용이 없기에 신중히 진행을 하고 있었다.
“정상엽, 정신 차리자. 협상이 잘됐는데 전략 따위 없다고 하면 뭐가 되냐?”
그동안 쌓아 올린 신뢰와 이미지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괜찮아. 나 머리 많이 좋아졌잖아.”
상엽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좀처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변종 따위 잡는 데 뭔 전략이 필요해? 그냥 가서 때려 부수는 거지.”
그의 행보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철저히 계산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상엽의 변종 사냥은 철저히 감각에 의존했고 지난번의 경우, 전략보다는 킹베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대규모 소탕 작전의 전략이 아니라 변종 자체를 이해했기에 전투에 능한 것뿐이었다.
“에이씨!”
상엽은 오랜만에 두통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신체 강화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협상이 완료되었다.
코드 제로는 이미 다크 마켓의 조각을 사들였고, 슈렌트 길드와는 합의서까지 작성했다.
이제 남은 건 상엽이 그들에게 전략을 짜 주는 것뿐이었다.
“전략 구성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루시는 당당하게 회의를 제안했다. 이에 상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이미 전략을 완성하신 것입니까?”
루시는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상엽은 그 표정을 대하자 왠지 목이 말랐다.
“전략은 세웠는데 아무래도 그 녀석들이 수행을 못할 거 같아서 말이야.”
“그렇다면 협상을 취소하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지.”
루시는 상엽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에 상엽이 과장되게 어깨를 풀며 계획을 설명했다.
“직접 가서 해결해 주고 올게. 이게 훨씬 빨라.”
“네?”
루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반면 상엽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서 주요 지점을 쓸어 주는 게 제일 빨라.’
어차피 코인도 많이 모일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망할. 전략 따위 없다고.’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변종은 위협도 안 돼. 빨리 끝내야 다음 일도 하지. 운남을 너무 오래 비워 뒀어.”
루시는 뭔가 반박을 하려다 그만뒀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뭔가를 알아차리고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그녀가 떠난 뒤, 상엽의 뒤에서 하얀빛을 머금은 성아가 나타났다.
“수호자가 그녀를 속였어요.”
“알아! 안다고!”
상엽은 괜히 성아에게 역정을 내고 말았다.
전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전장에 나선 상엽은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
10개의 가장 어려운 포인트를 해결하고 슈렌트에서는 여기서 파생된 잔당을 처리하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다.
독일 전체에서 위협이 되는 포인트는 총 20개였고 나머지 10개는 길드장 하트만이 처리하기로 했다.
하트만과 정상엽.
그들은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방어선 밖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꽤 멋진 사내군.”
“나도 반가워.”
화이트와 블랙의 유명 인사들이었지만 격식을 버리고 편한 걸 추구하는 건 같았다.
그래서인지 서로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하면 심심하니까 내기할래?”
상엽이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먼저 처리하는 쪽이 이기는 건가?”
“당연하지.”
“재미있겠군.”
둘은 내기를 합의했고 상엽이 먼저 곁에 있는 엘렌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200만짜리 조각이야.”
“여긴 내 구역이니 난 이걸로 하지. 300만짜리 조각이네.”
하트만 역시 조각 하나를 꺼내며 엘렌에게 넘겼다. 하지만 상엽은 이런 식의 불공정한 내기를 원치 않았다.
“자, 나도 100만 추가. 내기는 공평해야지.”
“마음에 들어.”
둘은 서로 300만 코인씩을 놓고 경쟁을 시작했다.
킹베어가 사라진 후.
독일의 변종 지역은 춘추전국 시대가 되었다. 각 동물들의 우두머리가 새로 선출되었고 자연스럽게 영역을 확보했다.
그들도 학습 효과가 있어서 우두머리끼리는 경쟁이 붙었고 빠르게 합병이 되는 추세였다.
그래서 상엽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우두머리 제거를 말했다.
-우두머리만 죽이면 흩어질 거야. 흩어진 녀석들은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테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300만 코인이 걸린 내기였다.
“그렇게 빨라?”
-세 번째 포인트로 출발했습니다.
상엽이 두 번째 포인트의 우두머리를 찾아냈을 때였다.
“그 자식 반칙하는 거 아니야?”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반칙은 없습니다.
슈렌트 본부의 회의실에는 루시와 엘렌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내기는 내가 이겨.”
-믿습니다.
이건 루시에게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루시, 거만한 표정이나 연습하고 있어. 엘렌이 영원히 잊지 못할 표정으로 준비해.”
-알겠습니다.
상엽도 그동안의 여유를 버리고 서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