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성아는 신이었다.
그것도 신뢰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진실의 신. 아란테스.
성아는 그녀가 인간이었던 시절의 이름이었다.
신이 된 인간.
그런데 그녀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신의 재림이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 된 것이다.
그것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
영혼이 흩어지기 전에 인간이 되지 못하면 그대로 소멸의 운명에 놓인 생명체였다.
정확히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하기 위해 조각을 모아야 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아쉬움은 없었다. 이는 그녀가 대의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다시 신의 힘을 얻는다.
인간으로 부활한 다음 신의 힘을 얻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인간이 된 그녀는 오랜만에 아침 햇살을 맞았다. 그런데 그녀의 기억 속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거친 사내 한 명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상엽.’
강제는 아니었다.
-네가 선택해.
거절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사람을 내 걸로 만들고 싶어서일까?’
지난밤에 그녀는 폭풍을 만난 함장 같았다.
상황에 적응하며 자신의 선택을 믿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렇게 맞은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침대를 벗어나 커튼을 열었다.
한참 자연의 햇살을 만끽한 그녀의 몸은 어느 순간 투명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나비처럼 상엽의 몸으로 들어갔다.
상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평화로운 수면에 빠져 있었다.
-네가 너의 수호신이야.
다시 몸을 빠져나온 그녀는 상엽의 얼굴을 천천히 만졌다.
그 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인님 몸에서 손 떼.
추종자였다.
지금까지 평범한 인간의 표정을 하던 성아는 추종자가 몸에 닿는 순간 표정이 변했다.
분노를 담은 그녀의 표정은 엄격하고 근엄했다.
-난 그의 수호신이다.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에는 엄청난 위압감이 깃들었다.
-주인님한테 기생해서 힘을 회복하려는 게 왜 수호신이지?
추종자는 영혼을 흔드는 힘에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가 허락했다. 노예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주제 파악하라고.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넌 소멸이었어.
-노예 따위가 신을 무시하는가!
그녀가 신이었을 당시, 추종자 정도는 마음대로 말을 걸 수도 없는 존재였다.
-주인님을 위험하게 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감히!
성아가 소리를 지를 때, 상엽이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시끄러?”
상엽은 실눈을 뜨며 성아와 추종자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령아.”
-네. 주인님.
“너 요즘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상엽의 지적에 추종자가 바로 고개를 숙였고 성아의 표정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유령아.”
상엽은 결국 몸을 일으키며 추종자를 질책했다.
“너 주제 파악 안 하냐?”
-죄송합니다.
추종자는 성아 앞에서 당하는 치욕에 영혼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상엽의 질책은 계속됐다.
“선배면 선배답게 알아서 관리해야 할 거 아니야? 응? 노가다도 하루만 먼저 일하면 초짜보다 잘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애들 관리 좀 잘하라고!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쪽팔리게 후배랑 싸우고 있냐? 엉?”
상엽은 결국 짜증을 냈고 자연스럽게 말이 빨라졌다.
“네가 대장이잖아! 대장이면 명령을 해야지! 왜 싸우고 자빠졌냐고!”
대장이라는 말에 추종자의 표정이 단단한 전사처럼 변했다. 반면 성아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잘해라.”
-네. 주인님.
상엽은 다시 침대에 누우며 성아를 보았다.
“유령이한테 대들지 마. 다음에는 안 봐준다.”
상엽은 그 자리에서 서열 정리를 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이를 확인한 추종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아를 보았다.
-어이. 신입.
-감히!
-닥치고 내 말 들어라. 주인님한테 이르기 전에. 주인님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성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추종자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원망 어린 눈으로 상엽을 보았다.
-신입. 주인님을 한 번만 더 그런 눈으로 봤다가는 내 손으로 찢어 버린다.
이번에는 추종자의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담겼다. 상엽을 그렇게 보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난 신이었는데.’
문제는 그 말이 과거형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현재 신의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넌 지금 갓코인 유저와 다를 바가 없어.
그것이 성아의 현실이었다.
상엽은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신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지?”
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엽은 이 말을 시작으로 갓코인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들의 전쟁을 하고 있다.
-많은 신들이 죽고 있으며 이 전쟁은 블랙과 화이트 중에 한쪽이 이길 때까지 계속된다.
-신들은 모두 블랙과 화이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레이 진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신이에요.”
“그럼 그레이 상점은 뭐야?”
“그걸 알아내려는 게 제가 인간이 된 이유예요.”
신들의 전쟁과 진형 간의 싸움은 곧바로 현실로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갓코인의 스킬들은 소멸한 신들의 힘이에요.”
전쟁에서 죽은 신들의 힘이 갓코인 상점에서 인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 상점의 목적이 뭐야?”
성아는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하기에 대답할 수 없어요.”
“모르는 건 말할 수 없다?”
“전 진실의 신이었어요. 확실하지 않은 건 진실이 아니기에 말할 수 없어요.”
특이한 제약을 받는 신이었다.
“넌 이제 인간이잖아.”
“신의 힘을 찾으려면 모든 것을 지켜야 해요.”
“융통성이 없는 신이네.”
상엽은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갓코인 상점의 의도를 알아야 해요. 그들은 죽은 신의 힘을 인간에게 나눠 주고 있어요. 이는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강해지면 안 된다는 거야?”
“신은 다양한 전생을 가지고 있어요. 본래 신으로 태어나는 신도 있지만, 전생에서 선택을 받아서 신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 인간들은 무분별하게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상엽은 그녀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어쨌든 성아가 인간이 된 이유는 명확했다.
-그레이 상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상엽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화이트 상점이랑 블랙 상점은 뭐야?”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상엽은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을 바꿔도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대화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유령아. 방금 대화에서 뭐가 이상한지 파악해.”
상엽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대화가 이상해진 이유를 파악했다.
-그레이 상점과 상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녀는 상점에 의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인님이 질문하신 화이트 상점과 블랙 상점도 이미 이상하다고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응?”
상엽은 자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그레이 상점에 대해 물었을 때, 성아는 그것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의도를 물었을 때는 그레이 상점이 아니라 갓코인 상점이라고 했다.
“다시 물을게.”
성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을 기다렸다.
진실의 신.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넌 어떤 상점을 조사하러 온 거야?”
“갓코인 상점이에요.”
“그레이 상점, 블랙 상점, 화이트 상점. 전부를 지칭하는 거야?”
“맞아요.”
상엽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너 화이트 신이지?”
“화이트 신이었어요. 지금은 인간이에요. 힘을 되찾으면 다시 신이 될 수 있어요.”
상엽은 이 말을 정리하며 핵심을 물었다.
“소멸한 화이트 신의 능력을 살 수 있는 화이트 상점이 있어. 알아?”
“네. 알아요.”
“그게 왜 생겨난 거야?”
“몰라요.”
“화이트 신과는 관련이 없다는 거야?”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불가능해요.”
상엽이 집요하게 이 부분을 물어본 이유였다.
“그럼 세 가지 상점 모두 같을 수도 있다는 거야?”
“확실하지 않아요.”
의문이 완벽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한 의심이 남았다.
‘그레이 상점은 본래 없었던 거고, 블랙과 화이트도 신들이 직접 개입한 게 아닐 수 있어.’
그렇다면 의문은 하나로 이어진다.
“누가 갓코인을 만든 거지?”
상엽의 혼잣말이었다. 성아는 이미 모른다고 대답을 한 상태였다.
상엽은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변종에 대해서 알아?”
“신의 노예들이에요. 주인에 충성하고 영역을 지켜요.”
“신들이 사는 곳에서는 흔하다는 거지?”
“신의 땅에서는 오직 신과 신도, 노예로 나뉘어요. 당신이 변종이라 부르는 상대는 전부 신의 노예였어요.”
“인간 변종은?”
“신도예요. 신이 될 후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타락한 신도였어요. 그렇게 숫자가 많지도 않고, 타락하면 괴물의 모습으로 힘을 발휘해요. 자신의 군대를 모아 신을 반역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 하죠.”
성아는 이미 변종을 본 듯했다.
“처음 인간 변종이 나타났을 때는 폭력적이지 않았어. 널 처음 본 것도 그때였고.”
“그들은 타락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살다가 점점 아름다워지죠.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갖추면 신도가 되는 거예요.”
“그럼 처음에는 신도로 나타났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타락한 신도가 되었다는 거지?”
“맞아요.”
상엽은 그 변화의 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폭력.’
폭력 앞에서 그들은 타락한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신도들이 타락한 신도가 된 상태였다. 단 한 집단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거해야 되는 대상이네.”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위험해요. 신이 되기 위해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할 테니까요.”
“간단해져서 좋네.”
상엽은 모든 의문을 풀기보다 당장 필요한 질문들을 했다. 어차피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힘을 되찾는 방법은 뭐야?”
-당신의 성장이에요. 수호자가 성장하면 수호신도 성장해요.
“혹시 그게 갓코인이야?”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고 지켜 주는 게 수호신의 의무이니까요. 당신을 성장시키면 저도 다시 신이 될 수 있어요.”
그녀가 스스로를 수호신이라 말하는 이유였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돼?”
-저도 죽어요.
목숨까지 함께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사공강이 위험할 때, 신이 나타난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꽤 많은 신이 넘어왔나 봐.”
-그렇지 않아요. 신의 신분을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저도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해요.
상엽은 갓코인의 판도가 변할 것을 확신했다.
‘레나는 뭘까?’
그레이 상점과 수호신들이 대립하는 관계라는 것은 분명했다. 반면 그레이 상점과 다른 상점의 관계에는 진한 의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상점들은 어떤 존재일까?
신들의 전쟁을 모를 때보다 오히려 많은 의문이 남았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상엽은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깊이 빠지기보다 새로운 동료가 된 수호자와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모든 결정은 내가 해. 조언은 듣겠지만 결정에 관해서는 관여하지 마.”
“알겠어요.”
성아 역시 상엽의 성격을 파악했기에 따르기로 했다.
“네 전투 능력도 확인을 해 봐야겠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요.”
“아직은 아니야. 곧 기회가 있겠지.”
상엽은 성아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때, 밖에서 대화가 끊기길 기다리고 있던 루시가 상엽의 숙소로 들어왔다.
“코드 원. 엘렌이 만나자는 요청을 했습니다.”
“왜? 우리 거래는 끝났을 텐데.”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상엽의 반문에 루시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러포즈를 하겠답니다.”
“미친 거 아니야?”
“전 세계적인 커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시는 상엽의 곁에 있는 성아를 보며 더욱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