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물러서!”
엘렌은 자신 앞을 막는 다섯 명의 수하를 향해 소리쳤다.
“길드장님 명령입니다. 그래야 부길드장님이 싸우지 않는다고…….”
“명령이야! 물러서!”
엘렌이 외쳤지만 상엽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폭풍 같은 기세로 달려온 상엽은 곧바로 해머를 휘둘렀고, 엘렌은 수하들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만!”
그녀의 목소리보다 상엽의 해머가 빨랐다. 그런데 우려했던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해머가 수하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춘 것이다.
그녀를 지키는 수하들도 1000위권의 실력자들이고, 그들을 이끄는 팀장은 470위였다.
그런데 상엽의 돌진을 방어하지도 못한 것이다.
막으려고 버틴 것도 있지만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는 없었다.
상엽이 마음을 먹었다면 그들의 목숨은 단 한 방으로 끝이었다.
“아직도 무기를 들고 있네.”
상엽의 말에 엘렌은 치욕을 참고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상엽도 물러서며 해머를 거두어 들였다.
“좋아. 협상해.”
엘렌은 결국 상엽과 협상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수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다시 나타났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터프해. 매력적이야.”
“닥쳐.”
“이 협상이 즐거울 거 같은 예감이 들어.”
상엽의 능글거리는 얼굴에 엘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네가 원하는 건 이 조각이지?”
“맞아.”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되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지금까지 많이 참았어.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야.”
분명한 경고에도 엘렌은 흔들리지 않았다.
“변종 하나만 잡아 주면 돼. 그럼 이 조각을 줄게.”
상엽으로서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너무 쉬운데.”
“그렇지 않을 거야. 꽤 골치 아픈 녀석이거든.”
그 말을 듣자 상엽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랭킹 9위가 있는데 변종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상엽은 그들의 독일 복구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만 이런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앙 구릉지대를 지배하는 변종이 있어. 그 녀석만 처리하면 조각은 네 거야.”
“좋아.”
상엽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상엽이 허용하는 범위 내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엘렌은 오히려 눈을 흘기며 물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아주 어려운 문제를 제안한 거야. 뒤에 딴소리하지 마.”
“그래 봐야 변종이잖아. 문제 있어?”
상엽이 너무 쉽게 받아들이자 오히려 엘렌은 묻지 않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 녀석을 킹베어라고 불러. 하인리히 국립공원을 시작으로 중앙 구릉지대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독일 영토의 30%가 그 녀석 땅이라고.”
“킹베어? 귀여운 이름이네.”
엘렌은 대화를 하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 길드가 오랫동안 안고 있는 숙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변종 전문가라는 거지?’
엘렌은 상엽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나 정확히 말해. 뒤에 딴소리하지 말고.”
“15미터짜리 검은 곰이야. 붉은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잘못 볼 일은 없을 거야.”
“알았어.”
“그걸로 끝이야?”
“약속이나 지켜.”
상엽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엘렌이 놀리듯이 말했다.
“네가 죽으면 전리품은 내가 챙길 거야.”
그녀의 도발에 상엽은 그저 웃음을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 * *
킹베어.
슈렌트 길드는 단순하게 그런 이름을 붙였다.
-슈렌트 길드에게 정보를 받았습니다.
“매너는 있네.”
-꽤 오랫동안 많은 작전을 펼쳤는데 번번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상엽은 루시가 보낸 정보를 천천히 살폈다.
“곰뿐만 아니라 영토 30%의 변종을 전부 장악하고 있단 말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한국의 담비도 산 전체의 변종을 지배했다. 2급 위험지역이니만큼 더 영향력이 큰 녀석이라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직접 본 사람이 열 명뿐이다?”
-꽤 영리한 녀석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구릉지대에서 기습을 당해 후퇴하거나 죽었습니다. 길드장 하트만은 직접 만난 적도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 지금도 영토를 넓히고 있고?”
-슈렌트 길드에서는 가장 급한 안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도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게. 이거 왠지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정말 하실 겁니까?
“해야지. 슈렌트 길드를 전멸시키는 것보단 쉽잖아.”
기본적으로 조각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에 상엽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아니. 거기 있어. 혼자 하는 게 편해.”
상엽은 모든 지원 병력을 거부하고 홀로 독일의 중앙 구릉지대로 이동했다.
슈렌트 길드는 킹베어의 영역 앞에 높은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은 길드원들은 상엽을 막지 않았지만 표정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들 중에는 비웃음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상엽을 노려보는 자도 많았다.
상엽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방어벽을 넘었다.
방어벽 너머의 구릉지대는 물과 우거진 숲이 반복되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높지 않은 언덕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솟아 있는 특이한 지형이었다.
대부분의 언덕이 우거진 숲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확인한 상엽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았다.
“영역을 나누기가 참 쉽게 되어 있네.”
숲에 몸을 숨기다 기습을 하기 좋은 구조였다. 게다가 이처럼 영역이 확실할 경우 리더의 지배력이 강해서 군대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일단 왔으니까 인사부터 해볼까?”
상엽은 해머를 꺼내고 지옥마를 불렀다.
“뛰어.”
히이잉!
지옥마가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상엽이 고스트실드를 밟고 한 번 더 도약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200미터 언덕의 정상으로 떨어졌다.
콰쾅!
언덕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변종들의 대부분이 빛으로 흩어져 상엽에게 흡수되었다.
“이거 오랜만이라 신나는데.”
상엽은 하나의 언덕으로 그치지 않고 지옥마를 타고 달리며 눈에 보이는 언덕들을 완전히 무너트려 버렸다.
“자. 슬슬 반응을 보일 텐데.”
그는 7개의 언덕을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환경 변화에 민감하니까.’
변종이라고 해도 동물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시.”
상엽이 다시 다른 언덕으로 다가가자 드디어 변종들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200마리의 늑대였다.
2급 위험지역인 만큼 꽤 강한 녀석들이었다.
“오랜만에 사냥하니까 신나는데.”
상엽의 주변으로 32개의 빛기둥이 치솟았다.
“너희들도 근질근질했지?”
유령 친위대는 모습을 드러내자 바로 무기를 세우며 공격성을 드러냈다.
“유령아. 잘하자.”
-믿어 주십시오.
“한 번도 안 믿은 적이 없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히이잉!
추종자의 말에 지옥마가 앞발을 세우며 위용을 과시했다.
“서로 질투하냐?”
-제가 말 따위에 질투를 하겠습니까?
단어 선택 때문인지 지옥마가 추종자를 노려봤다. 하지만 추종자도 당당히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으로 문제 일으키면 둘 다 영원히 소환하지 않을 거야.”
상엽은 사소한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고 진형을 갖추는 늑대 무리를 보며 명령을 내렸다.
“쓸어버려.”
그 작은 명령에 유령 군대가 기괴하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늑대 무리를 덮쳤다.
200마리의 늑대는 1분을 버티지 못했다.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음에도 힘의 차이가 워낙 극명했다. 게다가 상엽을 막기에 200마리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단순히 힘뿐만 아니라 늑대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너희들 그 눈빛은 뭐야?”
유령 전사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뭔가 불만이 있는 듯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상엽을 위협하는 건 아니지만 섭섭한 감정이 느껴졌다.
“유령아. 이 녀석들이 왜 이래?”
-주인님이 다 잡으셨습니다.
불만은 추종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잉!
지옥마도 이번에는 추종자에 동의했다.
“그렇게 싸우고 싶냐?”
쿵. 쿵. 쿵.
전사들은 상엽의 질문에 일제히 무기로 바닥을 찍었다.
“뭐 감정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상엽은 이제야 그들과 감정 교류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계약적 관계였다면 이제는 서로의 의사를 말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좋아. 이번에는 마음대로 놀아 봐.”
전사들은 일제히 상엽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늑대가 있던 언덕과 멀지 않은 평지의 숲이었다. 그곳에서 몽둥이와 파이프, 검, 돌멩이 같은 무기를 든 원숭이 500마리가 나타났다.
이를 본 친위대들은 적을 노려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상엽은 일부러 명령을 미뤘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키네.’
명령 없이 튀어 나가는 전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작해.”
상엽은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친위대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흥분했어?”
상엽은 해머를 들고 한발 뒤에서 뒤따랐다.
지옥마가 먼저 원숭이들의 중앙으로 가로지르며 진형을 깨트림과 동시에 최근 소환한 유령전사들이 창을 던져 네 마리의 원숭이들의 배를 단번에 꿰뚫었다.
그 뒤에 도착한 30명의 전사들은 울분을 토해 내듯 적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급 위험지역에서 싸우던 그들에게 2급 위험지역은 적당한 수준의 적이 몰려 있는 수련장 같았다.
“실력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상엽은 가장 뒤에서 뒤따라가는 추종자를 불렀다.
“유령아. 이리 와.”
-주인님. 저도 싸우…….
“빨리!”
추종자가 얼른 상엽의 곁으로 왔다.
“저 녀석들 실력이 느는 거 같은데.”
-경험에 따라 실력이 느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은 소환에만 응하는 소환물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표현은 못하겠지만 감정과 지능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상엽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장기판의 말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있는 군대는 생각을 하고, 경험을 축적시키며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도 한다.
“잘 됐어. 제대로 놀게 해 줄게.”
-전 그럼 싸우러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가.”
추종자는 한 마리라도 잡고 싶은 마음인지 바로 전장에 합류했다.
“아씨. 눈치 보여서 싸우질 못하겠네.”
그래도 전사들이 처리한 변종의 코인은 모두 상엽에게 흡수되었다.
500마리와 32명의 유령전사의 싸움이지만 압도하는 건 유령군대였다.
거기다 지옥마와 추종자까지 있는 터라 원숭이들은 상엽이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전멸하고 말았다.
“뭐야? 아직도 만족 못 했어?”
꽤 다친 전사들이 보였다.
“넌 쉬어. 명령이야.”
전사는 아쉬워하는 행동을 보였지만 상엽은 가차 없이 불러들였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
상엽은 곁에 있는 추종자를 보며 물었다.
전사들은 마치 가상의 선을 넘어선 것처럼 전투를 원하는 본능을 마음껏 표출했다.
-저희들은 주인님께 배웁니다.
“무슨 소리야?”
-모시는 주인님의 성향에 따라 성장합니다.
상엽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너 지금 내 탓이라는 거지?”
-사실이 그렇습니다.
추종자가 워낙 진지하게 대답하니 상엽은 더 이상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저게 내 모습이라는 거지?’
유령전사들은 상엽의 거울이었다.
거칠고 야성적이며 전투가 시작되면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다 배우려면 멀었어.”
태백산에서 무작정 변종에게 달려들던 그때가 지금 유령전사들의 모습이었다.
“빨리 성장해. 같이 놀게.”
상엽은 유령전사들이 처음으로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상엽은 갑자기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유령아.”
-네. 주인님.
“너 인간 여자 보면 무슨 생각 하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네. 그건 안 닮아서.”
-뭐가 다행이란 말입니까?
“아니야. 됐어.”
상엽은 괜히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 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발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극도로 강화된 감각은 진동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다들 준비해. 이번에는 실컷 놀 수 있겠어.”
진동은 원형으로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물을 끌 듯 상엽을 향해 급격히 좁혀져 왔다.
“2천 마리는 되겠는데?”
그의 눈에 감각뿐만 아니라 뿌연 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변종들이 접근하면서 만들어 내는 흔적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제대로 한다.”
상엽이 해머를 들고 지옥마의 등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