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이런 미친 새끼가…….”
엘렌은 분노했다.
전 세계 언론에서 속보처럼 기사를 찍어 내고 있었다.
-랭킹 30위 정상엽이 랭킹 20위 엘렌에게 반하다.
-화이트와 블랙의 벽을 넘어선 세기의 프러포즈.
불과 10분 전만 해도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그런데 후속 기사가 엘렌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오래전부터 서로 연락을 했던 것으로 밝혀져.
-최근 은밀한 선물 교환이 있었던 증거 포착.
거짓과 조작이 난무하는 기사들을 보며 엘렌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기 부길드장님…….”
분노하고 있는 그녀의 집무실로 나이 많은 노인이 들어섰다. 길드의 운영을 담당하는 이로 전투력은 낮지만 헌신적인 성품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직책은 사무 팀장이었지만 전반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이였다.
“네. 팀장님.”
엘렌도 노인 앞에서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전부 거짓말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 죄송해요.”
엘렌은 화를 억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녀의 집무실을 방문한 이는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길드장님.”
노인과 엘렌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에 곰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엘렌을 보더니 입술을 떨었다.
“그냥 웃으세요.”
“푸하하!”
사내는 호쾌하게 웃더니 아예 배를 잡고 길드 전체가 울릴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엘렌이 드디어 남자를 알게 되다니! 푸하하!”
“그런 거 아니라고요! 누가 블랙 유저 따위와!”
“무슨 소리야! 블랙이든 화이트든 결국에는 모두 사람이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될 순 없지!”
“그만두시라고요!”
화가 난 엘렌의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길드장 하트만은 웃음을 멈췄다.
“미안. 그냥 엘렌에게 남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상상을 못 해서.”
“남자 문제 아니라고요.”
하트만은 말을 할수록 상황을 악화시켰다.
“제가 가서 죽여 버릴 거예요.”
엘렌은 노인과 하트만의 사이를 거칠게 지나갔다. 하지만 하트만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알았어. 장난은 그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요. 그 녀석이 우리 영역에서 길드를 농락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하트만은 곁에 있는 노인을 보았다.
“정상엽은 지금 우리 길드원과 밥을 먹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가 잘 봐 달라며 밥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합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시민들까지 함께 먹을 거라고 식량 보급 차량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그 말을 들은 하트만이 엘렌에게 말했다.
“우리를 농락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만 놀리시라고요. 진짜 화내요.”
“놀리는 거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전 세계가 주목하는 프러포즈 이벤트를 만들었고, 능숙하게 연기를 하고 있어. 그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엘렌은 더욱 화가 나서 외쳤다.
“이미 다 말했잖아요! 어제 말할 때는 뭘 들은 거예요!”
“어제?”
“성녀의 조각 중의 하나만 협상해서 유산을 받았다고요! 길드장님한테 유산 조각 주면서 말했잖아요!”
“아. 그게 그거였어?”
엘렌은 답답함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트만은 느긋한 성격에 농담을 좋아하고 복잡한 걸 싫어하는 사내였다.
전투가 시작되면 야성이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허술한 덩치 큰 사내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엘렌을 놀리는 걸 좋아했다.
“놔요! 그 자식 제가 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시민들이 실망할 텐데.”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지금 덴마크와 벨기에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했어. 너희 둘이 사귀게 되면 우리 독일에 꽤 높은 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조건 없이 하겠다고.”
엘렌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국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응. 공식 발표야. 시민들이 그래서 많이 기대하고 있어.”
독일은 많은 피해를 입었던 만큼 대부분의 산업 기반을 잃었다.
현재 많은 곳을 복구했다고 하지만 나라 전체가 농경 사회로 돌아가 버렸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그들 특유의 장인 정신을 되살려 전자 부품 생산에 들어갔지만 예전에 비하면 소규모 공장 수준이었다.
“독일이 살아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게다가 정상엽은 변종에 관해서는 전문가라고 하던데.”
상엽의 변종 사냥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1급 위험 지역에서 홀로 사냥을 한 기록은 여전히 진실 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독일에 변종이 사라지고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어.”
“그래서 그 자식하고 결혼이라도 하라고요?”
“그냥 생각이라도 해 보라는 거야.”
“지금 진심이에요? 날 팔아먹겠다는 거예요?”
엘렌의 질문에 하트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그냥 생각해 보라는 거야. 더 이상은 없어.”
“그 말은 이 일에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거죠?”
“네가 위험하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점은 걱정하지 마.”
그래도 하트만은 엘렌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에 조금은 기분이 풀린 엘렌은 화를 삭이고 진지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제가 직접 가서 해결하고 올게요.”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그 녀석이 노리는 건 성녀의 조각이에요.”
“그래서?”
“진짜 협상이 뭔지 보여 주고 올게요. 아예 속옷까지 다 털어먹어 버릴 거니까.”
엘렌의 선언에 하트만은 무섭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두고 봐요.”
그녀는 두 사내를 내버려 두고 집무실을 나섰다.
“길드장님.”
“네. 팀장님. 따라갈게요.”
하트만은 한발 늦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상엽은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덴마크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운반용 트럭에서는 계속해서 음식이 만들어졌고, 부족한 재료는 근처 상점에서 대량으로 구입했다.
함께 만든 음식과 술에 자연스레 음악이 뒤따랐고, 브레멘의 진입로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웃음과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한순간 함성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엘렌이다!”
“독일의 공주님!”
“여신께서 오셨다!”
엘렌이 나타나자 좌중들은 함성을 지르면서도 그녀 앞에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갈라진 좌중들이 만든 길로 엘렌이 다가오자 상엽은 들고 있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엘렌은 금발 머리에 다리가 길고 눈매와 입매가 시원하게 뻗은 것이 특징이었다.
군복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에 짧은 반바지와 사슬이 늘어진 허리띠, 가슴이 도드라지는 타이트한 티셔츠는 여신보다는 여전사가 어울렸다.
표정 또한 선명해서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자마저 압도하는 강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상엽은 빠르게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반지를 올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와아아!
주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어느새 긴장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엘렌은 반지를 향해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상엽만 들리게 조용히 말했다.
“단둘이 얘기 좀 할까?”
“왜? 여기서 말할 자신은 없어?”
“닥치고 빨리 일어나.”
“싫은데.”
둘은 기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자 엘렌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반지, 받아 버린다.”
그 말에 상엽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엘렌이 다가와서 다시 한번 속삭였다.
“따라와.”
엘렌이 상엽을 스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프러포즈의 결말을 알지 못해 모두 상엽의 얼굴만 쳐다봤다.
“아직 안 끝났어요. 기대하세요.”
상엽은 그 말을 남기며 엘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와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초원이었다.
“여차하면 싸울 수 있는 곳으로 왔네.”
상엽은 그녀의 의도를 알면서도 여기까지 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초원의 주변에는 작지만 숲이 우거진 언덕들이 있었다.
“저기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볼 거 같고.”
“독일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각오한 거 아니야?”
“뭐 그렇긴 해.”
“안전장치를 참 치사하게 걸었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상엽은 농담으로 그녀의 불만을 받아 주었다.
“원하는 게 이거지?”
엘렌은 잡담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성아의 마지막 조각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상엽은 이를 이용했다.
“협상으로 끝내는 게 어때? 나도 프러포즈하러 온 여자를 죽였다는 오명은 쓰고 싶지 않아.”
“얼마나 모은 거야?”
그녀는 상엽이 몇 조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 개 남았어.”
상엽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나머지를 다 모으고 다시 와. 그래야 내가 이걸 비싸게 팔 수 있지 않겠어?”
그녀도 만만치 않았다. 상엽이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그건 내가 너무 위험해서 안 돼. 나머지 조각을 슈렌트 길드에게 가져다주는 거밖에 안 되잖아.”
“지금도 네 걸 빼앗고 전부 모을 힘은 있어.”
“그래?”
상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이번에는 엘렌이 조금 놀랐다. 이처럼 싸움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꽤 거친 사내였네.”
엘렌은 이 협상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험한 놈이야. 도시가 완전히 날아갈 수도 있어.’
상엽에 대한 자료는 그녀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랭킹 9위인 길드장도 있었다.
“아무래도 널 죽이는 게 편하겠어.”
“그게 결론이야?”
“협상은 없어. 네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거든.”
“뭐 깔끔해졌네.”
상엽은 거부하지 않고 해머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친위대를 소환했다.
그 행동에 엘렌은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꺼냈다. 그녀의 양손에는 하얀색의 짧은 단검 두 개가 잡혔다.
‘진짜 싸울 생각이야.’
협상을 위한 사전 작업은 상엽에게 먹히지 않았다.
“아 참. 길드장은 여기 못 올 거야.”
“무슨 개소리야?”
“내가 뭘 어떻게 한 건 아니야. 그냥 좀 골치 아픈 변종이 나타났을 뿐이야.”
엘렌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근처 숲을 보았다. 길드장이 있었다면 분명 대화를 들었을 테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신호도 받지 못했다.
“아르마딜로라는 녀석인데 겁이 좀 많거든. 아마 지금 그 녀석들이랑 숨바꼭질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상엽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1급 위험 지역의 변종들을 잡아 북부 해안 지대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나타나도록 했고, 현재 북부 해안 지역은 비상이 걸려 있었다.
엘렌이 상엽의 말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할 때, 누군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본래 길드장이 있어야 할 근처의 숲이었다.
“길드장님께서 절대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해안에 출몰한 변종들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상엽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러서.”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수하를 돌려보냈다.
“날 너무 우습게 봤어.”
그녀 역시 랭킹 20위의 강자였다. 상엽에게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길드장이 싸우지 말라고 명령한 거 아니야?”
“미친 새끼!”
엘렌은 두 개의 단검을 아래로 내리며 상엽을 향해 뛰려고 했다.
“잘 생각해. 그걸 휘두르면 용서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
“닥쳐!”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스킬을 시전했다.
엘렌이 순간적으로 다섯 개의 환영으로 늘어나며 각자 다른 방향에서 상엽을 덮치려 했다.
“덤비지 말라니까.”
이에 상엽은 하나하나 상대하지 않고 해머로 바닥을 찍었다.
원형의 기파가 바닥을 때리며 그 반탄력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거대한 해머가 떨어졌다.
접근하던 엘렌은 재빨리 몸을 피해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났고, 파편이 흩날리는 틈을 타서 다시 상엽을 향해 뛰었다.
그녀의 속도는 상엽의 예상보다 빨랐다. 눈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남긴 잔상뿐이었다.
하지만 상엽은 감각에 의존하며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챙!
그녀의 단검이 상엽의 해머에 막히는 순간, 바로 옆에서 괴성이 들렸다.
히이잉!
지옥마가 이미 지척에서 엘렌을 덮치고 있었다.
상엽은 공격이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엘렌의 몸이 갑자기 땅으로 꺼지더니 10미터 밖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상한 재주가 있네.”
상엽은 여유를 부렸다. 반면 엘렌은 그렇지 못했다.
‘예상보다 강해.’
잠시 무기가 부딪혔을 때, 엘렌은 상엽이 길드장 하트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블랙 유저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보통 비슷한 수준이라도 순수 힘은 화이트 유저가 강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상엽의 힘은 블랙과 화이트의 시너지에 힘을 증폭시키는 여러 유산을 지니고 있었다.
최상급 상점의 강화를 하면서 그 효과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중이었다.
‘신체 능력으로는 못 이겨.’
엘렌은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분명히 깨달았다.
“자, 이제 협상할 준비가 됐어?”
자존심이 상한 엘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싫으면 죽여서 가져가지 뭐. 나도 그게 편해. 얻는 것도 훨씬 많고.”
이번에는 상엽이 먼저 뛰어갈 준비를 했다. 엘렌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