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한 명의 사내가 손목을 잃었을 때, 또 다른 사내의 심장에는 얇은 바늘이 꽂혔다.
대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심장이 꿰뚫린 사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쓰러지는 순간, 손목을 잃은 사내가 위험을 알리려 했다.
그때, 자신의 목을 그으려던 루시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사내의 뒷덜미로 서늘한 바람이 불렀다.
심장과 목.
사내는 두 곳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펼쳐진 싸움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결과로 끝이 났다.
“이쪽으로 와.”
그리고 루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적설.”
갑자기 나타난 이는 적설이었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질문은 살고 나서 하는 게 어때?”
평소처럼 붉은색 옷을 입고 나타난 적설은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루시에게 손짓을 했다.
“내가 위험해지면 널 버릴 거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라와.”
루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같은 시간.
상엽은 이마오의 실을 통해 석강주를 세뇌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성녀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존의 갓코인 시스템을 벗어났으며, 한 가지 자격을 통해 자신의 모든 힘을 넘겨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자격이라는 게 뭐야?”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상엽이 성아로 알고 있는 여자를 석강주는 성녀라고 불렀다.
“인간 변종과는 어떻게 관련이 된 거야?”
“정확한 관계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서로 같은 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8조각이면 신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소여진은 왜 이 조각에 집착한 거야?”
상엽은 그들이 기존의 사냥터를 포기하고 인간 변종 사냥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그 정도의 메리트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호신 때문입니다.”
“수호신?”
“성녀는 조각을 모으는 자의 수호신이 됩니다. 이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성녀를 부활시켜 주었기에 그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자격시험이 아니었다. 조각은 성녀를 부활시키는 부활석이었고, 이를 완성하면 그 보상으로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신이 본인의 힘을 전부 사용하게 된다?”
사람이 그 힘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다만 성녀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흥미롭네.”
“길드장님은 이 조각이 다른 이들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지?”
“그녀가 더럽혀지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상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해 봐.”
“성녀는 수호신이 되면 신의 능력 안에서 수호 대상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으로 인해 성녀가 더럽혀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남자가 수호 대상이 되면 단순히 지켜 주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건 소여진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성녀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 문제 없어.”
상엽은 소여진의 편협한 시선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 거야?”
“길드장님께서 직접 대화를 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만남이 있었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엽이 성아를 만난 건 겨우 3번이었다. 반면 소여진은 열 차례가 넘게 만났다.
“수호신이라…….”
상엽은 성아를 떠올렸다.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
상엽은 그녀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별다른 이질감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상엽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여진이 광동성에 간 건, 단순히 인간 변종이 있어서 간 거야?”
이 점이 궁금했다. 그녀는 정확히 조각이 있는 인간 변종을 추적했기 때문이다.
“성녀가 알려 줬다고 합니다.”
“뭐?”
“성녀의 믿음을 얻으면 위치를 알려 준다고 들었습니다.”
“믿음을 얻는 방법이 뭔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상엽은 그 후로도 많은 질문을 하고,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없습니다.”
석강주가 알고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이 내용을 누가 또 알고 있어?”
“아무도 모릅니다. 길드원 중에서도 저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녀가 직접 여러 인물들에게 접촉을 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대부분 상위 랭커라 판단됩니다.”
상엽도 그런 식으로 성아를 만났다. 다만 성아가 누군가를 선택하는 기준은 알지 못했다.
“알았어. 넌 일단 벙커로 돌아가서 평소대로 지내.”
그는 석강주가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판단했다.
“날 죽이려는 생각은 접어.”
상엽은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 * *
3일 후.
상엽은 어둠을 이용해 천진으로 스며들었다.
-3일 후에 와서 비서 데리고 가.
적설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일째가 되던 날. 드디어 적설이 은신처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녀들은 무사히 몸을 숨겼지만 포위망을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서 3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3일이 지나자 이미 그녀들이 탈출했다고 판단한 왕수는 수색을 중단시켰다.
다만 평소보다 경계 태세는 훨씬 높았다.
상엽은 어둠을 이용해 경계망을 통과하고 그녀들의 은신처에 닿았다.
“특이한 집이네.”
그녀들이 숨은 곳은 대형 건물의 물탱크 안이었다. 물이 찬 물탱크 아래에 적설이 만들어 놓은 빈 공간이 있었고, 필요에 따라 그 공간에 몸을 숨겼다.
“죄송합니다.”
루시는 상엽을 보자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훌륭히 해냈어. 죄송할 거 없어.”
상엽은 그녀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자.”
“잠깐.”
루시를 데리고 떠나려는 상엽을 적설이 막았다.
“우리가 묘한 관계에 있는 건 사생활이고, 이건 공적인 일이야.”
“무슨 뜻이야?”
“수고비는 받아야지. 목숨 걸고 구해 준 건데.”
적설은 당당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원하는 게 뭔데?”
“일단 여기는 협상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니까 같이 가. 나도 여기 머물 수는 없으니까.”
적설은 합당한 요구를 했다. 루시를 살려 준 것만으로도 그럴 자격은 충분했다.
“일단 가자.”
상엽은 그녀들과 함께 물탱크를 벗어나서 바다를 향했다.
바다를 이용해 하북성을 벗어난 상엽은 산동성의 해변으로 올라갔다.
옷이 젖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두 여인의 허리를 각각의 손으로 감싼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들을 해변에 내려놓았다.
“절대 잠수함 관광은 안 할 거야.”
그나마 루시는 경험이 있어서 익숙했지만 적설은 그렇지 않았다.
암살을 위해 여러 환경을 대비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루시도 정신적으로는 괜찮지만 신체적으로는 꽤 힘든지 해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지친 두 여인을 보자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너 왜 웃어?”
“잠시 착각했어. 우리 꼭 놀러 온 거 같잖아.”
바다 수영을 하고 지쳐서 해변에서 쉬는 모습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네.”
“작전 쓰지 마. 보상은 확실히 받을 거니까.”
“당연히 줄 거야. 소중한 사람을 지켜 줬잖아.”
상엽의 말에 두 여인의 표정이 상반된 표정을 했다.
표정뿐만 아니라 똑같은 모양으로 쉬고 있는 그녀들의 매력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루시는 하얀 와이셔츠에 정장을 입어 반듯한 이미지였지만 물에 젖은 터라 흐트러진 매력이 있었고, 적설은 퇴폐적인 느낌의 강렬한 자극을 가진 여인이었다.
“내 인생이 마냥 고달프지만은 않아.”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냥 혼자 생각하는 거야. 다 쉬었으면 일어나. 다시 가야 되니까.”
“또 바다로 가자고?”
“아직 하북성에서 멀지 않아. 당연히 다시 가야지.”
상엽은 당당하게 두 여인의 허리를 각각의 손으로 감아올렸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좀 부드럽게 갈 수 없어?”
“거친 게 내 매력이라며? 더 거칠어도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상엽의 말에 적설은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고, 루시는 시선을 돌렸다.
“아. 루시한테는 미안. 적설만 만나면 내가 이렇게 되네.”
“그게 왜 내 탓이야?”
“넌 남자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잖아.”
“그건 뭐 그렇지.”
상엽은 적설의 표정이 꽤 귀엽다 생각하며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 * *
산동성의 이름 없는 산으로 들어간 후에야 그들은 추격에서 자유로워졌다.
바다와 멀지 않은 산이었고 사람이 살지 않은 지역이었다.
변종이 있는 장소였지만 그들 셋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친위대를 불러 간단히 주변을 정리한 상엽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녀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주었다.
화르르!
화염의 정수로 만들어진 불꽃이 바닥에 머물며 모닥불 같은 역할을 했다.
“캠핑 온 기분인데.”
동굴 안이 밝아졌고 온기가 퍼져 나가자 그녀들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일반인인 줄 알겠어.”
“지금은 일반인이랑 똑같아. 진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장시간 바다 이동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직접 움직인 것이 아니라 상엽에게 매달리다시피 했고, 호흡도 최소한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좀 쉬어.”
상엽은 그녀들 앞에 음료수 하나씩을 놓았다.
동희가 만든 피로 회복제였다. 그레이 상점의 소모품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위험한 맛이 날 거야. 그래도 몸에 좋으니까 다 마셔.”
상엽은 그녀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며 동굴을 나섰다. 어차피 갓코인 유저들인 데다 동희의 피로 회복제면 금세 회복이 될 것이다.
“아악! 이게 뭐야?”
“켁! 켁!”
동굴 안에서 처음 맛본 위험한 맛에 괴로워하는 비명이 들렸다.
상엽은 그 목소리에 웃음을 지으며 추종자를 불렀다.
“유령아. 주변 수색해.”
상엽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수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동굴에서 잠시 멀어졌을 때, 상엽의 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는 진한 꽃향기가 묻어 있었다.
“왔어?”
상엽은 당황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한 여인이 그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여러 겹의 푸른 옷이 신비한 이미지를 더한 여인이었다.
“오늘은 대화할 마음이 좀 있어?”
나타난 여자는 성아였다. 그녀는 상엽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에 대해서 꽤 많이 알아냈어. 사람이 아니라고?”
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어. 난 사람이 아닌 존재와도 친하거든.”
상엽은 일부러 추종자와 친위대를 소환했다. 그러자 성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내 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
상엽은 소환을 해제하며 성아에게 다가갔다.
성아는 상엽의 접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둘은 세 걸음까지 가까워졌다.
그런데 또 한 걸음을 다가가려 하자 강한 바람이 상엽의 몸을 밀어냈다.
그 현상에 상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주제에 까칠하네.”
상엽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성아를 향해 말했다.
“수호신이니 어쩌니 하는 말로 유혹하면 무조건 목숨 걸고 달려들 줄 알았어?”
성아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엽을 보았다.
“지랄하지 마. 네가 신이든 뭐든 결국 내가 싫으면 이딴 조각은 그냥 쓰레기니까.”
상엽은 보관함에서 두 개의 조각을 꺼내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너 때문에 내 비서가 위험해졌거든. 만약에 내 비서가 죽었으면 넌 이 자리에서 목숨 걸고 싸웠어야 할 거야.”
성아는 놀란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보았다.
“도움을 받고 싶으면 제대로 고개 숙이고 들어와. 신이든 사람이든 그게 예의니까.”
상엽은 성아의 표정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다.
“자, 제대로 말해. 아니면 이 조각은 여기 버려질 테니까.”
성아는 분노한 표정이었다.
“왜? 사람이 신한테 당당하니까 자존심이 상해?”
상엽은 다시 한번 성아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역시 강렬한 바람이 그를 막았다.
하지만 힘을 주어 전진하자 상엽을 막을 수가 없었다.
상엽은 성아의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서 힘을 주어 말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상엽은 다시 물러서며 해머를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
“멈춰!”
놀란 성아가 평소와 달리 감정이 진하게 묻은 목소리로 외쳤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성아의 입술이 떨렸다. 상엽은 이를 보면서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신 주제에 고민이 많네.”
상엽은 다시 해머에 힘을 주었다.
“도와줘!”
결국 성아가 소리쳤다. 지켜 달라는 말이 도와 달라는 말로 바뀐 것이다.
이 말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은데?”
상엽은 해머를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