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역시.’
트럭의 흔적을 쫓아가던 상엽은 어느 순간 풀로 위장된 도로가 있음을 보았다.
시멘트 위에 주변 풀과 비슷한 인조 풀을 심어 놓은 종류였다.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른 게 느껴지겠지만 위성 사진으로는 구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의 왔다는 건데.’
상엽은 추종자를 통해 주변을 계속해서 정찰하고 있었다.
‘더 접근하는 건 위험하겠어.’
비밀 벙커의 주변이라면 감시 시스템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대한 풀에 몸을 숨기면서 움직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상엽은 일단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주변의 지형을 확인했다.
넓은 초원이 200미터 정도 높이의 산에서 끝나는 지점이었다.
‘저 안에 있을 텐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건물은 없었다. 그래서 초원 끝의 산이 의심스러웠다.
상엽은 일단 크게 산을 돌아 주변을 살폈다. 역시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이 모르는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흙부터 확인하자.’
상엽은 산으로 접근해서 기울기가 있는 땅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역시.’
그가 확인하는 건 풀을 덮고 있는 흙의 상태였다.
기울기가 있는 산 내부에서 대규모 공사를 할 경우, 진동으로 인해 흙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수록 풀을 덮고 있는 흙의 높이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흙의 밀도가 낮아져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더 많이 쓸려 내려가고, 이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상엽은 풀을 직접 뽑으며 이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부에 공사가 있었어.”
이를 확인하면서 상엽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런데 감시가 너무 약한데.’
벙커가 숨겨진 산이었다. 그런데 숨겨진 카메라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령아. 확인해.’
추종자는 곧바로 두꺼운 산을 뚫고 내부로 들어갔다.
‘접근할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추종자를 막는 결계가 없었다.
아직 그럴 수 있는 능력자가 없거나 이곳에는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상엽은 내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산 내부에는 벙커가 있었다. 단순한 구조의 벙커는 넓은 홀과 지하 1층으로 된 거대한 대피소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피소 벽에 수십 개의 문이 있었고, 그 안에 사무실과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완성된 지 얼마 안 됐구나.’
외부 공사는 1년쯤 되었지만 내부는 아직 완벽히 갖춰지지 않았다.
사무실엔 집기만, 창고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만 들어온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비품이 부족한 걸로 봐서 아직 인원이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여긴 별로 찾아볼 게 없겠어.’
허탕이라고 생각했던 상엽은 그냥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벙커를 지키고 있는 자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갓코인 유저였어.’
군복을 입고 있어서 몰랐지만 그가 움직이면서 이 사실을 알았다.
홀로 커다란 대피소에 있던 그가 훈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피소는 훈련하기에 적절한 장소였고 그는 몸풀기부터 스킬 사용까지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제거하면 문제가 커질 텐데.’
기억을 잃으면 좋지만 그러면 상대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상엽은 거의 봉인하다시피 했던 유산을 꺼냈다.
이마오의 실.
상대를 세뇌하는 유산이었다.
현재는 한국의 이하나만 세뇌가 되어 있었고 2명을 세뇌하려면 5단계까지 강화가 필수였다.
상엽은 아끼지 않고 이마오의 실을 강화하기 위해 조금 멀리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가 레나를 불렀다.
“5단계까지.”
상엽은 이마오의 실을 강화하고 다시 문제의 장소로 가려 했다.
그런데 레나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그 질문이 상엽에겐 평소와 다르게 들렸다. 그저 궁금해서 묻는 느낌이 아니었던 것이다.
“레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말할 수 있는 건 전부 말했어. 지금은 말할 수가 없을 뿐이야.”
“그러면 질문할 자격도 없어.”
상엽도 평소와 달리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는지 레나는 바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이를 보며 상엽이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네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되면, 나도 뭐든지 다 말해 줄게.”
“쳇. 너무 똑똑해졌어. 예전의 어리숙함이 그리워.”
“매력이 없어졌다는 건 아니지?”
“그게 중요해?”
“당연하지. 난 인기 많은 남자가 될 거야. 내 여러 목표 중의 하나야.”
레나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고백하듯 말했다.
“인정해. 지금 내가 좀 이기적이야.”
“매력은 여전해.”
상엽은 웃으며 레나를 위로했고 그들은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질 수 있었다.
상엽은 예정대로 벙커 내부로 진입했다.
닫혀 있는 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령 걸음으로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게 된 갓코인 군인은 비상 상황을 알리기 전에 상엽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결국 세뇌로 이어졌다.
군인을 세뇌한 상엽은 손쉽게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하북성 옥전에만 10개의 벙커가 있다.
하지만 배치받은 벙커 외의 다른 장소를 알지는 못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예전부터 육성하던 갓코인 부대의 실전 배치를 시작했다.
세뇌 군인 역시 이 프로젝트로 양성된 갓코인 유저였고 3단계 후반의 실력을 가졌다.
그가 행하던 훈련 프로그램도 갓코인 부대에서 만든 방식이었다.
‘자국 육성 부대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사내의 기억을 토대로 하면 100명의 4단계 유저가 육성되었고 이들은 무기를 다루는 것은 물론 국가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가졌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겠어.’
전략이나 전술에도 뛰어났고 애초에 팀으로 육성된 자들도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외부 작전을 하지 않아서 밝혀지지 않았을 뿐, 사무직으로 분류되는 지원 팀까지 완벽한 체계를 갖춘 상태였다.
‘거기다가 강한 길드와 협력 관계까지 있다니.’
상엽은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한 가지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중국 전쟁 판도가 다시 변하겠어.”
중국 정부가 웅크린 이유가 밝혀졌다.
갓코인 군대 육성.
최강 길드와의 협력.
이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래서 피해를 입는 선택을 하지 않고 후유증이 생기더라도 하북성 집결을 지시했다.
“이게 국가 차원의 결정이라는 거지?”
상엽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당장 그들이 힘을 드러내면 하북성과 경계를 두고 있는 땅을 점령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가장 큰 것은 민심이었다.
-시민들이 중국 정부를 원하고 있다.
중국의 시스템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는 그다지 고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무너지자 시민들은 그때가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북성을 꿈꿨고 중국 정부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중국은 이 절차를 완벽히 준비했고 이제 실행만 남은 상태였다.
그 갓코인 유저들의 근거지가 바로 상엽이 있는 하북성 옥전이었다.
“이거 왠지 벌집을 건드린 것 같은데.”
숨겨진 정보를 발견하고 나니 상엽은 자신의 행동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상엽이 확보한 전력만 봐도 이들이 운남과 사천을 공격한다면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상엽과 이민자들로 버티긴 하겠지만 도시들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당장 적이 되는 건 피해야겠어.”
하북성과 운남성은 꽤 거리가 있는 만큼 첫 번째 목표만 되지 않는다면 많은 시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사고 치지 말고 은밀하게 움직이자.”
상엽은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이로 인해서 세뇌한 군인은 살려 둬야 할 뿐만 아니라 세뇌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 군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인간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 볼까?”
상엽은 그를 이용해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기로 했다.
군인은 수다쟁이가 되었다.
많은 동기들과 통화를 했고 서로의 소식을 묻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상엽은 그에게 계속해서 이런 지시를 내렸고 결국에는 원하던 정보를 얻어 냈다.
-실력도 없는 놈들인데 독기만 가득 차서 많이 귀찮아. 무너진 길드의 잔당이라는데 정부에서 받아 줬나 봐.
누군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상엽은 그들이 여림 길드의 잔당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중심 부근인 거 같은데.’
상엽은 모든 정보를 코드 제로에 알렸다.
-천진에서 4시간 거리, 주변 산속에 헬기장이 있고, 무너진 시내와 멀지 않아. 결정적으로 넓은 국화밭이 근처에 있어.
이는 잡담을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통화를 한 상대방은 꽃 알레르기로 고생을 한다고 말했고 하북성은 예전부터 국화 생산으로 유명했다.
코드 제로가 이를 통해 분석을 하는 동안 상엽도 의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노동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 루시의 보고서였다.
루시는 서류 한 장을 사진으로 보내면서 그 밑에 한 가지 설명을 했다.
-왕수라는 자가 핵심 인물인 것 같습니다.
왕수.
상엽은 오래된 기억에서 그 이름을 떠올렸다.
‘파이어스의 망치 조각을 가지고 있던 녀석인데.’
예전부터 중국에서는 유명한 갓코인 유저였다. 상엽이 그리 강하지 않던 시절에 이미 많은 유산과 유물을 완성했던 자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왕수를 잡았구나.’
왕수는 갓코인 랭킹에 나오지 않았다. 시크릿 유물이 있거나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유저임은 분명했다.
* * *
왕수.
60대 초반에 삐쩍 마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매서운 자였다.
조금은 신경질이 많은 것 같은 인상의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상엽이 확실합니다. 우리 길드장님을 죽인 자…….”
“그만. 누가 길드장이라는 거지?”
그의 앞에는 40대 초반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보고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아직 길드가 있던가?”
사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왕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용이 조각된 나무 의자로, 그 무늬가 책상과 벽면까지 이어져 있었다.
용의 방.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무실을 이렇게 불렀다.
그는 사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몰아붙이듯이 말했다.
“부탁을 할 때는 고개를 숙여라. 그 부탁을 들어주는 건 나의 뜻이니.”
“죄송합니다.”
사내는 왕수가 다가오자 이겨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그걸 조사해 온 건가?”
“그, 그렇습니다.”
“중국 정부가 너희들에게 준 기회와 시간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단 말이지?”
사내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해야지.”
왕수는 사내의 발을 밟아 버렸다.
으득!
사내의 발등뼈가 완전히 박살 나며 신발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으으…….”
“다시 묻지. 이번에도 대답이 늦으면 심장을 짓이겨 주겠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좋아. 한결 나아졌어. 그럼 이제 제대로 보고를 들어 볼까?”
왕수는 사내의 뺨을 가볍게 치더니 나무 의자로 돌아갔다.
“정상엽이 소여진을 죽인 게 확실한가?”
그들은 사라진 여림 길드의 길드장인 소여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황상 그렇습니다.”
사내는 신음을 참으려 어금니를 악문 채로 대답했다.
“정황만으로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려고 한 거지?”
“복수입니다. 길드장, 아니 예전 길드장님의 복수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앞으로 기꺼이 중국 정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을 무슨 권리처럼 말하는군.”
왕수는 그와의 대화가 불편했다.
“좀 더 솔직해진다면 생각을 해 보지.”
사내는 출혈이 점점 멎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도 블랙 유저라 회복에는 자신이 있었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결국 출혈로 인해 죽을 일은 없었다.
‘마지막 카드를 꺼낼 수밖에.’
중국 정부 밑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모은 사냥터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다.
2급 위험 지역에서 그들이 해 왔던 노하우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그 자료를 넘겨받고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냥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를 공개하진 않았다. 그 마지막 하나를 복수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였다.
결국 사내는 그 카드를 이제야 꺼내 보였다.
“새로운 신의 길이 나타났습니다.”
왕수의 지루했던 표정에 호기심과 욕심이 동시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