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상엽은 콧노래를 부르며 백화점을 나왔다. 그리고 일부러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 서.”
예상대로 누군가 상엽을 불러 세웠다.
-단구칠. 해령 길드의 중요한 돈줄.
상엽은 그의 신분을 떠올렸다.
“멈추라고!”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뭐야?’
상엽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자신을 부르는 인물은 땅딸보 단구칠이 아니었다.
“내 지갑 내놔!”
소매치기 소년이었다. 소년의 곁에는 그를 지키던 소녀가 함께였다.
“내 동생 지갑 내놔!”
소녀가 악을 쓰며 외칠 때, 또 한 명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거 안 좋은데.’
땅딸보 단구칠.
그가 골목으로 나타나서 상엽을 노려봤다.
“이 꼬마들은 뭐야?”
단구칠은 거칠게 아이들을 밀어냈다. 그의 힘에 아이들이 벽에 꼬꾸라졌지만 단구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더니 대뜸 상엽을 향해 욕설을 쏟아 냈다.
“무릎 꿇고 개새끼처럼 빌면 살려는 주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오더니 손을 휘둘렀다. 상엽을 일반 관광객이라고 판단했는지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맞아 줄 이유도 없었다.
상엽은 슬쩍 몸을 뒤로 기울여서 손을 피해 냈다. 그럼에도 단구칠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새끼가!”
이번에는 발이었다. 정강이를 노리고 날아오는 발은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유령아.’
추종자는 몸을 지지하는 단구칠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쿵!
볼썽사납게 쓰러진 단구칠은 얼굴이 붉게 변하며 벌떡 일어났다.
‘3단계는 되겠는데.’
상엽은 그의 행동을 보며 신체 강화 정도를 예상했다. 최근에는 돈 많은 자들이 길드와 결탁하면 조각을 이용한 코인을 상납받기도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납으로 이만큼 단계를 올렸다는 것이 놀랍긴 했다.
‘잠깐. 3단계인 놈이 왜 천만 그레이 코인을 가지고 있는 거지?’
상엽은 이 점이 이상했다. 3단계 유저에게 천만 코인은 엄청난 강화를 할 수 있는 비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뺏을까?’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상엽에게도 천만 코인은 큰 수치였다.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화르르!
단구칠의 뒤에서 응축된 불덩이가 날아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단구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으아!”
전투 경험이 없는 단구칠은 불길이 몸을 잠식하기 시작하자 손을 허우적거리며 비명만 질렀다.
“사, 살려 줘!”
단구칠은 울부짖었다. 이에 상엽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츠팟!
상엽의 몸에서 튀어나온 푸른 불꽃이 단구칠의 목을 잘랐다.
“소리 지르면 다른 사람이 오잖아.”
결국 단구칠이 빛으로 흩어지며 상엽에게 흡수되었고 바닥에 유물과 유산 보관함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를 본 소매치기 남매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만.”
상엽은 고스트 실드로 그들의 접근을 막고 여유 있게 보관함을 습득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어?”
앞뒤를 가리지 않는 남매를 보며 상엽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지갑이나 내놔!”
소년이 다시 한번 악을 썼다. 소녀는 고스트 실드가 사라지자 상엽까지 공격을 하려는지 불꽃을 만들었다.
“그거 던지면 너랑 네 동생도 이 자리에서 죽는 거야.”
상엽이 낮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경고했다.
갑자기 압도적인 기운이 몸을 감싸자 소녀는 감히 불꽃을 던지지 못했다.
“내, 내 동생 지갑…….”
“닥쳐.”
상엽은 더 이상 그들의 응석을 받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지갑을 훔치는 놈들이 자기 지갑 빼앗기는 건 억울해?”
그 질문이 소년의 입을 막았다.
“너희들이 어떤 사연이 있든 내 과거보다 비참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난 당당하고, 너희들은 비겁하지. 이게 너희들이 선택한 인생의 결과야.”
상엽의 몸을 감싸는 푸른빛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리다고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동정은 동화책에서 끝났어.”
망자의 손길이 소년을 향해 화살처럼 뻗어 갔다. 하지만 화살은 소년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내 동생 건드리지 마!”
소녀가 소년의 앞을 막았기 때문이다.
“누나 자격은 있네.”
하지만 상엽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네 동생은 동생 자격이 없어.”
망자의 손길이 소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소녀의 목에 날카로운 창을 세웠다.
“우리 누나 건드리지 마!”
소년이 똑같은 말을 했다. 당장 상엽을 죽일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상엽이 소년을 비웃었다.
“네가 내 지갑을 훔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지갑을 내놓으라고 찾아오지 않았어도 네 누나는 무사했을 거고.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치면 내가 살려 줘야 되나?”
“그만해! 우리 누나 건드리지 마!”
“멍청한 새끼.”
망자의 손길이 소녀의 목에 닿았다. 이제 숨만 크게 쉬어도 목이 뚫리는 상황이었다.
“그만!”
“누나 살리고 싶으면 빌어. 자존심이고 지랄이고, 전부 버리고 누나 살리고 싶다고 빌라고. 그게 동생의 자격이야.”
망자의 손길에 푸른빛이 진해졌다. 이를 본 소년은 그제야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해요! 우리 누나 죽이지 마세요!”
소년은 누나가 정말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죽이지 마세요! 제발!”
“누나를 지키고 싶으면 행동 똑바로 해. 언제든 너 때문에 누나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상엽은 망자의 손길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동생을 달래는 누나를 향해 말했다.
“동생 교육 제대로 시켜. 너도 그 부분은 낙제야.”
상엽은 서로를 안고 있는 남매를 남겨 두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동생을 안으며 울고 있던 소녀가 상엽에게 말했다.
“그 지갑. 돌려주세요.”
상엽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지갑이 뭔데 이래?”
“말할 수 없어요. 돌려주세요.”
“이 건물 옥상에 있어. 알아서 찾아가.”
그는 간단히 지갑의 위치를 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상엽은 안전 가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쩌지?’
천만 그레이 코인이 생겨 버렸다. 그 상태에서 외부 활동을 할 수는 없었고, 블랙이나 화이트 상점의 강화를 하려면 곤명으로 돌아가야 했다.
해남도에는 등록 지점이 없어서 다시 오는 길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
그때, 석천주의 역할을 끝낸 루시가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상엽을 보자 바로 변화를 알아봤다.
“천만 그레이 코인이 생기셨군요.”
그녀도 헌터 아이가 있었다.
“그렇게 됐어.”
상엽은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 주었다.
“단구칠을 죽였다는 말이군요.”
“사고 친 거지?”
“분명히 코드 원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만난 적이 있었으니. 그를 아는 자라면 코드 원을 쫓아갔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무래도 작전을 바꿔야 하나?”
“아닙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루시는 이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려고?”
“알리바이를 만들면 코드 원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죽은 단구칠의 사진을 확인하더니 변신을 시작했다.
“교정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키는 좀 더 작고, 배가 볼록 튀어나왔어.”
상엽은 그녀를 완벽한 단구칠로 만들었다.
알리바이를 만드는 건 간단했다.
단구칠의 모습을 한 루시가 룸살롱에서 행패를 부렸고, 치안대까지 출동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단구칠의 얼굴을 확인한 치안대는 그냥 놓아주었고, 그 시간에 상엽은 상업 지구의 맥주바에서 술을 마셨다.
루시가 잠시 후에 합류하면서 그들의 알리바이는 완성되었고 일부러 호텔 차량을 불러 돌아갔다.
그 후로 다음 날 아침까지 나오지 않는 것으로 그들은 의심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일을 좀 빨리 진행해야겠어.”
“일단 코인부터 소모하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필요한 조사를 좀 해 놓겠습니다.”
“너무 위험할 거 같은데.”
“위험하면 피하겠습니다.”
“알았어. 작전은 언제든 종료해도 좋아. 무슨 뜻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상엽은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레나를 불렀다.
그는 고민 끝에 화이트 상점이나 블랙 상점을 가지 않았다.
‘필요할 것 같아.’
그가 선택한 스킬은 수영이었다.
“수영 10단계까지.”
그동안 7단계로 충분했지만 해남도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수영도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코인도 소모해야 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터라 상엽은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헤리오스의 바다의 자유.
상엽은 이를 결국 10단계까지 강화했다. 이에 소모된 코인이 892만이었고, 남은 코인으로 수중 호흡도 8단계로 강화했다.
부족한 20만 코인은 루시에게 맡겨 놓았던 유물 조각으로 보강을 하면서 정확히 수치를 맞췄다.
“우리 수영하러 갈래?”
“별로 좋아하는 취미는 아닙니다.”
“쳇. 알았어.”
루시에게 상엽의 기분을 맞춰 줄 의무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석천주가 되어 출근을 하던 루시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훈련소장 왕막조였다.
왕막조는 루시를 보더니 뭔가 눈짓을 보냈다.
-약속 장소로 오라는 신호.
이미 상엽이 석천주의 기억을 읽어 내어 필요한 부분은 알아낸 상태였다.
둘이 스치며 지나갈 때, 왕막조는 손가락 두 개를 슬쩍 펴 보였다.
-두 번째 장소.
이를 떠올리며 루시는 본부의 지하에 있는 휴게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화장실로 이동하며 잠겨 있는 도구실 앞에 섰다.
굳이 노크를 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만 놓여 있는 좁은 공간이 나타났고, 천장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루시는 상엽이 뽑아낸 정보를 토대로 테이블 위에 보관함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물품을 카메라에 보여 준 후에 다시 조각들을 챙기고 도구실을 나섰다.
금고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왕막조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가 아는 금고가 석천주뿐이라면 굳이 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휴게실에서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루시는 본부의 입구가 소란스러운 것을 보았다.
“이거 놔!”
두 명의 갓코인 유저에게 붙잡혀 온 사람은 일곱 살 남짓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격렬히 저항을 했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친 사내들에 의해 취조실 쪽으로 끌려갔다.
스킬의 특성상 루시는 사람을 보면 옷차림과 행동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그녀는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화장실로 이동했다.
쇼핑백을 들고 상업 지구 옆의 주택가를 걷던 상엽은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뭐야?”
한 장의 사진에는 소매치기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어제 말한 그 소년입니까?
루시가 변신을 해서 사진을 보낸 것이다.
-맞아.
상엽이 메시지를 보내자 루시는 소매치기 소년이 본부에 잡혀 왔다고 말했다.
-끼어들지 마. 아마 그 녀석 누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괜히 나서다가 휘말릴 수 있어.
상엽은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다시 길을 걸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상엽 앞에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소매치기의 누나였다.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며 상엽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널 왜 도와줘야 하는데?”
“제 동생만 살려 주시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난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어.”
“아저씨도 해령 길드 싫어하시잖아요. 그 돼지 아저씨도 죽였고,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가진 건 다 드릴게요.”
상엽은 그냥 돌아서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어서 물었다.
“해령 길드와 무슨 사이야?”
-아저씨도 해령 길드 싫어하시잖아요.
그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다급한 소녀는 비밀을 숨길 처지가 아니었다.
“해령 길드장을 죽여야 해요.”
“그 실력으로?”
“유산만 완성하면 성공할 수 있어요.”
상엽이 비웃음을 보이자 소녀는 바닥에 조각을 늘어놓았다.
다섯 장의 양피지에는 뒤집어진 하늘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한 줄기의 번개가 그려져 있었다.
“발로테의 번개. 이제 하나 남았어요.”
“그건 어떻게 모은 거야?”
“원래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해령 길드에서 훔쳤어요.”
“뭐?”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좋아. 어쩌면 서로 거래가 될 거 같은데.”
상엽은 소녀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