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결계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주택이었다. 하지만 추종자의 접근을 막는 결계뿐만 아니라 주변에 해령 길드의 감시 초소가 있었다.
일부러 이런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조용히 처리해야 돼. 기억도 읽어 내야 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그들과 전면전을 해야 될 수도 있었다.
‘운남이 쑥대밭이 될 거야.’
상엽이 걱정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이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은밀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메라도 많고.’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상엽은 집 앞에 세워진 낡은 승용차를 보았다.
‘오늘 잠자리는 좀 불편하겠어.’
상엽이 승용차를 향해 달렸다.
‘유령 걸음.’
투명해진 몸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침 7시.
석천주는 평소대로 집을 나섰다. 항상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카메라에 정확히 잡히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출근길에 오늘은 작은 변화가 있었다.
평소보다 시동을 거는 속도가 조금 느렸고 출발도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차는 곧 평소대로 출발했고 카메라는 더 이상 그를 쫓지 않았다.
석천주의 차는 본부가 얼마 남지 않은 한적한 도로에 멈춰 섰다.
“결혼 생활이 좀 더 남은 거 같아.”
운전대에 있던 석천주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거는 이는 뒷좌석에 있는 상엽이었다.
석천주를 처리한 그는 빠르게 지옥마의 조각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건 하나뿐이었다.
본래 상엽이 가지고 있다가 작전상 넘긴 조각만 남은 것이다.
‘여러 개로 나눠 놨어.’
같은 조각을 한 명에게 몰아놓지 않는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안전장치였다.
여러 조각이 모이면 욕심을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엽은 유물 조각 6개와 유산 조각 5개를 얻었지만 중복되는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가치는 높으니까.’
해령 길드에서 특별히 보관해 놓은 조각들이었다. 하나하나의 가치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단 눈치만 못 채게 해. 다른 금고에 대한 정보는 없어.”
“알겠습니다.”
금고를 맡은 자들은 다른 금고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상엽은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숨겨 둔 패턴은 비슷할 거야.’
상엽은 획득한 보관함을 루시에게 넘겼다.
“이걸 지키려고 애쓰지 마. 여차하면 그냥 넘겨 버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주의를 준 상엽은 빠르게 차에서 벗어났다.
금고 하나를 열었다.
상엽은 사진으로 찍은 문양들을 코드 제로로 보내고 다음 계획을 살폈다.
‘기본적으로 사고가 났을 때, 지원 병력이 올 수 있는 곳이야.’
석천주는 4단계 갓코인 유저였다. 트레저 헌터 출신이었고 도주에 능한 자였다.
상엽이 기습을 하지 않았다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기억에서 상엽이 주목한 부분은 금고가 되고 난 후의 변화들이었다.
우선 그는 길드에서 충분한 보상을 약속받고 3년간 금고 역할을 했다.
3년이 지나면 그는 상위 간부의 직책은 물론 코인 보상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이름이 바뀌었고 신입으로 다시 길드원이 되었다. 성형 수술을 한 것은 물론, 가족들과 연락도 끊었다.
3년이라는 제한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석천주의 원래 이름은 반소격.
금고가 되는 순간 얼굴부터 이름까지 모두 바뀐 것이다.
‘초소 근처에 홀로 사는 길드원. 주변에 반드시 카메라가 있고, 친한 사람이 없이 항상 반복된 생활을 하는 자.’
이는 조건이 만들어 낸 어쩔 수 없는 생활 패턴이었다.
‘본부에서도 멀지 않은 초소라면…….’
상엽은 테블릿 PC에 저장된 해남도 지도를 펼쳤다. 현재도 루시를 통해 자료가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이쯤 되겠어.’
상엽은 의심 지역 세 곳을 설정했다. 석천주가 살던 주택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그는 시간이 남는 틈을 이용해 의심 지역으로 홀로 이동했다.
“이 옷도 익숙해지네.”
꽃무늬 붉은 셔츠를 걸친 상엽은 의심 지역으로 이동했다.
본부에서 차량으로 20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는 상업 지역 경계 초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상엽은 일부러 상업 지역을 먼저 찾았다.
“위장도 확실하게 해야지.”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쇼핑백을 들고 다닐 생각이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지역이지만 선글라스와 모자만으로도 그의 신분은 충분히 가려졌다.
코인도 지난 강화에서 전부 사용한 터라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도 괜찮네.”
일반인처럼 길을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해남도의 상업 지역은 서울과 미묘하게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일 수 있다는 점은 같았다.
그때, 누군가 상엽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자를 쓴 작은 소년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이지만 걸음은 꽤나 빨랐다.
‘어쭈?’
꽃무늬 바지에 있던 그의 지갑은 이미 소년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소매치기라…….’
상엽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목을 끌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
‘유령아. 가서 찾아와. 옥상에서 기다릴게.’
그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죽이지는 말고.’
상엽은 근처의 20층짜리 대형 백화점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창문을 통해 옥상으로 이동했다.
‘유령아. 너한테 실망하려고 해. 아직 도착을 안 했다니.’
-갓코인 유저가 있습니다.
상엽은 추종자의 말에 인상을 구기며 시야를 공유했다. 그러자 쓰러진 꼬마의 앞을 막는 10대 중반의 소녀가 보였다.
소녀의 양손 위에는 불꽃이 떠올라 있었고 이는 꽤 압축된 힘으로 보였다.
추종자에게 직접 타격이 가능한 정도였다.
“그냥 지갑만 찾아서 돌아와. 사고 치면 쪽팔리잖아. 명색이 내가 대장인데.”
-알겠습니다.
추종자는 빠르게 움직여 지갑만 찾고는 다시 상엽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추종자는 상엽의 손 위에 지갑 두 개를 놓았다.
“너 뭐 한 거냐?”
-괘씸해서 같이 가져왔습니다.
추종자는 소년의 지갑까지 가져와 버렸다. 이에 상엽이 따끔한 한마디를 했다.
“잘했어. 훌륭해.”
-감사합니다.
추종자는 상엽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갑을 챙겨 넣은 상엽은 소년의 지갑을 확인했다. 꽤 고급스러운 지갑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이건 뭐지?’
상엽은 소년의 모습과 지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완전히 비어 있는 것도 이상했다.
“다른 사람한테 훔친 거구나.”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상엽은 지갑을 옥상 위에 대충 던져 버렸다.
“유령아. 쇼핑이나 가자.”
상엽은 소매치기를 그냥 내버려 두고 옥상에서 내려갔다.
본래 쇼핑이 목적이었던 그는 굳이 다른 건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서 옷을 골랐다.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옷이나 한 벌 사 줄까?”
본인의 옷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상엽은 여성 의류를 고르기 시작했다.
‘엄청 크네.’
20층 전체가 백화점이었고 반면 손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0층까지는 꽤 사람이 있었지만 현재 상엽이 옷을 고르고 있는 13층은 다섯 팀 정도가 전부였다.
직원들은 곧게 선 자세로 손님이 오길 기다렸고, 근처만 가도 허리를 숙이며 친절하게 안내를 시작했다.
‘위로 갈수록 고급인가?’
처음 옥상으로 갈 때는 창문 밖에서 벽을 타고 이동한 터라 자세히 살필 틈이 없었다.
“이왕 살 거 좋은 걸로 사 줘야지.”
여성 의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엽은 비싸면 좋은 거라 판단하고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15층까지였다. 그 이상은 자격이 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15층까지였고, 비상구는 덩치 큰 경비가 막고 있었다.
“VIP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16층부터 20층까지 무려 5층이 VIP를 위한 공간이었다.
“VIP 자격이 뭔데?”
“문의는…….”
상엽은 엘리베이터를 막고 있는 경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카드를 내밀었다.
“무슨 뜻입니까?”
“돈 좀 찾아 줄래? 현금 지급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서.”
뭔가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경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엽에게 물었다.
“얼마나 원하십니까?”
“지급기에 있는 현금 전부 다.”
“네?”
“싹 다 뽑아 와. 두 대면 두 대에 있는 거 전부. 세 대면 그것도 전부.”
경비는 상엽의 요구에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이에 상엽은 쐐기를 박았다.
“비밀번호는 1234. 쉽지?”
상엽의 눈짓에 경비는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비켜섰다.
“올라가시죠.”
결국 경비는 직접 엘리베이터에 자신의 카드를 댔고 버튼에는 없는 16층으로 갈 수 있었다.
해남도 해령 백화점 16층엔 상엽이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정장을 입은 20대 후반 여성이 인사를 하며 비서처럼 따라붙었고, 매장 중앙에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넓은 복도는 수십 명이 함께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고가의 명품 브랜드 로고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손님이라고는 16층에 단 두 명이 전부였지만 200명의 직원들은 바르게 선 자세에서 그들의 방문을 기다렸다.
“원하시는 브랜드가 있으십니까?”
“그냥 제일 비싼 걸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엽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갔다.
“위로 갈수록 비싼 거면 20층으로 가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19층부터는 멤버십이라 가실 수 없습니다.”
VIP에도 등급이 있었다.
‘거참 더럽네.’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해령 길드랑 싸우면 여길 제일 먼저 부숴 버려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으며 상엽은 18층에 닿았다. 그런데 이곳 VIP층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모든 매장이 단 한 분의 고객만 받고 있습니다.”
이는 VIP를 위한 특별 서비스였다. 한 사람의 쇼핑이 완전히 끝나야 다음 사람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기가 많은 브랜드는 세 개까지 매장이 존재했다.
‘어마어마하네.’
상엽이 놀란 것은 특별한 규칙이나 규모보다 의류의 가격이었다.
‘핸드백 하나에 5천만 원. 천 조각 같은 반바지가 2천만 원. 애들이 물감 쏟은 거 같은 원피스가 3천만 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직원은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해 유럽 디자인 전시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을 원피스로 만든 한정 제품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50벌만 만들어졌으며 우리 매장에도 단 세 벌만 들어왔습니다.”
“아. 그래요?”
상엽은 뭔가 탐탁지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40대 중반의 땅딸보가 나타났다.
그러자 상엽을 안내하던 여종업원까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단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미 유명한 VIP로 보였다. 그런데 단 회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곧장 상엽이 있는 매장으로 들어왔다.
“다른 손님이 있었네.”
“다른 매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여기 무슨 한정판 원피스가 있다고 하던데. 다른 매장에도 있어?”
“아. 로렝떼 한정품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죄송합니다. 그건 여기 매장에만 있습니다. 세 벌밖에 확보하지 못한 제품이라.”
이곳의 규칙에 따라 사내는 상엽이 쇼핑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갓코인 유저입니다.
상엽은 헌터 아이로 이를 확인했다.
‘천만 그레이 코인? 이 자식은 뭐야?’
은근히 경계심을 끌어 올린 상엽은 땅딸보의 불쾌한 말투를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오늘 처음 들어오셨습니다.”
“뭐? 너희들 회원 관리 이따위로 할 거야? 아무나 다 받아들일 거면 VIP가 왜 필요해?”
땅딸보는 찢어진 눈으로 상엽을 훑어봤다.
꽃무늬 셔츠와 반바지는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계나 목걸이처럼 비싼 액세서리도 전혀 없었다.
반면 땅딸보는 명품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고 시계와 목걸이, 팔찌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상엽은 루시가 건넨 자료에서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하. 그놈이구나.’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워낙 그 특징이 뚜렷해서 기억할 수 있었다.
“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 조치해.”
상엽이 그의 신분을 떠올린 사이, 땅딸보는 직원에게 언성을 높였다. 말은 직원을 향했지만 실제로는 상엽을 압박하기 위한 축객령이었다.
꽤나 큰 VIP인지 직원들의 표정이 구겨졌고 애처로운 눈으로 상엽을 보았다.
이에 상엽이 웃으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다 주세요.”
“네?”
“전부 다 달라고요.”
“고객님. 무엇을 다 달라고 하시는 건지…….”
“그 한정판 세 벌. 다 주세요.”
“그, 그건…….”
직원들은 상엽의 뒤에 있는 땅딸보의 눈치를 보았다. 상엽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이거 말이에요.”
상엽은 직원과 땅딸보를 무시하고 진열되어 있는 제품 앞으로 갔다.
그리고 거칠게 옷을 만졌다.
칙!
얇은 옷은 상엽의 손에 걸레처럼 찢어져 버렸다.
“어이쿠. 이거 변상해야겠네.”
상엽은 한정판 두 벌을 전부 걸레로 만든 다음, 멀쩡한 한 벌만 챙기고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로.”
매장 안에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