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160화 (160/300)

# 160

“여보. 저쪽으로 한번 가 볼까요?”

길게 뻗은 검은 생머리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중국계 여인이 상엽의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제안을 했다.

“어. 그래.”

꽃무늬 셔츠에 푸른색 반바지를 입은 상엽의 대답은 어색했다.

“루시.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여보. 제대로 안 하면 작전 실패예요. 저기 우리 보고 있는 사람 안 보이세요? 지금 우리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몰라요.”

루시는 눈짓으로 해변 순찰을 하는 사내를 가리켰다.

하급 갓코인 유저지만 꽤나 무서운 눈빛으로 소수의 관광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시의 말대로 일반인의 목소리를 듣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특화된 스킬이 있다면 감정까지 훔쳐볼 수도 있었다.

해남도는 본래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이제는 몇몇 곳만 특수 지역으로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보다 고급 관광객만 받는 정책이라 경계가 철저했다.

관광 지역 순찰대가 감시하는 건 관광객이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변종의 출현이었다.

덕분에 상엽의 어색한 연기는 아직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여보. 작전 실패하면 골치 아파져요.”

“알았어. 제대로 할게. 그런데 운남을 너무 오래 비워 두는 거 같은데.”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어디나 존재하니까요.”

“무슨 소리야?”

“곤명과 사천 성도. 두 곳 모두에 당신이 있어요.”

루시는 상엽의 셔츠 깃을 만져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대신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당신 모습으로요.”

상엽은 잠시 소름이 끼쳤다.

“몇 명이나 준비된 거야?”

“다섯 명. 그 아이들에게만 허락했어요.”

루시의 준비는 상엽의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곤명의 시청과 사천의 북천성에 상엽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두 명이 대기 중이었다.

필요에 따라 일부러 얼굴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이를 컨트롤하는 사람은 루시였다.

상엽의 존재감이 워낙 크기에 쓸 수 있는 작전이기도 했다. 덕분에 상엽은 마음 편하게 외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리는 신혼여행에 집중할까요?”

“왠지 즐거운 여행이 될 거 같은데.”

둘은 실제 연인처럼 해변을 걸었다.

“멈추십시오.”

해변을 따라 걷던 그들이 모래가 사라지는 지점에 닿았을 때, 한 사내가 그들을 막았다.

20대 초반이지만 단단히 기합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저기 좀 이용하면 안 될까요?”

루시는 근처에 있는 5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곳은 해령 길드의 해안 초소였다.

건물에 해령 길드의 돌고래 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관광 지역 중에 유일하게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다.

“너무 급해서 그래요.”

“그럼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남편이 옆에 있어도 되는 거죠?”

“알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한 매뉴얼이 있었다. 사내는 가짜 상엽 부부를 초소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루시는 자신이 말한 대로 화장실을 이용할 뿐,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해변으로 돌아온 루시는 안내한 사내를 향해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사내가 돌아간 후에야 상엽은 루시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야?”

“정보 수집 좀 하려고요.”

“무슨 정보?”

“사람 얼굴 수집이 필요해서요.”

단어가 살벌했지만 상엽은 바로 이해했다. 언제든 모습을 바꿀 수 있게 해령 길드원의 모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디에 보관하는지를 알아야 돼.”

“곧 밝혀낼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루시는 자신감이 넘쳤다. 상엽에게 기대며 한껏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다시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해변을 걸었다.

‘연기 스킬이라도 살까?’

상엽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호텔 스위트룸의 거울 앞에서 루시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진짜 신기하네.’

다섯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

상엽은 순식간에 여덟 명의 모습으로 변하는 루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오늘 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

이미 루시를 통해 작전 보고를 받았다. 그녀는 길드원으로 변신해서 비상 상황을 만들 작정이었다.

-최고 간부의 모습만 복제할 수 있다면 분명히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상엽은 그 작전을 듣고 루시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 변신은 누구도 못 알아보는 거야?”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냄새, 버릇, 말투는 연습으로 따라 하는 것이라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위험하다는 거네.”

당장 상엽만 해도 루시의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모습이 변해도 단정할 수 없지만 루시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이다.

가까이 가면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비누 냄새가 나기도 했다. 이는 향수와는 또 다른 체취였다.

“작전 변경.”

결국 상엽이 결단을 내렸다.

“이거 가지고 한 방에 가자.”

상엽은 테이블 위에 유산 조각 하나를 놓았다. 이는 지옥마의 조각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완성하지 못하면 쓰레기야. 내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루시는 상엽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날 저녁.

관광 지역에 소란이 일었다.

여유롭게 밤바다를 걷던 몇몇 관광객이 비명을 질렀고 바로 해안 초소의 경계병들이 뛰어나왔다.

경계병들이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난 후였다.

20대 초반의 순찰병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숨을 헐떡였고, 그의 앞에는 유산 보관함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장호. 어떻게 된 거야?”

“치,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장호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떨어진 유산 보관함을 챙겼다.

대부분의 길드가 그렇지만 갓코인 유저끼리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그 전리품은 죽인 자가 갖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단 보고부터 해.”

“알겠습니다.”

장호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초소로 돌아갔다.

20분이 흘렀다.

관광지의 해안 초소로 고급 승용차가 도착했고 장호는 명령에 따라 장소를 옮겼다.

-본부에서 직접 보고하라.

장호가 획득한 유산 보관함에는 지옥마의 조각이 있었다.

각 유산의 조각들은 소지자의 신상을 파악하는 주요한 정보가 되기에 길드에서는 장호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본부에 도착한 장호는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다.

-관광객의 비명이 들렸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이 떠밀려 왔는데 절 보더니 다짜고짜 공격을 하기에 반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랙 유저인 데다 강한 자로 판단되어 바로 죽였습니다.

그의 말은 정황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조각은 길드에 기부하겠습니다.”

“기부?”

“절 본부로 불렀다는 것으로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제 실력으로 보관도 하지 못할 테니 길드에 기부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조사를 하던 40대 중반의 사내가 웃음을 보였다.

“똑똑한 녀석이군.”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호는 인사를 하며 유산 보관함에서 지옥마의 조각을 꺼냈다.

이를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조사관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내가 처리할 일이 아니다. 곧 다른 분이 올 테니 그때까지는 직접 보관하도록.”

“알겠습니다.”

길드의 유산 보관함은 금고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상위 간부들만 알고 있는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금고 역할을 했다.

유물과 유산 금고는 언제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럼 잠시 쉬고 있도록.”

장호는 조사실에서 20분을 기다렸고 잠시 후에 누군가 그의 앞에 앉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장호는 그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인사를 건넸다.

30대 후반의 사내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키가 작아서 곰 인형을 연상시키는 자였다.

“자자. 앉아.”

신입이라면 누구나 그를 알고 있었다.

해령 길드의 훈련소장 왕막조.

그는 장호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더니 명령을 내렸다.

“마위 언덕의 두 번째 탑 위에 조각을 올려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 며칠 쉬고 있으면 이 일에 대한 포상이 있을 거야.”

“포상이라고 하셨습니까?”

“기대해도 좋아.”

왕막조는 장호의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문을 열어 두고 조사실을 나갔다.

조사가 끝난 것이다.

그때부터 누구도 장호를 막지 않았다. 그리고 본부의 입구에는 그를 위한 차량이 마련되어 있었다.

“네 차다.”

노란색의 최고급 스포츠카를 본 장호는 연신 인사를 하고 본부를 떠났다.

마위 언덕의 두 번째 탑.

장호는 이미 명령을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난 지 10분이 지났을 때, 탑의 제단 위로 작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지옥마의 조각은 사라졌다.

‘철저하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추종자를 통해 최대한 멀리서 정찰을 하고 있는 상엽이었다.

길드의 보관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졌다. 초반에는 길드장이나 가장 강한 자가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습격이 빈번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어느 쪽이든 가장 강한 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많은 길드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많은 길드들이 길드 보관함을 비밀로 붙이기 시작했고 가장 등급이 높은 극비 사항이 되었다.

‘길드 금고가 몇 명인지도 알아야 하는데.’

최근에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여러 명의 금고를 두기도 했다.

‘일단 한 놈은 알았고.’

상엽은 자신이 본 기억을 펜던트를 통해 루시에게 보냈다. 그리고 금고의 뒤를 쫓았다.

-결계가 있습니다.

추종자는 마위 언덕에 둘린 결계 때문에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뚫을 수는 있습니다.

‘아니야.’

결계를 뚫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럴 경우 침입자의 존재를 상대가 알게 된다.

‘빠르네.’

추종자를 불러들이자 상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상엽은 무리해서 그를 쫓지 않았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일단 목표는 달성을 했기에 상엽은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로 들어갔을 때,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해머를 꺼냈다.

그가 봤던 해령 길드의 금고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접니다.”

그 말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상엽은 스킬을 쓸 뻔했다.

다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시를 보며 상엽은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 비서라서 고마워.”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무리한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응? 무슨 요구?”

루시는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말했다.

“원하는 연예인으로 변해 달라거나 추억 속의 여자로 변해서 연애를 해 달라는 그런 요구 말입니다.”

“그 생각은 못 했는데. 못 해 준다니까 아쉽긴 하네.”

“코드 원의 모든 것은 제가 케어합니다. 단 성적인 욕구는 채워 드릴 수 없습니다.”

“걱정 마. 다행히 루시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 말에 루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본능을 건드린 것이다.

“루시가 정말 예쁜 건 나도 인정해. 다만 여자로서…….”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걸 원합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말입니다.”

상엽은 루시의 입에 작지만 비웃음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비웃음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질문이 들렸다.

“제 진짜 모습을 아시는 겁니까?”

그 말이 상엽의 머리에 번개처럼 꽂혔다.

“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평소 모습이 진짜 루시일까?’

상엽은 처음으로 이런 의심을 했다.

“물어보면 말해 줄 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묻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

궁금했지만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 * *

해령 길드의 인간 금고 석천주.

공식적인 그의 직책은 본부의 재정 사무원이었다.

하급 갓코인 유저로 전투 요원이 아니라 길드의 회계 자료를 정리하는 사무원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이는 철저히 감춰진 신분이었다.

‘이런 식이구나.’

루시가 그의 명단을 찾아내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루시. 이제 장호는 버려. 석천주가 될 시간이야.”

“파악 끝났습니다.”

“사무직은 자신 있지?”

“제 전문 분야입니다.”

상엽과 루시는 해령 길드 본부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 근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낡은 차가 허름한 주택가 앞에 세워졌고, 운전석에서 한 사내가 내려섰다.

“석천주야.”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상엽은 직접 처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루시가 그에게 물었다.

“지옥마의 조각만 완성하면 바로 떠나실 겁니까? 탈출 계획을 준비해야 합니다.”

금고가 몇 명인지 모르지만 지옥마의 조각이 이번에 완성될 수도 있었다.

“나 이게 왜 재미있지? 마지막이라니 뭔가 아쉬운데?”

“위험한 작전입니다.”

“걱정 마. 목숨 건 도박에서 한 번도 진 적 없어.”

상엽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아직 이렇게 살아 있잖아.”

“코드 원.”

루시는 상엽의 웃음이 불안했는지 차갑게 말했다.

“이건 도박이 아니라 도벽입니다.”

그 말이 상엽의 이성을 차갑게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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