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루시는 보고를 하기 위해 호수를 찾았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게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호수 위의 정자에서는 그녀가 접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시는 몸을 돌렸지만 그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시간이 끝났지만 그 뒤로 은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하자.’
결국 루시는 그 자리를 떠났다.
루시가 상엽을 다시 본 것은 한 시간 후였다.
“쌍오 좀 불러.”
트레저 헌터 쌍오는 상엽이 운남으로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 함께했던 소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옥마의 마지막 조각에 대한 정보가 있어.”
루시는 그 말을 듣더니 추가 설명을 기다렸다. 상엽도 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적설이 말해 준 정보야. 호남의 상급 그레이 상점에 의뢰가 뜬 적이 있다고 했어. 누군가 이 의뢰를 해결하고 조각을 얻었는데 그게 마림 길드 소속이야.”
“마림 길드…….”
루시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호남의 패권 다툼에서 밀려나서 광동의 악조악 길드로 흡수된 블랙 길드가 바로 마림 길드였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악조악 길드에서 무슨 사고를 쳤나 봐. 길드 소속 유산을 훔쳤다는 소문이 있어. 지금은 도망자 신세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자의 이름은 만당문입니다. 악조악 길드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해남도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해남도?”
루시는 적설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북천의 곁에 있던 여인들의 정보를 종합한 것이다.
“지옥마는 뛰어난 유산이지만 그걸로 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북천은 지옥마와 연결된 또 하나의 유물을 주목했다고 합니다.”
“그래?”
“암흑의 신전. 이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북천도 찾으러 다녔지만 결국 한 조각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옥마와 암흑의 신전.
상엽은 이 이름을 분명히 기억했다.
“코드 원. 주제넘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해도 돼.”
“적설의 정보가 이상합니다. 그녀의 정보만 듣고 움직였다면 코드 원은 두 길드와 분쟁이 생겼을 것입니다.”
만당문을 쫓는 악조악 블랙 길드.
해남도를 장악한 해령 화이트 길드.
루시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옥마에 대한 정보는 루시도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적설이 조금 빨랐을 뿐이다.
루시는 이 부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 정보를 좀 더 신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상엽으로서도 뜻밖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깨달았다.
지옥마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라고 한 건 상엽이었고 루시는 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데 이를 듣기도 전에 먼저 행동을 결정했다. 적설의 정보만 믿은 것이다.
“신중하지 못했어. 미안해.”
“죄송합니다.”
상엽은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이는 신뢰에 관련된 문제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번 명령은 적설이 아니라 코드 제로의 정보를 토대로 내리는 거야. 해남도로 갈 테니까 준비해.”
“쌍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황이 바뀌었어. 이젠 보물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데 능한 사람이 필요해.”
“준비하겠습니다.”
루시는 평소처럼 대답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만족감이 섞여 있었다.
중국 해남도.
한때 변종의 섬으로 불렸던 해남도는 현재 반 이상이 복구가 되어 안전한 장소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었다.
많은 거대 섬이 그렇듯이 해남도도 변종 출현 당시에는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서 인간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그렇게 완전히 인간이 사라지기 직전에 해남도 재건을 시작한 길드가 바로 해령 화이트 길드였다.
지금은 섬의 절반이 회복되었고 당연히 해남도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중국 전쟁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 여전히 변종들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 나선 이들도 해남도를 먼저 침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역사 때문이 아니었다.
-남쪽의 야만 전사들.
해령 화이트 길드는 이렇게 불렸다.
변종들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하면서 자연스레 성장한 그들은 다른 길드에서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갓코인 유저들에겐 자연스레 이런 불문율이 생겼다.
-블랙 유저는 갈 수 없는 섬.
그곳이 바로 해남도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믿어 주십시오.”
상엽은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한 채로 어선에서 내렸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돈 많은 부자가 낚싯배를 빌려 물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항구로 내려서는데 루시는 상엽에게 팔짱을 꼈다.
“뭐야?”
“저희들 부부예요. 안전 가옥까지 이렇게 가셔야죠.”
애정이 가득 담긴 음성에 콧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대는 모습에 상엽은 자신이 루시와 사귀고 있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짧은 착각에서 벗어나자 상엽은 왠지 소름이 끼쳤다.
“루시. 그냥 말은 안 하면 안 될까?”
“왜요? 어색한가요? 제가 싫으세요?”
“아니. 그냥 내가 불편해서 그래.”
“알았어요.”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변신이 가능한 그녀에겐 이런 연기가 익숙했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로 해남도로 들어섰다.
해남도는 섬의 중앙을 기준으로 남쪽은 복구가 완료되었고, 서쪽은 변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섬이 절반으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그런 만큼 안전지대에는 해변에 관광객까지 찾아올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타세요.”
항구에는 하얀색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루시는 직접 운전을 하며 상엽을 안전 가옥으로 안내했다.
“여기예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남쪽 해변에 있는 별장이었다.
마침 노을이 진 저녁이라 해가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상엽은 잠시 바쁜 일상을 잊고 자연이 만들어 낸 장관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잠시였다.
“코드 원.”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감상을 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던 루시였다.
“너무 갑자기 변하지 말아 줄래?”
“죄송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알아본 바로 만당문은 해령 길드에 상납을 하고 안전을 보장받은 것 같습니다.”
“상납?”
“악조악 길드에서 훔친 유물과 유산 조각의 일부일 거라 예상합니다.”
상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분쟁이 없이 이번 작전을 수행하려면 만당문이 스스로 나타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계획은 있어?”
“곧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루시의 대답은 단호했다.
‘사람 찾는 데 필요한 사람이 루시라니.’
지금까지 비서로만 생각했던 루시와 작전을 수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볼까?’
상엽은 호기심이 생겨서 그녀에게 전부 맡기기로 했다.
그날 밤.
루시는 남쪽의 가장 번화한 도시인 창강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해변 관광지의 중심으로 거대한 상업 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경제특구로 지정된 곳이기도 했다.
‘뭐 하나 볼까?’
상엽은 가장 높은 빌딩에서 도심을 걷는 루시를 지켜보았다.
늦은 밤이 되자 행인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가끔씩 해령 길드 소속의 치안 차량이 도심을 순찰했다.
루시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1분 만에 다시 도로로 나왔다.
“응?”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것도 완벽한 남자였다.
‘만당문.’
상엽이 사진으로만 봤던 만당문이었다.
‘사진만으로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신기한 스킬을 본 상엽은 호기심이 생겨서 그녀를 더욱 유심히 살폈다.
챙!
루시는 얼마 되지 않아 영업이 끝난 보석상의 유리를 깨트렸다.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음에도 그녀는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 진열대마저 박살 냈다.
그녀는 가장 큰 보석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근처의 CCTV를 빤히 쳐다봤다.
‘똑똑하네.’
상황은 거기서 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상엽과 루시는 사건이 일어난 보석상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억울할 테니까 반드시 올 거예요.”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잔인하게 들렸다.
“루시. 이 상황에서도 꼭 그렇게 말해야 돼?”
“작전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상엽은 자신이 적응하는 게 빠르다고 판단하며 내버려 두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순찰 차량 한 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내렸다.
무뚝뚝한 얼굴에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내와 억울한 듯이 행동이 커진 사내였다.
“왔어.”
손을 크게 저으며 설명을 하는 이는 만당문이었다.
“루시. 안전 가옥으로 돌아가. 이제 나한테 맡겨.”
이제부터는 상엽의 차례였다.
루시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고, 상엽은 만당문을 계속 주시했다.
고압적인 태도의 사내는 만당문을 향해 귀찮다는 듯이 몇 마디 주의를 주고 돌아갔다.
홀로 남은 만당문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바닥을 한 차례 차더니 부서진 보석상의 유리 잔해를 보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더니 자리를 떴다.
10분 후.
만당문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서자 속도를 높였다.
‘편하게 해 주네.’
빠르게 속도를 올리던 그의 앞에 상엽이 내려섰다. 놀란 만당문은 본능적으로 골목의 벽을 타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오랜 도망자의 본능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조차 하지 않은 도주였다.
‘빠른데?’
상엽이 바로 뒤따라 올라갔지만 만당문은 보이지도 않았다.
“유령아. 일하자. 오래 쉬었잖아.”
추종자가 나타나 주변을 수색했다.
-여기 있습니다.
겨우 20미터 떨어진 지붕 위였다.
‘보호색?’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이 변하는 스킬이었다. 상엽은 빠르게 다가가서 그의 뒷덜미를 잡으려 했다.
펑.
상엽의 손이 닿는 순간, 만당문의 몸이 폭죽처럼 터져 버렸다.
-뒤쪽입니다.
만당문이 다시 골목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귀찮게 하네.”
상엽의 몸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추종자는 계속해서 만당문을 쫓았고 결국 해변까지 닿았다.
그런데 만당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많은 추격을 따돌린 결정적인 스킬이 바로 수영이었다.
“수영 시합이라니. 재밌네.”
상엽은 공중을 밟으며 뛰어올라 만당문의 근처에 떨어졌다. 그리고 깊이 잠수를 시작했다.
‘애송이네.’
상엽은 바닥 끝을 타고 거리를 잡고 한순간 수면으로 튀어 올랐다.
“선택이 나빴어.”
솟아오른 상엽의 손에는 만당문이 잡혀 있었다.
상엽은 안전 가옥으로 돌아왔다.
“만당문은 어떻게 됐습니까?”
“처리했어.”
“정보는 얻으셨습니까?”
“물론.”
상엽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런데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야.”
만당문의 기억에는 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득도 있었지만 직접 얻은 물건은 단 하나였다.
“이거 하나만 가지고 있더라고.”
상엽은 테이블 위에 조각 하나를 놓았다. 루시는 조각의 문양을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조각입니다.”
“상점에 감정해 보면 알겠지.”
상엽은 서두르지 않았다.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옥마의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지옥마의 조각은 해령 길드로 넘어갔어. 그리고 이 녀석이 훔쳤던 악조악 길드의 조각 역시 마찬가지야.”
“골치 아프게 됐군요.”
“뭐 별로 골치 아플 것도 없어. 온 김에 찾아가야지.”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해령 길드는 누가 건드리든 거칠게 반격하는 스타일이라 운남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루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령 길드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길드장은 운영과 정치만 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실제 전투 부대는 부길드장 한추가 이끌고 있습니다. 랭킹 45위의 실력자이며 그가 이끄는 다섯 명의 정예 부대는 전부 랭킹 200위 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꽤 세네.”
“그 외에도 1000위권 유저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숫자는 대북천보다 적지만 평균 실력은 훨씬 앞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북천에 비해 동료애가 강합니다.”
건드리면 골치 아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엽의 표정은 조금도 심각하지 않았다.
“괜찮아. 우리 결혼 생활이 좀 더 길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상엽이 눈썹을 올리며 반응을 원했지만 루시는 어떤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엽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시도했다.
“신혼여행으로 보물찾기 어때?”
상엽은 지옥마를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