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테리아 그룹 중앙 회의실.
레노는 웃었고 회의를 진행 중인 다른 간부들은 긴 한숨을 쉬었다.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회의 끝에 드디어 끝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격론을 펼쳤지만 결국에는 레노의 뜻대로 되었다.
-정상엽에 대한 긴급 지원금 15조를 집행한다.
지금도 1년에 3조를 배정했지만 이번 회의를 통해 그 금액의 다섯 배가 긴급 자금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지금은 긴급 자금일 뿐, 앞으로도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는 아무리 회사의 재정이 튼튼해도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수치였다.
그럼에도 회의를 통해 이 사안이 통과된 것은 레노가 준비한 지원 로드맵 때문이었다.
-중국 운남은 인구 4천만 명에 지하자원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매력적인 땅입니다. 그 땅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운남은 비철 금속의 고장이라 불릴 만큼 매력적인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는 테리아 그룹의 사업과도 크게 관련이 되어 있었다.
-지금 운남은 중국 정부가 관리할 수 없는 땅입니다. 세금 없이 독점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아무런 절차 없이 바로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그 이득을 손실 없이 가진다는 뜻이었다.
거기다가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운남은 전통적인 식량 기지입니다. 지금은 많이 소실되었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지요.
지하에는 자원이 있고, 지상에는 대량 식량 생산이 가능한 비옥한 땅이 있다.
-운남은 테리아가 건설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국이 아닙니다.
레노는 단순히 상엽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일을 진행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명확했고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테리아 네트워크가 지금 시작됩니다.
테리아 네트워크.
이는 테리아가 건설하는 나라를 의미했다.
* * *
“중국 지방 하나가 뭐 이렇게 넓어?”
운남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와 면적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 말은 상엽 혼자 잔당 소탕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테리아에서 지원한 헬기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엽은 곤명으로 돌아와서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치사한 새끼들.’
상엽을 골치 아프게 하는 이들은 하이렌의 잔당이었다.
그들은 마치 산적과 같은 형태로 흩어져서 마을을 약탈하고 있었다.
지배권을 잃어버린 그들의 약탈은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이라서 한 번에 1천 명을 죽이기도 했다.
상엽에 대한 분노를 일반인에게 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더 이상 하나로 뭉치지 않고 점조직 형태로 흩어졌다.
공권력이 완전히 상실된 탓에 열 명만 도시를 습격해도 일반인들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코드 원, 말씀하신 치안 방안이 정리되었습니다.”
루시는 곤명의 시청에 머무르고 있는 상엽에게 두 가지 방안을 말했다.
“30개 주요 도시에 무기를 보급하는 게 기본적인 방안입니다. 현재 그들의 능력을 감안할 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대비가 될 듯합니다.”
“또 다른 권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상엽은 총을 가진 자가 다시 권력자가 되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민간 부대를 육성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한국 군대와 협약을 맺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민간 부대가 육성이 되어야 치안이 유지될 수 있다.
다만 그 시작을 자체의 힘으로 할 것인지, 협약을 통해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이는 철저히 상엽의 생각에 달렸다. 루시는 그의 결정을 돕기 위해 두 방안의 장단점을 알렸다.
“자체 육성은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대신 그 자체만으로도 코드 원의 운남 장악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협약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무기 지급과 동시에 방어가 가능합니다. 다만 초기 과정에서 코드 원이 아니라 한국 군대를 먼저 접하게 되면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한 기반을 다지기가 어렵습니다.”
루시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설명했지만 상엽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협약 요청해. 일단 목숨부터 살려야지. 다른 문제는 그다음이야.”
그 대답에 루시가 처음으로 상엽 앞에서 표정을 보였다.
“웃을 줄도 아네?”
“코드 원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상엽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이에 루시의 웃음이 사라졌다.
“노력 중입니다.”
“노력하지 마.”
이번에는 상엽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날 좋아하게 될 테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연애는 안 돼. 나도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고.”
상엽은 분위기를 바꾸며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하이렌의 잔당은 소탕을 해야 돼. 방어 체계가 갖춰지면 다른 곳으로 가든지, 하나로 뭉치든지 결정을 할 거야. 놓치지 말고 주시해.”
“알겠습니다.”
코드 제로의 시스템이 있어서 상엽은 어려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명령을 그만두려는 상엽과 달리 루시는 할 말이 남았다.
“곤명의 식량 단지 건설을 위해서 방어벽을 재건할 것입니다. 기존보다 2배로 확장할 계획이며 내일 아침에 건설 팀이 도착합니다.”
“응. 알았어.”
“알았어가 아닙니다.”
루시는 평소처럼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종 정리가 필요합니다.”
“아…….”
갓코인 세력이 없는 탓에 이것도 상엽이 직접 해야 했다.
“이건 식량 단지 노동에 대한 분배 계약서입니다. 코드 원의 지시대로 기존의 2배로 책정했으며, 노동 시간은 단축했습니다.”
“하나 더 있어.”
“말씀하십시오.”
“병원 좀 알아봐. 아픈 사람이 많아. 기존에 있던 의사들이 전부 도망간 것 같더라고. 간호사 출신은 전부 좋은 계약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난 일하러 간다.”
상엽은 오랜만에 변종 사냥을 시작했다.
* * *
“정상엽이 운남에 새로운 깃발을 꽂았습니다.”
북천은 참모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 변화에 참모는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는 것이 그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부길드장님의 실종도 정상엽과 관련이 된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갔으면 그 녀석은 운남은커녕 지옥개의 밥이 되었을 테니까.”
“곤명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정상엽이 빠르게 민심을 장악하면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흠.”
북천은 동생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갓랭킹에서 동생의 이름이 지워졌다.
이를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듯이 기다린 것이다.
“길드장님께서 나서야 하실 때인 것 같습니다.”
“쓸모없는 것들.”
북천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 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이냐?”
부관은 그 말이 억울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정상엽을 불러라.”
“네?”
“내 친히 천벌을 내릴 것이니 정상엽을 부르란 말이다. 설마 그런 애송이를 잡으러 내가 직접 가란 말이냐?”
“아마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내 명령에 대해 그리 말이 많았지?”
“죄, 죄송합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참모는 북천이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화를 내며 달려갈 텐데.’
참모는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인상을 쓰고 있는 북천을 다시 보았다.
‘설마 겁먹은 건가?’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던 사내였다. 그런데 최근에 상엽에 대한 정보를 계속 모으고 있었다.
‘광성과는 라이벌이었고, 그가 정상엽의 손에 죽었다. 그 후에 정상엽은 더욱 성장했으니…….’
참모는 그런 생각을 하다 북천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보며 참모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역시 그걸 기다리는 건가?’
참모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만큼 정상엽을 인정한다는 거겠지.’
그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상엽은 어이가 없어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에이씨. 늦었어.’
한바탕 욕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조금 늦은 타이밍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그대의 방문을 허락한다. 3일 후에 사천 성도로 오라.
아이들이 만들어 낸 유치한 말 같았다. 이에 상엽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해.”
그는 사신으로 온 30대 후반 참모에게 힘을 주며 말했다.
“너희 길드에서 날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곧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사신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이제 꺼져.”
상엽은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너도 참 불쌍해. 하필 그런 놈을 대장으로 두고 있다니.”
사신은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곤명을 떠났다.
방어벽 공사가 시작되었고 한국과의 군사 협약이 진행되었다.
상엽은 곤명 주변의 변종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면서 건설 인부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상엽은 모든 변종을 처리하기보다 영역을 이룬 변종들을 적절히 처리하면서 핵심을 제거했다.
그리고 100마리의 수하를 둔 늑대 우두머리를 교화했다.
늑대들은 상엽이 제거한 곤명 주변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다른 변종의 침입을 막았다.
변종이 변종을 막아 주는 형태가 된 것이다.
충분히 안정을 확보한 상엽에게 선물 같은 인물이 도착했다.
“상식이 형.”
“최대한 빨리 정리를 했습니다.”
운남에서 엄청난 전투를 펼친 만큼 그가 획득한 코인도 어마어마했다.
‘8천만 코인.’
게다가 수백 개의 유산은 코드 제로에서 정리 중이었다.
‘화이트 상점에 가야 돼.’
가진 코인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본래는 최상급 블랙 상점을 가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전쟁에 끼어든 만큼 당장 강해지는 것이 중요했고, 두 번째로 화이트 상점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운남에 신평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계속된 운남 패권 다툼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인구의 80퍼센트가 도시를 떠났고 결정적으로 방어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젠 인간이 아니라 변종들의 도시가 되어서 일반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 아직 자리를 잡고 있는 인물이 바로 화이트 상점이었다.
5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급 상점의 목록 하나를 10단계로 완성하는 데에는 4950만 코인이 필요했다.
이것만 생각하면 코인에 비해 실력 상승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상엽이 노리는 건 최상급 상점이었다.
갓코인의 특성상, 초기 단계는 저렴한 코인으로 올릴 수 있는 특징이 있었고 이미 최상급 블랙 상점에서도 경험했다.
930만 코인으로 세 가지 항목을 5단계까지 강화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엽은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6가지 항목 전부 5단계까지 가자. 블랙 상점까지.’
직접 강화를 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5단계의 대폭 증가까지 감안하면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블랙과 화이트의 시너지도 극대화될 것으로 보였다.
상엽은 이를 노리고 화이트 상점을 찾아갔다.
신평에서 근력을 10단계로 상승시킨 상엽은 예정대로 최상급 상점을 알아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최상급 상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머무는 곤명에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제대로 잡자.’
눈치를 보느라 화이트 상점 이용은 언제나 불편했다. 상엽은 이 기회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로 했다.
시청으로 한 사내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상엽 혼자 머물렀던 시청이지만 이제는 꽤 많은 인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전부 코드 제로와 테리아에서 파견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곤명을 회복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낡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50대 후반의 사내는 곤명에서 오랫동안 서점을 운영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코드 제로의 대원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시청의 2층으로 올라갔다.
시청의 2층에 머무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운남의 새로운 지배자. 바로 상엽이었다. 사내는 상엽의 부름을 받고 시청으로 왔다.
2층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사내는 한 여인을 만났다. 안경을 쓴 차가운 느낌의 여인이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인은 손으로 방을 알려 줄 뿐, 따라오지는 않았다.
사내는 그렇게 시장실로 들어갔다.
“안녕. 어서 와.”
상엽을 본 사내는 지금까지의 평범한 얼굴을 풀고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뭐?”
“상대 진영의 상점을 마음대로 부르다니. 당신 뜻대로는 절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상급 화이트 상점.
사내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상엽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사내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입니까?”
“상점 열어.”
“그게 무슨…….”
“장사 안 해?”
상엽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내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