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한 번은 참았다.
그런데 다음 날 바이크를 타고 이동하던 상엽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다.
“하이렌 연합 한구회 부길드장 반유기라고 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말투와 표정이 다를 뿐, 하는 말은 같았다.
“북천 님께서 이미 특수 의뢰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괜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보고 꺼지라고?”
“블랙 유저끼리 싸움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갓랭킹의 시작은 중국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때문에 중국 유저들의 갓랭킹에 대한 믿음은 거의 종교와 같았다.
23위 북천.
38위 정상엽.
그들에겐 이미 싸움의 결과가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상엽은 아니었다.
“블랙이든, 화이트든 날 막으려면 직접 오라고 해. 다시는 지껄이지 못하게 해 줄 테니까.”
“하지만 정상엽 님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왜? 나보다 랭킹이 높아서?”
상엽은 반유기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깡마른 체구에 한구회 마크가 새겨진 고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고전 무협 영화에서나 볼 법한 졸부의 모습이었다.
“지랄들을 한다. 그렇게 숫자로 줄 세우고 싶으면 너희들끼리 해.”
상엽은 반유기가 다시 말을 하려 하자 해머를 세워 그의 얼굴 앞에 멈췄다.
“길드원 관리나 잘해. 살인과 강간이 일상인 새끼들이 어디서 훈계질이야.”
반유기의 표정이 구겨졌다.
“내가 광성을 죽이지 않았으면 아직도 산속에서 풀이나 뜯어 먹고 살 새끼들이 어부지리로 기회를 잡았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상엽은 그의 볼에 해머를 대며 말했다.
“광성도 죽였는데 널 못 죽일 거 같아?”
반유기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악귀처럼 표정을 구기고 있는 상엽의 눈빛을 받아 내지 못한 것이다.
“꺼져. 마지막 경고야. 한 번만 더 내 일을 방해하면 블랙 유저고 지랄이고 다 죽여 버릴 테니까.”
공포 때문이 아니더라도 반유기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상엽이 광성을 죽인 건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운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반유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개새끼들.”
“정말 괜찮을까요?”
“상관없어.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상엽은 괜한 싸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두 번을 참았다.
사실 그는 하이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동을 하면서 기름을 넣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들러야 했다.
그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시민들을 보았다.
이를 외면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가자.”
상엽은 가장 앞선 목적을 위해 다시 바이크를 몰았다.
* * *
랭킹 23위 북천.
중국 블랙 길드 대북천을 이끄는 길드장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로 예전부터 모든 길드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데 중국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힘없는 블랙 길드들을 대북천으로 끌어들이면서 강력한 연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천은 화이트 유저들이 넘볼 수 없는 땅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또 한 번 그를 위한 판이 깔렸다.
눈엣가시 같던 광성이 사망한 것이다.
영역을 맞대고 있는 운남의 절대강자가 사라지자 대북천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화이트 길드 페이롱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상황이었다.
“거절했다고?”
“그렇습니다.”
북천은 키가 2미터에 이르고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한 거인이었다.
때문에 그를 위해 지어진 저택은 모든 가구가 비정상적으로 컸고, 천장이 높았다.
“감히 내 명령을 무시해?”
그는 털이 가득한 자신의 턱을 만졌다.
“꽤 힘을 쓰는 녀석이라고 하더니.”
“힘은 누구도 길드장님께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거인에 어울리는 성장을 했다.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전투를 펼쳤고, 현란한 변수보다는 파괴적인 공격을 선호했다.
어떻게 보면 상엽과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세부 사항은 차이가 컸다.
그는 강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상대와의 접근전을 펼쳤고, 상대의 신체를 파괴하는 성향이 있었다.
“의뢰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나?”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늦군.”
그의 짧은 지적에 보고를 하던 40대 후반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정상엽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라. 널 믿고 단 하나의 의뢰만 진행했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길드장님.”
보고를 하는 사내의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사내는 북천의 경고가 절대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섯 번째 참모였기 때문이다.
앞선 네 명은 모두 계획을 실패했다는 이유로 북천의 손에 죽었다.
이것이 북천이 대북천 길드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었다.
“사원 건설은 어떻게 되고 있나?”
“현재 정부의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쾅!
북천이 앉아 있던 의자를 내려쳤다. 나무 의자는 힘없이 가루로 부서졌고 잔재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무시하고 진행하라!”
“길드장님. 아무리 정부가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훗날을 생각해서…….”
“지금 내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북천 사원.
대북천 길드의 본부가 아니라 사원으로 부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북천의 석상이 세워지고, 업적을 기리는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원의 위치는 사천 성도의 중심이었고, 이 자리에는 사천 시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북천은 그 사천 시청을 밀어내고 사원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난 신이 될 남자다. 신명을 어기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북천은 스스로를 신이라 불렀다.
* * *
“얼마 안 남았어요.”
상엽은 앞을 막는 변종들을 손쉽게 처리하며 쌍오가 안내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긴 이동 끝에 그들은 드디어 목표 지점 10킬로미터 앞에 도착했다.
‘그냥 찾기만 하면 되는 건가?’
특수 의뢰치고는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그 녀석들도 완료를 못 한 거 같은데.”
상엽은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찾는 거면 벌써 끝났겠지.’
그 이유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밝혀졌다.
“어?”
화살표가 아래를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이거 땅속에 있는 거 같은데?”
“땅속이면…….”
쌍오는 화살표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러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아. 무덤이에요. 무덤.”
“무덤?”
“여기 왕릉이 있어요. 조각이 왕릉 안에 있는 거 같아요.”
상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크를 멈췄다.
“이제부터 나한테 맡겨.”
“아니에요. 찾으실 때까지 함께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같이 가고 싶어요. 코드 원이 좋거든요.”
그동안 이동을 하면서 쌍오는 상엽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상엽은 쌍오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고 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수없이 겪어 왔던 쌍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따뜻할 수도 있구나.’
이를 상엽에게 처음 느꼈다.
“위험하면 바로 도망가.”
“네. 알았어요.”
그 때부터 상엽이 선두로 나섰다. 빠르게 접근을 한 상엽은 1킬로미터 지점에서 추종자를 불렀다.
‘유령아. 살펴봐.’
추종자가 목표 지점으로 이동해서 상황을 살폈다.
‘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중장비들이었다.
지금은 가동을 멈췄지만 중장비로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히 보였다.
엄청난 넓이의 땅이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고, 무너지지 않게 세운 지지대가 수백 개에 달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왕릉.
외곽을 살핀 추종자가 그 내부로 들어갔다.
‘이건 뭐 무덤을 저택으로 만들어 놨네.’
어마어마한 규모의 내부 모습이 드러났다.
총 5층으로 구성된 왕릉은 마치 성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규모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사각 벽 내부에는 화려한 문양과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응? 전투가 있었어?’
지하 1층에는 선명한 전투의 흔적이 있었다. 대리석 벽면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본래는 화려했을 집기들이 부서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흔적은 입구의 반대쪽 벽면의 지하 계단까지 이어져 있었다.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지금까지 다섯 명.’
외부에 4명, 1층에 한 명이 있었다.
‘2층으로 가.’
2층과 3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은 전투가 더욱 치열해졌다는 점이었다.
벽면이 무너져서 진흙이 들어온 부분도 있었고, 핏자국도 보였다.
‘4층이야.’
4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추종자는 전투가 펼쳐지는 4층으로 내려갔다.
4층은 다른 층과 달리 천장이 3배는 높은 넓은 광장 형태로 되어 있었다.
스무 명의 블랙 유저들이 일렬로 진형을 꾸린 상태였고, 그들 앞에는 거대한 고릴라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거대 고릴라 뒤로 30마리에 이르는 고릴라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특이한 가디언이네.’
트레저 헌터 송연지에게 가디언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중요한 유물일수록 강한 가디언이 있다고 했다.
‘응?’
고릴라들의 기세는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들과 싸우는 인간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서두르지?’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들은 고릴라를 완벽히 몰아붙였음에도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자가 있음에도 근접전을 펼치는 바람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저런…….’
전투에 또 한 번 변화가 생겼다. 후방에 있던 다섯 마리 고릴라들이 5층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큰 고릴라에 가려져서 이동한 탓에 인간들은 이를 보지 못했다.
‘당했어.’
상엽이 그 생각을 할 때, 대리석 바닥이 부서지며 고릴라들이 후방에 나타났다.
근접전에는 재능이 없는 인간들이 고릴라에 유린을 당했고, 졸지에 앞뒤로 포위를 당한 꼴이 되었다.
‘왜 저렇게 서둘렀지?’
상엽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상엽이 도착하기 전에 처리해라.
그들이 서두른 이유는 바로 북천이 무리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 참모가 토벌대를 닦달했다.
결국 시간이 촉박해진 그들은 무리한 전투를 펼치면서 위기에 몰렸다.
‘졌어.’
숫자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진행을 한 탓에 이미 많은 인원이 죽었고, 더 이상의 지원군도 없었다.
“여기서 기다려.”
상엽은 곁에 있는 쌍오에게 명령을 내리며 왕릉으로 뛰었다.
누군가 상엽의 접근을 알아차리며 급히 소리를 질렀다.
“친구들 살리고 싶으면 닥쳐.”
상엽은 그를 무시하고 빠르게 왕릉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4층으로 들어간 그의 앞에는 겨우 다섯 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쾅!
상엽은 곧장 등을 보이고 있는 고릴라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리고 망자의 손길이 사방으로 뻗으며 다섯 마리의 목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후방의 위기가 사라지자 생존자들은 변화를 감지했다.
“살고 싶으면 빠져.”
상엽은 경고를 하며 대형 고릴라를 향해 뛰었다.
전장의 변화를 감지한 대형 고릴라는 상엽의 움직임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거대 고릴라는 상엽의 몸보다 큰 손바닥을 크게 펼쳤다. 그대로 상엽의 몸을 붙잡아서 으깨 버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상엽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릴라의 손이 상엽의 몸을 완전히 가릴 때였다.
쾅!
폭발이 없는 순수한 힘만으로도 엄청난 굉음이 퍼졌다.
펑!
고릴라의 손바닥이 완전히 으깨지며 그 충격파가 어깨까지 부숴 버렸다.
“함부로 손 내밀면 안 돼. 동물원에서 안 배웠어?”
손바닥을 해머로 터트려 버린 상엽은 멈추지 않고 고릴라의 무릎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기울어지는 고릴라의 턱을 향해 해머를 올려 쳤다.
쾅!
고릴라의 머리가 완전히 터져 나가며 결국 빛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상엽은 남은 고릴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다섯 마리가 남았을 때였다.
-주인님!
챙!
고릴라를 상대하던 상엽의 뒤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상엽의 목 뒤에 멈춰 있었다.
추종자가 몸을 던져서 겨우 막은 것이다.
상엽의 뒤에는 그가 살려 줬던 생존자 중의 한 명이 칼을 내밀고 있었다.
“내가 실수했네. 살려 줄 가치가 없는 놈들이었는데.”
쾅!
생존자는 더 이상 생존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