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널 위해 준비했어.”
상엽은 고백을 하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백을 받아 줄 이는 그의 말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유산–선지자의 속삭임.
선지자의 속삭임의 특수 스킬 교화를 통해 우두머리 늑대를 길들인 상엽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화르르!
늑대 한 마리가 불꽃 창에 휩쓸려 빛으로 흩어졌다.
“많이 벌어. 결국 내가 가져가겠지만.”
이미 늑대 10마리가 빛으로 흩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엽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우우웅!
멀리서 대지를 뒤흔드는 괴성이 들렸다.
그리고 점차 힘을 잃어 가는 늑대 무리 뒤로 거대한 동물이 나타났다.
“2번째 미션이야.”
나타난 변종은 거대 코끼리였다.
“널 위해서 내가 강화까지 했거든.”
미리 정보를 습득한 상엽은 본래 계획에 없던 강화를 진행했다.
코끼리는 전장에 합류하자 상엽의 의지에 따라 곧바로 광성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광성은 코끼리의 등장에 크게 당황했다.
“여기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어?”
코끼리로 끝이 아니었다.
광성이 코끼리의 막강한 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지축을 뒤흔드는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놈 잡는다고 죽을 뻔했거든. 마지막 선물이야.”
여섯 마리의 사자였다.
교화는 상대를 완벽히 제압한 상태에서만 가능하기에 상엽은 사자 우두머리를 상대하느라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맞이했다.
우두머리를 이용해 수하들을 움직이는 방식이라 상엽은 3마리를 교화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변종을 부릴 수 있었다.
“자, 파티 시작.”
사자까지 전장에 합류했다.
광성을 둘러싼 전투는 치열했다.
불꽃 창이 끊임없이 파편을 날리고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기도 했다.
바닥에서 일제히 창이 솟아 숲을 만드는가 하면 그의 갑옷이 빛을 뿌리며 주변에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드디어 코끼리의 목에 불꽃 창이 꽂혔다.
쿠쿵!
쓰러진 코끼리가 또 한 번의 진동을 만들고 스무 개로 갈라진 불꽃 창이 달려드는 늑대 다섯 마리를 동시에 꿰뚫었다.
“잘하네.”
이를 본 상엽의 감상은 이 정도였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미롭게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아직 많이 남았는데.”
광성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변종을 정리했지만 아직 우두머리 늑대와 사자 무리가 남았다.
그리고 드디어 사자의 이빨이 광성의 어깨를 물었다.
챙!
어깨를 문 사자의 배에 창이 꽂혔다. 사자는 강력한 한 방에 의해 소멸했지만 광성의 부상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광성은 모든 힘을 짜내며 변종들을 처리했지만 상처가 늘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깊은 상처는 더 많은 위기를 몰고 왔고 그의 몸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으아!”
광성은 괴성을 지르며 끝까지 항전했다. 그렇게 늑대 우두머리의 배를 불꽃 창이 관통하면서 늑대들은 전멸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섯 마리의 사자가 남았다.
그의 등에는 갑옷을 뚫은 사자의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았고 허벅지와 옆구리에는 깊은 이빨 자국이 있었다.
특히 허벅지와 옆구리는 살점이 크게 뜯겨 나가서 심각할 정도로 피를 쏟아 내는 중이었다.
‘화이트 유저가 그렇지 뭐.’
블랙 유저는 그나마 상처에 대한 내성이 강했다. 하지만 순수 화이트 유저는 그렇지 않았다.
대신 신체의 힘과 속도는 블랙 유저를 넘어선다.
강화를 계속할수록 장단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를 보완할 스킬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뿌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쾅!
광성이 또 한 마리의 사자를 처리했고, 이를 악물며 사투를 벌였다.
5분이 흐른 후.
“헉. 헉.”
광성이 숨을 몰아쉬며 상엽을 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어떤 변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처가 깊은 만큼 광성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광성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상엽을 향해 걸어왔다.
바닥에 불꽃 창을 끌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강렬한 기개가 느껴졌다.
하지만 상엽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미안한데. 이제부터가 진짜야.”
슈욱!
광성의 주변에서 30개의 검은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30명의 유령 친위대가 나타났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거든.”
상엽의 말대로였다. 광성은 30명의 유령 전사를 마주하자 처음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온전한 상태였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유령아, 나 똑똑해진 거 맞지?”
-주인님은 언제나 현명하셨습니다.
“좋아. 오늘은 그 아부가 마음에 들어. 단어 선택도 훌륭했어.”
상엽은 대화를 마치고 광성을 다시 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온실에서 대장 놀이나 하고 있을 것이지. 원시인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상엽은 그 말을 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유령 전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광성은 도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단하긴 하네.’
전투가 시작되자 쓰러지는 쪽은 유령 전사들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두 명이 쓰러졌고 광성은 믿을 수 없는 의지를 보여 주며 전사들의 숫자를 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과 속도가 줄어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심한 현기증까지 느끼고 있었다.
15명의 유령 전사가 쓰러졌을 때, 처음으로 그가 충격이 아닌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유령 전사들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감히!”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광성은 다가오는 유령 전사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의 어깨에 뼈로 된 창이 관통했지만 유령 전사의 머리도 창에 꿰뚫렸다.
“대단하네.”
여유롭게 광성을 구경하던 상엽의 마음에 파동이 일었다.
성격은 건방지지만 그 실력과 의지는 그럴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광성은 결국 30명의 유령 전사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인정해.”
상엽은 결국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성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겨우 몸을 세웠지만 떨리는 손으로도 창을 놓지 않았다.
“이게 우리 운명이잖아.”
상엽은 해머를 움켜쥐었다.
“인정한다고 살려 둘 수는 없으니까.”
그는 마무리를 위해 광성을 향해 뛰었다.
광성은 상엽이 달려오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번.’
지금의 광성을 만든 것은 유산이나 신체 강화가 아니었다.
수만 번을 연습한 창술.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찌르기였다.
단순히 신체 강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빠른 찌르기가 그의 주무기였다.
광성은 그 한 번을 노렸다.
‘지금.’
상엽이 그가 원하던 위치까지 다가왔다.
정면으로 다가와 준 덕분에 그는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쐐애액!
공기를 가른 창이 쇳소리를 내며 적의 목을 노렸다.
‘완벽했다.’
광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창끝이 상엽의 목을 찔렀다.
하지만 허무한 느낌만 남았다.
상엽이 창은 물론, 자신의 몸까지 통과해 버린 것이다.
“원하는 건 다 한 거지?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해.”
광성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야를 전부 채운 해머가 보였다.
쾅!
그의 치열했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상엽은 그가 빛으로 흩어진 자리를 한참 동안 보았다.
남은 것은 그가 가진 유물과 유산 보관함뿐이었다.
기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감정이 지워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상엽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유령아.”
-네, 주인님.
“아부 좀 해 줄래?”
-마지막 한 방은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상엽은 추종자의 지나친 아부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네가 했던 말에 대한 믿음이 전부 사라졌어.”
-진심입니다.
“됐어.”
그래도 추종자의 대화로 상엽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자! 이겼으니까 웃어야지!”
상엽은 전리품을 챙기고 호숫가로 돌아갔다.
* * *
샐러맨더의 신전 조각이 모두 모였다.
광성이 그토록 원했던 유물이었다.
불꽃을 쓰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힘이 그곳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실패는 곧 죽음이다. 상엽이라고 그런 입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냥 싸웠으면 어땠을까?”
광성은 1급 위험 지역을 파악하지 못했다.
상엽이 있으니까 자신도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더 강해져야 돼.”
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화를 통해 손쉽게 처리를 했지만 그가 싸우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제 그런 녀석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상엽은 조각을 완성하기에 앞서 박광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신전에 갈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광성은 어떻게 됐어?
“처리했어.”
-다친 데는 없고?
박광신의 따뜻한 질문이 상엽에겐 낯설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난 멀쩡해.”
-알아서 잘하겠지만 조심해.
“당장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 거지?”
-아직은 괜찮아.
“알았어.”
전화를 끊은 상엽은 또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식이 형,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예전에 유물을 대량으로 정리한 이후로는 오상식을 만나지 않았다.
“처리할 물건들이 있어. 꽤 많아.”
상엽은 그냥 흡수하기에는 좋은 유물이 많다고 판단해서 오상식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떤 물건인지 봐도 되겠습니까?
상엽은 사진을 찍어 모든 유물과 유산을 보여 주었다.
-대단합니다. 바로 계산이 안 될 정도입니다.
“일단 한국으로 갈게.”
-기다리겠습니다.
상엽은 신전으로 가기 전에 한국에 들를 생각이었다.
‘동희 음료수도 바닥났고. 신전에 대한 정보도 좀 모으고 가자.’
광성이 샐러맨더의 신전 조각을 찾는다는 것은 이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완성된 유산을 가진 자가 소멸하면 조각은 다시 흩어져요. 이미 가졌던 자가 있으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예전에 송연지가 했던 말이다.
“오랜만에 한국이네. 김치찌개랑 김밥 먹고 싶다.”
상엽은 음식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는 미시간호로 뛰어들었다.
로키는 멀리서 폭음이 들리는 순간부터 호숫가를 떠나지 않았다.
“형이 이길 거야. 무조건 이길 거야.”
말과 달리 로키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은 점차 불안감으로 변했다.
“제발…….”
“여자 친구라도 기다리냐?”
누군가의 목소리에 로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형!”
로키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가 상엽의 품에 안겼다.
“난 여자 친구 아닌데.”
“엉엉!”
로키는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아직 꼬마네. 그래서 언제 크냐?”
상엽은 로키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내가 살아온 게 그렇게 기뻐?”
로키는 상엽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이렇게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상엽은 로키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시간을 나눠 주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상엽은 원치 않아도 뉴스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 이하나 무죄 판결.
길게 끌어왔던 이하나의 최종 판결이 나온 것이다.
그동안 구속 수사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말이 많던 그녀에게 무죄까지 내려지자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년이 되려면 좀 더 노력해야지.”
상엽은 곧바로 이하나를 만났다.
사람이 없는 공원에서 이하나를 만난 상엽은 제일 먼저 세뇌를 풀었다.
그러자 이하나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은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해. 네가 무죄를 받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상엽의 말에 이하나의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비명을 지르려 했다.
자신의 기억에 있는 본인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다른 이에게 시켰던 모든 짓을 직접 했다.
스스로 찾아가서 옷을 벗고, 유혹을 했다. 비정상적인 성향을 모두 맞춰 주었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웃었다.
명품을 선물하고 유린당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상대 취향을 조사해 옷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번 맺은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찾아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딸.
최고의 연예인.
이 타이틀은 그녀가 만나는 이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아…….”
상엽은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왜 그래? 이제 시작인데. 넌 재능이 있잖아. 더 나쁜 년이 될 수 있는 재능.”
상엽은 이마오의 실로 다시 그녀를 세뇌시켰다.
“이번에는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해. 그리고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전부를 다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참고 견디면서 은밀하게 네 세력을 만들어. 방법은 무죄를 받을 때와 같아. 뭐든 직접 하는 거야.”
상엽은 그 말을 남기고 공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