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그레이 상점을 중급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고 위치등록을 하는 건 간단했다.
그리고 상점 소환권까지 구입했다.
“웬만하면 이 도시로는 오지 마. 소환에는 언제든 응해 줄 테니까.”
그레이 상점은 20대 초반 외모를 가진 금발 청년이었다.
말롯이라는 이름을 쓰는 그는 지금까지 만난 상점과 달리 어두운 느낌에 불친절한 인상이었다.
“지루해 보이네.”
“재미있는 일이 없는 도시니까.”
그는 무료한 표정으로 대충 대답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느낌이었다.
“바꾸려고 노력해 봤어?”
“그럴 자격이 없어. 난 상점이니까. 규칙위반이거든.”
상엽은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뭔데?”
“여기가 어떻게 유지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어.”
말롯의 반문에 상엽은 말을 바꿨다.
“불합리하잖아. 군대가 탈출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제대로 보급도 안 해 주는데.”
“풋.”
말롯의 무료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대충 감은 오잖아.”
“함부로 판단하지 마. 여긴 나름대로 질서가 있으니까. 그리고 탈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가면 행복해질 거 같아?”
“적어도 변종에 대한 위협은 없겠지.”
“그 위협은 여기도 없어.”
상엽은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탈출해 봤자 그들은 더 심한 노동과 차별을 겪게 돼. 무너진 미국의 이민자. 이 꼬리표는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거든.”
상엽은 거기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현실이 그런 거야. 이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이곳이 다시 국가처럼 거대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뿐이야. 당장 노동이 힘들어서 잘못된 꿈을 꾸는 사람이 많지만, 그게 옳은 방법은 아니야.”
탈출구가 없다. 그래서 받아들여야 한다.
“탈출을 하려면 탈출구를 먼저 마련해야지. 무작정 달려 봤자 벽에 부딪치기만 할 뿐이야.”
“인정해. 내가 섣불렀어.”
“그래도 이해가 빠르니까 다행이네. 고집을 부리면 다시 지루해질 뻔했는데.”
대화를 통해 말롯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그는 상엽에게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그런데 넌 여기에 왜 온 거야? 사냥을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사냥하러 온 건데?”
“뭐? 설마 여기서 사냥을 하겠다는 거야?”
상엽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말롯의 표정이 다시 지루해졌다.
“널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네. 잘 가.”
그는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내가 죽을 거라 생각해?”
“많진 않지만 몇 명 봤어. 그들 중에 다시 날 만난 사람은 딱 두 명이었어.”
“그래도 두 명이나 있으면 희망을 가져 볼 만하지 않아?”
“둘 다 하루 만에 도망갔어.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사냥이 아니라 탈출을 위해 부른 것이다.
상엽은 굳이 자신은 이미 사냥을 해 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터에서 부를게. 무료 관광이니까 기대하고 있어.”
어차피 자주 만나게 되면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상엽은 그때를 기약하며 상점을 나섰다.
-주인님. 지켜보는 자가 많습니다.
20명 정도의 갓코인 유저가 있었다.
‘여기서 버텼으니까 꽤 실력자겠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1급 위험지역의 특수 방어부대.
그들의 실력은 직접 싸워 보지 않고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제 나갈 거니까.”
상엽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시카고의 담수호인 미시간호로 다가갔다.
그런데 강가에서 물을 뜨고 있는 아이 중에 로키가 보였다.
“감사 인사 정도는 하고 가도 되지?”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쳇. 매정하네.”
결국 상엽은 로키에게 행여나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 * *
많은 것이 바뀌어도 계절은 그대로였다.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무릎까지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높은 하늘에서 내려앉은 따뜻한 햇살이 만연한 오후였다.
쾅!
평화로운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폭음이 터졌다.
꾸오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코끼리는 특유의 순한 눈으로 죽음을 기다렸다.
“상아가루가 필요하다고 했지?”
상엽은 쓰러진 코끼리의 상아를 해머로 부러트렸다. 코끼리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지만 상엽은 냉정했다.
“방금까지 날 죽이려고 별짓을 다하던 놈이 피해자인 척 하지 마.”
그는 코끼리가 소멸하기 전에 상아를 둘로 쪼갰다. 그러자 내부에 손가락 크기의 투명한 부분이 나타났다.
“이걸 긁어서 담으면.”
투명한 부분을 긁어서 동희에게 받은 목각상자에 담은 후에야 상엽은 코끼리를 처리했다.
“진짜 원시인이 돼 버렸네.”
1급 위험지역에 들어온 지 보름째였다.
그는 시카고의 미시간호를 이용해 사냥터를 잡고 있었다.
미시간호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호수라서 북부라고 하면 시카고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면도라도 할까?”
깎지 않은 수염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옷은 이미 의미를 잃었을 정도로 찢어졌다.
셔츠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고 팬티나 다름없는 찢어진 청바지를 겨우 걸친 수준이었다.
“자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다시 가자.”
외모에 신경 쓸 곳이 아니었다.
“익숙해지고 있어. 이럴 때 더 달려야지.”
그는 사냥할 수 있는 변종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코끼리 학살자가 간다.”
최하 3만 코인에서 5만 코인까지 획득할 수 있는 변종이었다.
다른 사냥꾼은 두꺼운 피부와 단단한 뼈에 의해 사냥을 포기했지만 상엽은 오히려 코끼리가 편했다.
“때릴 데도 많고.”
어느 부위든 파괴할 자신이 있는 상엽에게 코끼리는 좋은 사냥감이었다. 물론 그 무지막지한 힘에 조금이라도 휘말리면 목숨이 위험했다.
“400만 코인이라. 좋아.”
처음에는 조금씩 모이던 코인이 이제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두 번의 치료를 하느라 꽤 많은 코인이 소모되었지만 사흘 전부터는 하루 30만 이상의 코인이 모였다.
예전에는 치료하느라 코인이 모일 날이 없었지만 그때에 비해 모든 능력이 상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에 30만이면, 한 달에 900만 코인.”
계산을 하던 상엽은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건 것치고는 부족해. 하루 50만 코인은 벌어야지.”
그는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1만 코인이 넘는 변종들이 지척에 널려 있었고, 그가 원한다면 끝도 없이 전투를 펼칠 수 있었다.
“유령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끝도 없는 위험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주인님께서는 당연히 해내실 수 있습니다.
“아부가 늘었네.”
-진심입니다.
상엽은 추종자의 말에 웃었다.
“다음 목표는?”
-동쪽입니다.
이미 추종자는 또 다른 코끼리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
“일단 코끼리부터 전멸시키자.”
아무리 상엽이라도 모든 변종을 사냥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코끼리만 사냥을 했다.
가장 효율이 좋고 자신의 전투 특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가면 돼.”
그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계획을 세워 두었다.
“좋아. 가자.”
상엽은 다시 해머를 들어 올렸다.
11월인데 눈이 내렸다.
낙엽은 이미 모두 떨어졌고 세찬 바람이 몰아치기도 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눈이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몸이 마를 일이 없었다.
크릉!
첫눈이 내린 들판 위에서 200마리의 늑대들이 원형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오직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뭐해? 덤벼.”
최하 3천 코인을 가진 200마리의 늑대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상엽은 두려움이 없었다.
컹!
1만 코인을 가진 우두머리 늑대가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늑대들이 일제히 원을 좁히며 상엽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혼자가 아니라서.”
늑대들이 출발하는 순간, 상엽의 주변에서 30개의 검은 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기둥이 사라진 장소에는 유령전사들이 서 있었다.
-아오나의 죽은 전사들의 충성징표.
10단계 – 망자 친위대 30명을 소환한다.
충성징표 유산은 총 20단계 유산이었다.
현재는 10단계까지 강화가 되었고 50명 모두를 소환하려면 20단계까지 강화를 해야 했다.
상엽은 2달 동안 모은 코인을 제일 먼저 충성징표에 투자했다. 이것이 상엽이 세운 첫 번째 계획이었다.
‘군대로 쓸어버리면 돼.’
이로 인해 최근에는 하루에 70만에 달하는 코인을 모으고 있었고 지금처럼 적당한 전장을 형성할 경우 100만 코인을 넘긴 경우도 있었다.
30명의 유령전사와 1명의 유령추종자.
유령 군대가 드디어 늑대 무리와 전투를 벌였다.
크릉!
늑대의 외형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발톱은 1미터까지 늘어났고 이빨에 걸리는 건 뭐든지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령전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늑대 정도는 잡아 줘야지.’
압도적이진 않지만 그들은 네다섯 마리씩 달려드는 늑대들을 버텨 냈다.
모든 전사들이 각자의 특성이 있기에 상대에 따라 다른 효율을 보이기도 했다.
“조금만 버텨. 곧 편해질 테니까.”
상엽은 유령전사들에게 늑대들을 맡겨 두고 좁혀진 포위망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대장전부터 해야지.”
상엽이 노리는 건 우두머리였다.
그를 본 우두머리 늑대의 털이 바늘처럼 일어서더니 붉은 액체를 머금었다.
“상대를 잘못 만났어.”
쾅!
상엽은 독을 품은 바늘을 무시하고 스트라이크를 펼쳤다. 그런데 그의 해머가 닿은 곳에는 늑대가 없었다.
‘빠르네.’
흩어지듯이 해머를 피한 늑대는 짧은 도약 두 번으로 상엽의 오른팔 노리며 달려들었다.
‘고스트 체인.’
상엽은 오른팔을 내밀며 체인을 형성했다.
콰직!
“맛있냐?”
늑대의 턱에 걸린 것은 상엽이 만든 체인이었다. 평소와 달리 상엽은 고스트 체인을 자신의 팔에 감아 갑옷으로 활용했다.
이 역시 수많은 전투를 펼치면서 습득하게 된 응용이었다.
‘가시.’
챙!
체인에서 일제히 가시가 튀어나왔다.
“너희들은 꼭 뭐든 물고 보는 습성이 있더라고.”
크릉!
늑대가 다급히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입 밖으로 진한 피가 흘러나왔다.
“자. 이제부터 진짜야.”
상엽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두머리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팔각대시와 스트라이크가 계속해서 폭발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늑대의 눈에 기회가 보였다.
평소보다 한 걸음 뒤에서 펼쳐진 스트라이크를 본 것이다. 반응할 수 있다고 판단한 늑대는 오히려 상엽을 향해 뛰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2미터나 늘어나며 마치 휘어진 검처럼 상엽의 심장을 노렸다.
‘유령걸음.’
하지만 상엽의 몸은 늑대를 그냥 통과해 버렸다.
늑대가 당황한 사이, 이미 등 뒤에서는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쾅!
드디어 상엽의 해머가 늑대의 등을 때렸다. 힘에 밀려나는 늑대를 보며 상엽은 거산을 소환했다.
쿵!
밀려나던 몸이 돌기둥에 막히자 늑대는 다급히 몸을 가누며 기습에 대비해 몸을 옆으로 옮겼다.
그 순간 돌기둥이 산산이 조각나며 폭발을 일으켰다. 상엽의 해머가 아슬아슬하게 목표를 놓친 것이다.
상대의 공격이 실패하자 늑대는 기회를 잡고 상엽의 목을 향해 뛰어올랐다.
늑대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엽의 몸을 감싸던 푸른 불꽃이 변형을 일으켰다.
푹!
그리고 푸른 불꽃은 벌리고 있는 늑대의 입으로 들어갔다.
“뭐든 물려고 하면 안 된다니까.”
망자의 손길로 우두머리 늑대의 입 안을 꿰뚫은 상엽은 마지막으로 해머를 내려찍었다.
쾅!
그 한 방으로 우두머리 늑대는 사라졌다.
회색빛이 상엽에게 흡수되었고 쓰러졌던 자리에는 조각 하나가 남았다.
“첫 조각이네.”
1급 위험지역에서 처음으로 특수 변종을 잡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에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야야! 빨리빨리들 움직여!”
철거를 지시하는 소장처럼 상엽은 유령전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
우두머리가 처리되고 상엽이 전장으로 뛰어들자 늑대들과 유령전사들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방어에 치중하던 전사들이 공격에 나서자 힘의 기울기는 더욱 극명해졌고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후우.”
결국 유령전사 12명이 소멸되긴 했지만 전투는 상엽의 승리로 끝났다.
소멸된 유령들은 24시간이 지나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좋아! 수고했어!”
늑대들은 그렇게 전멸했다. 상엽은 결과에 기뻐하며 늘어난 코인과 유물 조각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주인님!
추종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추종자가 정찰한 곳을 확인했을 때, 상엽의 표정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뭐야? 여기까지 온 거야?”
한쪽 머리가 무너진 은빛 여우가 상엽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