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충격의 기자회견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딸이 비밀파티의 장부를 공개한 것은 물론 그동안 수많은 스폰서의 브로커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성년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현직 연예인들이 대거 관련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고백했다.
정다혜라는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연습생 한 명을 목을 졸라 살해하고 자살처럼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조차 그런 사실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고백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국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찬양일색이던 현직 대통령의 딸이 순식간에 살인자에 스폰서 브로커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 여파가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대통령 정득수까지 흔들어 놓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담 엔터테인먼트의 비밀 파티가 다시 한 번 수면으로 떠올랐고, 모든 관계자들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워낙 큰 사건들의 연속이라 검찰조차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기자회견 이후에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대통령의 미담 엔터테인먼트 비밀 파티 관련 여부.
-이하나의 살인죄.
-스폰서들의 처벌 여부.
스폰서들의 현재 직책과 지위가 워낙 높아서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사건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충격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하나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제가 술에 취해 허언을 했습니다.
어설픈 변명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켰다. 이미 많은 증거들을 스스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저는 죄가 없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죄를 증명할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이하나는 그동안 언론에 비치던 천사가 아니었다.
표독스러운 표정이 전파를 탔고 이는 두 얼굴을 가진 이하나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 * *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박광신은 자신의 집무실에 함께 있는 상엽에게 물었다.
“인과응보. 마지막은 비참한 죽음.”
기자회견을 지켜본 상엽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저런 여자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없어. 난 동생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궁금해. 지금 표정이 꽤나 무섭거든.”
박광신의 평가에 상엽이 웃었다.
“동생. 그렇게 웃지 마. 더 무서우니까.”
“어제 꿈을 꿨거든.”
“꿈?”
“응. 누나가 나왔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상엽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나에 대한 생각이 깊어서일까?
누나의 모습이 꿈에 보였다.
“웃으래. 누나가 난 웃는 게 귀엽대.”
살아 있을 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원래 하던 것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려고. 그래야 누나를 살리지.”
“그 조금만 더라는 말이 불안한데?”
상엽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1급 위험지역에 갈 거야.”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난 원시인 체질이야.”
박광신은 더 이상 상엽을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조심해.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는 친동생을 대하듯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마음을 상엽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형도 조심해.”
상엽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박광신은 상엽에게 유물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60만 코인짜리 조각이야.”
“이걸 왜?”
“올로라도의 시계 기억해?”
상엽은 기억을 더듬어 중급 그레이 상점에 있는 잡화를 떠올렸다.
-올로라도의 시계. 기억 전달. 30만 코인.
-올로라도의 팬던트. 기억 저장. 30만 코인.
기억을 전달하는 데에는 30만 코인이면 충분하지만 상대에게 저장 장치가 없으면 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정상적으로 쓰려면 2가지를 모두 구입해야 했다.
기억 전달 제한 시간은 10초. 저장 제한은 200초였고 저장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걸 사라고?”
“그걸로 언제든 연락을 할 수 있으니까.”
“아.”
박광신의 의도는 기억 전달을 통해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 똑똑한데. 그런데 이걸 받아도 되나?”
“사실 내가 필요해서 주는 거야. 연락할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글자가 쓰인 기억을 전달할게.”
박광신은 메모지에 ‘긴급’이라는 글자를 썼다. 이런 식이면 1초짜리 기억을 받고 핸드폰을 켜서 연락하는 게 가능했다.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까지는 꽤 유용한 방법이었다.
“알았어.”
상엽은 거부하지 않았다.
‘동희랑 연지도 하라고 해야겠다.’
문제는 60만이라는 코인이었다.
상엽은 곧바로 빈 방으로 들어가서 레나를 불렀고 올로라도의 시계와 펜던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1초짜리 영상을 보내는 실험을 했다.
“이것도 등록이 필요해.”
기억 전달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광신이 먼저 시계를 상엽의 펜던트에 접촉시키자 시계에 박힌 열두 개의 흰색 보석 중에 하나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12명까지만 전달이 되나 보네.”
“맞아.”
박광신이 긴급이라는 메시지를 눈으로 보고 이를 전달하자 시계에 작은 빛이 모였다.
그리고 5초쯤 지나자 상엽의 펜던트가 붉게 빛났다.
상엽이 펜던트를 손에 쥐자 머릿속에 박광신이 본 ‘긴급’이라는 장면이 영화를 보듯 떠올랐다.
“신기하네.”
“서로 연락할 일이 없으면 가장 좋긴 할 텐데. 그럼 안부전화라도 한 번씩 해.”
“알았어. 걱정하지 마.”
상엽은 그렇게 박광신의 빌딩을 나섰다.
동희와 송연지는 상엽의 요청에 의해 똑같이 올로라도의 시계와 펜던트를 구입했다.
-내가 필요한 재료들 적어서 전달해 놓을게. 이거 구하면 버리지 말고 가져와. 몸에 좋은 걸로 만들어 줄게.
동희는 설악산에 자리를 잡은 뒤로 계속 연구에 몰두했다.
-전 유물 찾으러 가요.
송연지는 길드를 탈퇴한 후에도 계속 트레져 헌터의 길을 걸었다.
상엽은 친구들과 기억 등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준비를 했다.
“아공간을 좀 더 큰 걸 살까?”
그는 아공간에 라면과 버너, 냄비, 부탄가스를 잔뜩 챙겨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커다란 배낭까지 준비해서 라면과 초코바를 채웠다.
“자. 이제 준비 끝.”
그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려 할 때였다.
“잠깐.”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 있는 듯하지만 보이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적설. 웬일이야? 중국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나도 떠날 거야. 그전에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고 싶은 거?”
상엽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창문이 열리며 적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고 싶다니까 거부하진 않을게.”
적설은 붉은색의 요염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빨간 입술과 어울려서 관능적인 매력이 훨씬 배가 되었다.
게다가 실크 소재는 적설의 엉덩이 부분을 더욱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효과가 있었다.
“뭐 간단히 받아들여 주니까 좋네.”
적설은 상엽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상엽의 목을 더듬었다.
“살수가 이렇게 해 주니까 긴장되네.”
“긴장 풀어. 끝났으니까.”
“뭐?”
적설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팔을 보였다. 그녀의 하얀 팔목에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시계는 곧 적설의 웃음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기억 등록. 이걸 하려고.”
“하고 싶다던 게 그거였어?”
“자. 너도 해.”
적설이 목을 내밀었다.
“꼭 그것만 해야 돼?”
“오늘은 거기까지만.”
“쳇.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
“기대는 네 착각이 시작한 거야. 그리고 너무 실망하지 마. 오늘이 아닐 뿐이니까.”
“그 말 기억한다.”
상엽은 적설의 기억 등록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안녕.”
등록이 끝나자 적설은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아. 맞다. 내가 이걸 샀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상엽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날 스토킹하고 있었던 거야? 집착이 강한 여자였네.”
상엽이 고개를 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적설의 말이 들려왔다.
“마지막 인사하러 왔다가 우연히 본 거야. 착각하지 마.”
“역시 날 스토킹하고 있었어.”
상엽은 더욱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들었다.
* * *
상엽이 선택한 곳은 미국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존재하는 2개의 공항은 또 다른 1급 위험지역인 멕시코로만 운항되었다.
결국 시카고와 덴버를 오가는 국내선 1항로와 국제선 1항로가 전부였고 여객기도 겨우 3대뿐이었다.
결국 상엽은 한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헬기였고 잠수함을 이용해 먼바다로 나가서 다시 전함으로 옮겨 타는 여정이었다.
‘일단 시카고로 가자.’
상엽은 그나마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시카고로 이동했다.
그가 굳이 먼 이동거리를 감안하고 시카고로 가는 이유가 있었다.
-시카고에 그레이 상점이 있어.
상엽은 레나에게 이에 대한 정보를 샀다.
‘위치 등록부터 해야지.’
그가 가진 코인은 15만 코인이라 한 곳을 등록하는 것은 가능했다.
아쉽게도 덴버에는 그레이 상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이 시카고로 가야했다.
미국 시카고.
상엽은 대형 수송기에서 아래를 보았다. 군대가 무너진 미국의 하늘은 주인이 사라졌기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상엽은 파일럿을 향해 인사를 하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낙하산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는 엄청난 속도의 낙하를 즐기며 점점 가까워지는 시카고의 광경을 살폈다.
‘저렇게 지키고 있구나.’
시카고에는 유명한 담수호가 있었다.
도시에 닿아 있는 미시간호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호수였고 운하 건설을 통해 물의 흐름이 바뀐 걸로 유명한 장소였다.
시카고는 이를 이용해 물길을 새로 뚫어 도시를 보호하는 거대한 강을 만들었다.
그리고 강변에 탑을 쌓아 내부를 가린 구조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시카고 전체를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들은 몇 번이나 확장을 했음에도 기존의 도시를 5%도 복구하지 못했다.
쿵!
상엽은 그런 작은 도시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그가 떨어지는 순간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보도블록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날카로운 기계음들이 들렸다.
“누구냐?”
상점 옥상에 있는 사내 한 명이 상엽을 보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아. 그냥 관광 왔어요.”
그렇게 말을 하며 상엽은 추종자를 이용해 주변을 모두 수색했다.
-현재 5명입니다. 계속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자들은 꽤 강해 보입니다.
다섯 명의 갓코인 유저는 적어도 5단계 이상의 실력자들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복장을 보니 군인이나 경찰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개인집단이 장악하고 있다더니.’
이미 국가가 무너졌고 시카고는 피난민들이 도착한 마지막 장소였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시민을 지키며 도시 보호에 나섰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군인들에게 보상을 줘야 할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인들이 새로운 정부가 되었다.
‘이렇게들 살고 있구나.’
상엽의 눈에 비친 시카고는 현대 문명 속의 농경지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스팔트 대신 흙길이 깔려 있고, 그 위에서 식량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든 표정의 사람들이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총을 들고 지키는 지배자들이 있었고, 표정만 봐도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갓코인 유저라면 방문한 목적을 말하라.”
처음 상엽에게 질문을 했던 사내가 적개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다섯 명의 갓코인 유저는 일정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점 찾으러 왔어요.”
상엽은 굳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솔직히 목적을 말하자 누군가 상엽에게 다가왔다.
모자를 쓴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멀쩡한 곳이 없는 헤진 운동화에 햇볕을 가리기도 힘든 넝마 같은 셔츠를 입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쭈뼛거리며 상엽의 표정을 살피더니 안내를 시작했다.
상엽은 일단 소년의 뒤를 따랐다.
‘신경 쓰이네.’
총구는 계속해서 상엽을 겨눴고 장소를 옮기면 어김없이 다른 자들이 총을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소년은 앞서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갓코인 유저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이다.
“이름이 뭐야?”
“로키예요.”
“그래. 로키. 근데 여긴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예상한 숫자를 넘어섰다.
“왜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공항도 있는데.”
상엽은 이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면 갈 수 있어요. 전 캐나다로 가고 싶어요.”
처음으로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금속음이 들렸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열심히 일하면 갈 수 있다라…….’
상엽은 소년의 표정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빌미로 장악하고 있구나.’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는 자격.
이는 지배자들이 시민에게 던져 놓은 당근이었다.
한때는 가장 민주적이라고 부르던 땅이 지금은 지독한 군부독재체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구원해 줄 정부나 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예요.”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에 상엽은 보존이 잘 되어 있는 20층짜리 건물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시면 다른 분이 안내해 주실 거예요.”
로키는 인사를 하더니 왔던 길을 도망치듯이 뛰어갔다. 상엽은 그 뒷모습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