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양손을 잃은 아오나는 더 이상 무기를 쥘 수 없었다.
“진짜 괴물이네.”
손을 쓸 수 없음에도 아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유령 걸음을 이용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상엽을 위협했다.
무기가 없을 뿐, 스킬은 건재했고 발차기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아오나의 몸을 감싸던 푸른 불꽃은 그가 쓰던 창을 넘어서는 위력이었다.
푸른 불꽃은 아오나의 의지에 따라 다양하게 모양이 변했다. 화살처럼 쏘아지기도 했고, 방패가 되어 앞을 막기도 했다.
물리력을 가진 불꽃.
이것이 푸른 불꽃의 정체였고 아오나의 진짜 무기였다.
“할 수 있어.”
위기는 계속되었지만 상엽은 특유의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반격에 나섰다.
싸움은 급격히 치열해졌고 또다시 사투가 시작되었다.
상엽의 한방은 아오나의 몸을 흔들었지만 날카로운 반격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그들의 육박전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우두머리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소싸움처럼 한 발 거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오나가 유리해 보였다. 그의 몸에서 자유롭게 변형되는 푸른 불꽃이 상엽의 몸을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난도질 끝에는 항상 반격이 뒤따랐다.
쾅!
수십 개의 상처에 버금가는 한 방이었다.
그 한 방이 적중할 때마다 아오나의 행동은 조금씩 느려졌다.
-지독하군.
결국 아오나를 감싸던 푸른 불꽃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상엽.
푸른 불꽃을 잃은 아오나.
전투는 점점 막바지를 향했다.
서로 위기를 느꼈지만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큭!’
상엽은 몇 번이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깊은 상처로 인해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해머를 쥔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끝도 없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마저 들자 상엽은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번뿐이야.’
지키려 하다가는 결국 무너진다. 상엽이 수도 없이 전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생존본능이 강한 변종은 사냥하기가 쉽다. 천천히 몰아붙이면 결국에는 반격할 힘마저 잃는다.
진짜 위험한 변종은 마지막 한 방을 끝까지 숨겨 두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종은 언제나 늦지 않은 타이밍에 승부를 걸어온다.
지금 상엽은 변종처럼 마지막 한 방을 준비했다.
아오나는 상엽의 반격이 뜸해지자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현란한 스킬들이 사방에서 죄어 오고 물리적 힘을 가득 실은 발이 상엽의 등을 때렸다.
회생까지 사용해서 더 이상은 변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상엽은 끝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아오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의 공격을 시도했다.
그 역시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것이다.
상엽의 등 뒤로 돌아온 아오나의 몸에 붉은 불꽃이 일렁였다.
갑자기 증폭된 위기감에 상엽이 몸을 돌리자 아오나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다시 뒤.
상엽의 움직임은 아오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완벽히 뒤를 잡힌 것이다.
그때, 아오나가 고스트 체인을 뻗었다.
단 한 줄기의 고스트 체인이었다. 스무 줄기가 하나로 엮여서 창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
상엽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스트라이크.’
그는 후방으로 스트라이크를 시도했다. 몸을 돌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충격이 어깨에 닿았다.
콰직!
그의 오른쪽 어깨가 고스트 체인에 의해 완전히 뜯겨져 나갔다.
지탱할 곳을 잃은 오른팔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쓰러져야 당연한 상처였다. 하지만 그는 전진했다.
아오나의 눈빛이 흔들린 것도 그때였다.
-어떻게…….
상엽의 눈은 여전히 독기를 품고 있었다.
지독한 의지였다.
그렇게 상엽은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쾅!
상엽의 해머가 아오나의 두개골을 직격했다.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아오나도 그 충격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쩌적.
단 한 점에 집중된 힘은 아오나의 두개골에 균열을 일으켰다.
균열은 해머가 닿은 지점을 중심으로 급격히 퍼져 나갔다. 그리고 붉은빛으로 형성되어 있던 아오나의 눈이 사라졌다. 싸움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아오나의 눈에 다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소음이 이어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건 상엽의 망치였다.
-훌륭한 전사였다.
두개골은 부서지지 않았다. 수십 개의 균열이 생겼지만 결국 힘이 부족했다.
아슬아슬한 차이지만 승리와 패배는 미세한 차이로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전사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되길.
아오나는 상엽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자비를 발휘하지는 않았다.
-잊지 않겠다. 전사여.
그가 상엽의 고통을 끝내 주려 할 때였다.
쿵!
아오나의 두개골에 또 한 번 충격이 발생했다.
심판.
엄청난 크기의 해머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상엽이 끝까지 숨긴 한 방이었다.
쾅!
작은 폭발이 발생했고 주변으로 뼛조각이 튀었다.
쿵!
그리고 머리를 잃은 아오나가 쓰러졌다.
휘잉.
죽음의 대지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아오나의 몸을 빛으로 산화시켰다.
빛이 된 바람은 그렇게 천천히 상엽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가장 강한 망자의 신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상엽은 승리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며 바닥을 기었다.
아오나가 사라지면서 죽음의 대지도 모습이 변했다.
망자의 탑 51층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원형의 공간 중앙에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세 개의 물품이 있었다.
회색빛을 머금은 상자.
푸른 불꽃이 담긴 금색 컵.
붉은 빛에 쌓인 양피지였다.
‘저기까지만.’
하나뿐인 손으로 상엽은 자신의 몸을 당겼다. 걸어서 간다면 겨우 열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었다.
‘도저히…….’
겨우 다섯 걸음을 남겨 뒀을 때였다. 상엽은 정신이 급격히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주인님!
사라졌던 추종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상엽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스킬이 돌아왔다.’
아오나가 죽으면서 봉인이 풀린 것이다.
‘고스트 체인.’
상엽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며 고스트 체인을 펼쳤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띄웠다.
쿵!
그의 몸이 제단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세 가지의 물품이 상엽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빨리.’
제단에서 굴러떨어져 천정을 보던 상엽은 자신의 혀를 깨물고 있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런 그의 몸 위에 작은 빛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빛은 원형 고리로 변해 상엽을 흡수했다.
짧은 무지의 시간이 끝나자 상엽은 익숙한 장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투는 끝이 아니었다.
‘레나.’
귀환의 기쁨을 느낄 틈도 없이 그는 레나를 불렀다. 다행히 레나는 상엽이 눈을 감기 전에 도착했다.
“치, 치료.”
속삭이듯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레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상엽의 손을 잡았다.
“코인은 충분해. 치료할게.”
따뜻한 빛이 상엽의 몸을 감쌌다.
* * *
상엽은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 24시간을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레나는 이미 떠났고 그의 몸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가벼웠다.
“다행이야.”
상엽은 제일 먼저 오른손을 들었다.
아오나에 의해 잃었던 신체가 치료를 통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겼어.”
승리가 확정된 지 하루가 흘러서야 상엽은 이 사실을 인지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전투였지만 승리의 맛은 달콤했다.
“900만 코인.”
아오나를 잡고 제단의 상자에서 흡수한 코인만 무려 500만 코인이었다.
본래 1,200만 코인이 넘었지만 치료를 하느라 300만 코인이 소모되었다.
“이 정도면 훌륭해.”
코인 외에도 많은 전리품이 있었다.
세 개의 유물 조각은 아직 감정을 하지 않아 가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습득한 조각이 엄청난 가치라는 건 일반적인 정설이었다.
“문신도 하나 얻었고.”
유령 걸음이 가능한 문신은 활용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될 것으로 판단됐다.
“그리고 이것도.”
상엽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생성되더니 온몸으로 퍼졌다.
유산 – 망자의 손길.
죽은 전사들의 신 아오나가 사용하는 무기로 망자의 영혼으로 만들어졌다.
특수 스킬 – 통곡.
일정 공간을 망자들의 울음소리로 채운다.
특수 스킬의 활용도는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상엽은 직접 실험을 해 봐야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이건 스킬이고.”
제단에 있었던 붉은빛의 양피지.
상엽은 이 스킬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 아오나의 죽은 전사들의 충성징표.
망자 친위대를 소환한다.
상엽이 탑에서 직접 싸워서 이긴 전사들이었다.
‘시험이 두 가지였어.’
친위대의 충성을 얻는 시험과 아오나의 힘을 얻는 두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이는 우직하게 전부 처리를 했기에 얻을 수 있었다.
갓코인 유저는 다양한 능력이 있고, 때로는 전투를 피해서 다음 상대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얻을 수 없는 스킬이었다.
“해 볼까?”
상엽은 결정을 내리고 곧바로 소환을 시도했다.
‘친위대 소환.’
상엽의 의지가 발현되자 그의 곁으로 두 명의 해골전사가 소환되었다.
1층과 2층에서 만났던 자들이었다.
‘강화에 따라 다르구나.’
소환을 늘리고 더 뛰어난 친위대를 소환하려면 강화가 필요했다.
“일단 들어가 있어.”
상엽의 명령에 천정이 닿을 듯이 당당하게 서 있던 친위대가 하얀 가루로 흩어져 상엽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철분이네.”
상엽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상황을 정리했다.
“아직 하나가 남았지.”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괜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추종자를 불렀다.
“나와.”
그의 명령에 추종자가 상엽 앞에 섰다.
유령 추종자는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이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던 그는 아오나의 스킬을 습득한 시너지가 발휘되면서 30대 초반의 체구가 작은 사내의 모습이 되었다.
전사가 아니라 모사나 책사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진짜 모습이야?”
-네. 주인님.
이젠 그의 말투도 완벽히 사람과 닮았다. 상엽은 그의 변화가 왠지 섭섭한 느낌도 있었다.
너무 사람처럼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님? 내가 왜 너 주인님인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오나 만났다고 바로 날 버리더라. 그런데 내가 왜 네 주인님인데? 마음대로 막 버리고 그러는 게 주인이야?”
-그것은 금제에 의하여……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았냐?”
상엽은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너한테 두 번이 있을까?”
상엽은 당황하는 추종자를 향해 말했다.
“나 이제 다른 부하들이 생겼는데.”
상엽은 다시 한 번 친위대를 소환했다.
두 명의 당당한 전사를 보자 유령추종자의 말이 빨라졌다.
-전 그들과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그저 싸우는 것밖에는……
추종자의 말에 두 명의 친위대가 반응했다.
친위대의 붉은빛이 강렬해지자 추종자는 말을 멈췄다.
-주인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해라.”
상엽은 괜히 추종자를 몰아붙였다. 그러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너 아니면 죽었을 거야. 선물은 확실히 할 테니까 기대해.”
-감사합니다! 주인님!
추종자는 그에게 단순한 스킬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였다.
아오나의 전투 이후에 추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상엽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추종자가 그를 살려 준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추종자부터 완성하자.’
그는 보상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이제 이것만 실험해 보면 끝나나?”
유일하게 확인하지 않은 스킬은 망자의 손길에 있는 통곡이었다.
“해 보면 알겠지.”
그의 몸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통곡.”
그의 말이 끝나자 푸른 불꽃이 갑자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불꽃은 곧 10미터 변의 정육면체를 만들었고 그 안을 귀곡성으로 가득 채웠다.
“어?”
그가 놀랄 틈도 없이 아파트 전체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그만!”
상엽은 급히 통곡을 거두어들였다.
“미안해요. 잠결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막혀 있는 벽을 향해 사과를 했다.
“유령아. 다친 사람 없는지 빨리 확인해.”
-네! 주인님!
상엽에겐 추종자가 꼭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