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118화 (118/300)

# 118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은 문제가 아니었다. 일주일도 괜찮았다. 그런데 열흘이 넘어가자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지금 상엽은 평소보다 훨씬 큰 졸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역시 적설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자장가 불러 줄까?”

적설은 놀리듯이 상엽을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추종자는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훌륭해. 이런 방식일지는 몰랐어.”

“그래도 많이 봐준 거야. 사실 진짜 널 무너트릴 수 있는 기억이 있었거든.”

“그래? 궁금하네.”

“누나의 모습. 보고 싶어? 물론 행복한 시간은 아닐 거야.”

상엽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인해 이빨이 갈렸다.

“거봐. 화내잖아. 하지만 알아 두라고. 일부러 그 기억은 건드리지 않았어.”

“왜지? 그거면 효과가 확실할 텐데.”

“동질감이지. 그 기억을 읽고 사실 좀 놀랐거든. 나랑 너무 비슷해서.”

적설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도 동생을 살리려고 암살자가 된 거야. 처음에는 복수였지. 무작정 흑월회를 찾아가서 동생을 죽인 놈을 죽여 달라고 했거든.”

“네 계획은 성공했어. 내 생각이 또 복잡해지기 시작했거든.”

“안 믿는 거야?”

“너라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럼 이건 어때?”

적설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상엽에게 물었다.

“블랙과 화이트 코인을 모두 사용하는 유저가 있어. 그래서 4단계 상점밖에 못 갔는데 실력은 5단계 상점을 넘어섰지. 어때?”

상엽은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억이 읽혔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적설은 상엽이 친구에게도 숨기던 비밀을 알게 됐다.

“그동안 여러 사람을 잘도 속였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넌 내 말을 의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거짓말쟁이 주제에.”

“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유가 생겼네.”

“아직은 못할 거야. 예고했던 한 달까지 시간이 좀 남았잖아.”

적설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상엽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 다양한 방법을 썼다. 그러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느꼈다.

‘내 기억을 읽었다면 누나를 이용했을 텐데.’

처음에는 그 말에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자신의 경험과 같다는 게 사실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암살자가 낭만도 있네.

상엽은 그녀의 배려가 낯설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악몽은 보름 동안 계속되었다.

보름을 버티던 상엽은 결국 잠이 들었다. 그런데 적설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상엽은 견디지 못하고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특별했다. 바로 한강이었던 것이다.

악몽은 피해갈 수 없었지만 적설이 암살을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덕분에 상엽은 분명히 수면을 취했다. 잠수 시간이 끝날 때쯤에는 어김없이 추종자가 도와주었기에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번 깨어나긴 했지만 상엽은 꽤 긴 시간을 잘 수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강에서 빠져나온 상엽은 적설이 근처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했다.

“별로 정상으로 안 보이거든.”

“그럼 덤벼 보든가? 난 내일도 푹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상엽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누나를 이용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어떻게든 도발해서 위치를 알아내야 돼.’

하지만 적설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하며 상엽이 지치길 기다렸다.

20일이 지났다.

적설은 끝내 누나의 기억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혀 공격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물속에서 잠을 청하던 상엽은 엄청난 충격에 눈을 뜨며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컥. 컥.”

정신적 충격이 컸던 상엽은 물까지 들이켠 탓에 기침을 연발했다.

“호호. 이번엔 충격이 좀 있나 봐. 매일 잘 수 있다고 자랑하더니. 어디 한 번 다시 잠들어 보시지?”

“망할. 네가 이겼어. 안 자.”

상엽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그의 이번 꿈은 야릇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선명해서 그 느낌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남자만 나왔어.”

그 충격은 상엽의 영혼을 찢어 놓는 듯했다. 상엽은 그 꿈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얼른 잠들어. 더 짜릿하게 만들어 줄게.”

“내가 졌다니까.”

상엽은 수면을 포기하고 장소를 이동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이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지이기도 했다.

“같은 수법에 두 번은 안 당해.”

“당하는 녀석들도 있더라고.”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상엽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동희까지 악몽을 꿨다.

“친구들 힘들게 하지 말고 돌아가는 게 어때?”

결국 상엽은 집으로 돌아왔다.

27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상엽은 그날도 졸음을 버티고 있었다. 본능과의 싸움은 어떤 적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지워졌다. 멍한 상태에서 그저 눈만 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 나타났다.

적설이었다.

팟!

상엽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적설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의 목을 잡았다.

하지만 손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뭐지?”

“뭐긴 뭐야? 여긴 꿈속이거든.”

“난 잠들지 않았는데?”

“눈은 뜨고 있지만 자는 거랑 마찬가지야. 이성이 멈춰 버렸거든.”

상엽은 다시금 적설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적설은 한 명이 아니라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그 상태에서 똑같이 입을 움직이며 말을 했다.

“날 죽여 봤자 소용없어. 꿈속이니까.”

“왜 소용없는 짓을 하는 거지?”

“난 죽지 않지만 넌 죽거든.”

“미친 소리!”

상엽은 본능에 따라 눈에 보이는 모든 적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적나라한 살점과 핏물이 흩날렸다. 하지만 수십 명의 적설은 그 자리에서 말을 계속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쉽게 무너지는데? 이것밖에 안 되는 남자였어?”

상엽은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적설을 파괴했다. 하지만 진짜는 없었다.

“진짜 꿈인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과 마음은 그만큼 약해져 있었다.

그때였다.

-주인님.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야?’

상엽이 의문을 나타냈을 때, 갑자기 주변의 광경이 변했다.

‘뭐지?’

그는 거실에 홀로 서 있었다.

정말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주인님!

추종자의 목소리에 상엽은 정신을 차렸다.

추종자의 눈을 통해 상엽은 상상도 못한 장면을 보았다.

적설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뒤를 쫓는 인물은 누더기 같은 검은 옷에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게 흩날리는 중년이었다.

상엽은 그 사람을 알아봤다.

“만득이 아저씨.”

김만득.

그가 상엽을 위협하던 적설을 뒤쫓고 있는 것이다.

상엽은 그 모습을 확인하며 함께 추격을 시작했다.

적설은 갑자기 등장한 인물에 당황했다.

그녀는 드디어 상엽에게 접근해서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누더기 중년에 의해 반대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뭐 이런 괴물이.’

은신을 시도했지만 발아래에서 가시가 치솟았다. 스킬이 워낙 빨라서 제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모습이 드러난 암살자는 그 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적설은 도주를 포기하며 김만득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그녀의 몸 주변에 안개가 형성되며 날카로운 칼날이 생성되었다.

위기를 느낀 적설이 안개를 벗어나는 순간, 김만득이 바람처럼 다가와 손을 뻗었다.

펑!

완벽히 잡혔던 적설이 통나무를 남기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벗어나는 건 한 번뿐이었다.

통나무를 손아귀의 힘으로 터트려버린 김만득의 몸이 갑자기 흔들리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적설은 본능적으로 감각을 끌어 올려 방향을 잡았다.

‘왼쪽.’

그녀가 왼쪽을 보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지는 김만득의 잔상을 보았다.

‘당했다.’

진짜는 정면이었다.

김만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공간에서 다시 나타나 손을 뻗었다.

툭.

결국 김만득의 거친 손이 적설의 목을 잡았다.

그때, 한발 늦게 상엽이 도착했다.

“만득이 아저씨!”

“오랜만이군.”

김만득은 손에 힘을 주어 적설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상엽 앞에 던졌다.

“너와 은원이 있는 것 같으니 직접 처리해라.”

정신을 잃은 적설이 상엽의 발 앞에 놓였다.

“뭔가 허무하네요. 이렇게 끝날 사이는 아니었는데.”

“역시 뭔가 있군.”

“그 정도는 아니고요.”

상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데 김만득이 뜻밖의 말을 했다.

“망설이더군.”

“네?”

“그 여자가 마음을 먹었다면 넌 아주 위험했을 것이다. 저기 있는 유령이 필사적으로 막아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망설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잡히는 일도 없었겠지.”

이건 상엽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어떻게 할 건가?”

“제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죠?”

“물론이다.”

상엽은 추종자에게 감시를 지시하고 김만득 앞으로 다가갔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 진짜 오랜만이에요!”

상엽은 대뜸 김만득을 끌어안았다.

“우리가 이런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연락이 없었을 뿐.”

“뭐 어떻든 좋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드니까. 대단한 짓들을 많이 했더군.”

“예전에 아저씨가 길을 잘 알려 준 덕분이죠.”

“크크. 꽤 여유도 생겼고 이젠 남자다워. 그 졸린 눈만 빼면.”

“안 그래도 잠을 좀 자야겠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지.”

“좋아요! 제가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게요.”

김만득은 상엽의 친근한 말투와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조심하라는 말은 그만두지. 그런 조언을 들을 수준은 아닌 거 같으니.”

“난 아저씨가 꼰대가 아니라서 좋아요.”

“크큭!”

김만득은 유쾌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목욕은 좀 하세요. 한강에 한 번 뛰어들면 되는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김만득은 실제로 한강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역시 멋있어. 낭만이 있는 아저씨야.”

상엽은 그와의 만남에 만족하며 돌아섰다.

“자.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 볼까?”

상엽은 쓰러진 적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 * *

적설은 눈을 떴다.

‘죽었겠지?’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는 멀쩡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푹신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실크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

‘여긴…….’

그녀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상엽의 침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지켜보던 장소 중에 하나였다.

“하암! 일어났어?”

그녀가 눈을 뜨자 상엽이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기지개를 펴며 침대 곁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무슨 짓이지?”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야? 미리 말해 두지만 너 자는 동안 아무 짓도 안 했어.”

“왜 날 살려 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상엽이 눈빛으로 압박을 주었다.

“왜 망설였어? 좋은 기회였는데.”

“쳇. 뭐야? 이 상황은.”

상엽은 그 자리에서 적설의 말을 기다렸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말해 봐.”

“내가 왜 그래야 되지?”

“널 살려 줄 거거든. 물론 다시는 날 암살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하면.”

적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날 살려 주는 건데?”

“첫 번째. 네가 날 죽일 마음이 없는 거 같아서.”

“뭐?”

“두 번째.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았거든. 누나의 기억을 건드렸다면 넌 내 손에 죽었을 거야.”

상엽의 말이 끝나자 적설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상엽은 자신이 말한 대로 그녀를 막지 않았다.

“약속은 하고 가. 그래야 내가 후회를 안 할 거 같아.”

적설은 말이 없었다.

‘난 이제 암살자 자격이 없다.’

그녀는 이미 실패했다. 그리고 적의 손에 살아났다. 자존심과 신념이 동시에 무너져 버렸다.

“내 동생이 그렇게 죽었어.”

“무슨 말이야?”

“강한 진통제를 맞았거든. 너무 아파서. 환각을 보는지 꿈을 꾸는지 눈을 뜬 채로 날 보면서. 그렇게 죽었어.”

“그 이야기. 역시 사실이었네.”

적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는 침대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유물 조각이었다.

“이게 필요한 거지?”

아오나의 신전 조각.

상엽이 그토록 원하던 조각이었다.

“비밀은 지킬게.”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네.”

“비록 꿈이지만 꽤 가까운 사이였잖아.”

상엽은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꿈보다 현실이 더 예쁜데. 이건 진심이야.”

“날 유혹하지 마. 지금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서 널 다시 죽일 수도 있어. 널 사랑해 버릴 수도 있고.”

“그건 위험하겠네. 잘 가.”

상엽은 쿨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