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뉴스 보도 이후,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퇴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더불어 처음 뉴스를 보도했던 방송국에서는 아레나 리스트가 공개되었다.
아레나 리스트란 아레나 길드의 한국 장악에 동조한 인물들의 명단을 말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명단이 공개되자 관계자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정치인들은 모함이라며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고,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고위 공무원 몇몇이 사퇴를 발표하긴 했지만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는 짓이 슬슬 열 받는데.”
상엽은 박광신의 빌딩에서 그들의 행태를 모두 전달받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라 생각하는 거지.”
“정말 그렇게 돼?”
“아니. 이번에는 안 돼. 숨통을 끊어 놓을 거라서.”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기대되는데?”
박광신은 상엽이 앉아 있는 소파 테이블에 두꺼운 서류뭉치를 놓았다.
“그게 이 사건의 결론이야.”
처음 뉴스를 보도하고, 리스트를 공개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아직 마지막이 남았다.
“아레나를 지지했던 녀석들의 모든 비리가 거기 있어.”
“전부 다?”
“아니. 명확한 증거가 있는 사람은 절반이야. 그런데 절반으로 충분할 거야. 아레나 리스트 정치인. 그들이 얼마나 더러운지만 인식시켜 놓으면, 그들의 정치 생명은 끝이야. 수백 년 동안 아레나 리스트라는 말은 한국 정치의 부정부패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될 테니까.”
상엽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냥 죽여 버리면 편한데.”
“그렇게 하면 다음 정부가 살인자가 돼.”
“다음 정부라…….”
상엽은 정치라는 것이 참 귀찮고 복잡하다고 느꼈다.
“그냥 형이 알아서 해. 난 마지막 일만 처리하고 빠질래.”
“마지막 일?”
박광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번 일을 시작한 주동자가 있잖아. 이건 내 개인적인 원한이라서.”
“끼어들지 말라는 거야?”
“설득도 하지 말고, 조언도 하지 마.”
“알았어. 뒤처리는 도와줘도 되지?”
“이래서 형을 사랑해.”
상엽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 일의 마무리에 나섰다.
민앙 그룹 회장 함종석.
그는 아레나 길드를 믿고 한국을 떠나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고, 민앙 그룹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결국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수습하지.’
그는 곧 자신이 발표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일단 외부적으로 사퇴를 하고 지켜보지.’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사회공헌비용을 늘리는 걸로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이다.
회장 직함이 없다고 그의 결정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소나기만 피해 가면 된다.’
그는 이렇게 판단했다. 그동안 수많은 압박 속에서도 민앙 그룹은 흔들림이 없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굴 회장으로 만들어야 하나?’
시간이 길게 흐르면 당연히 후계자는 아들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정상엽…….’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에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앞에 뼈가 선명히 보이는 유령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연기처럼 그의 몸으로 들어왔다.
“컥!”
충격을 받은 함종석이 답답한 신음소리를 냈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운전기사가 급히 차를 갓길에 대고 함종석을 살폈다. 하지만 차가 멈출 때쯤엔 이미 함종석의 숨이 끊긴 후였다.
한국의 경제를 주름 잡던 함종석은 그렇게 사라졌다.
“흑월회 외엔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1킬로미터 밖에 있던 상엽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한국을 팔아먹은 세 명의 매국노.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민앙 그룹 회장 함종석.
검찰 총장 박철영.
도성 그룹 회장 김인성.
함종석을 시작으로 일주일 만에 세 명이 모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천벌을 받은 거야.
사람들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은 이유로 그들의 죽음을 판단했다.
검찰 총장은 중국에서 죽었고, 도성 그룹 회장 김인성은 인도에서 죽었다.
-잘 된 거야.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 * *
한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60일 안에 재선거가 이루어졌고 이를 위한 바쁜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선거판이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국민들은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정득수.
이하나의 아버지인 국회의원 정득수는 이번 일로 엄청난 스타가 되었다.
-아레나의 요청을 유일하게 거부하고 정상엽을 도와준 정치인.
이 타이틀은 그를 독립투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국민들은 그런 인물을 원했다.
‘도박판 판돈이 이거였구나.’
상엽은 이제야 정득수가 노린 결과물을 알아차렸다.
‘광신이 형하고도 친밀해졌고.’
박광신 역시 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너무 믿지는 마.’
상엽은 이렇게만 말하며 더 이상 정치에 관해서 관여하지 않았다.
“다시 내 갈 길로 가자.”
그 시작은 꽤 훌륭했다.
-정리가 끝났습니다.
아레나 길드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물품들이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특히 론드를 처리하고 얻은 전리품은 지금까지 획득한 유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 길드원만 100명을 넘게 잡은 상엽에게는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총 2,500만 코인입니다.
일반적인 변종 사냥으로는 결코 습득할 수 없는 양의 코인이었다.
‘상급 상점으로 가자.’
현재 그는 상급 그레이 상점만 방문한 상태였다. 이젠 상급 화이트 상점과 블랙 상점을 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강화가 끝나면 일본으로.’
결정을 내린 그는 먼저 한국의 블랙 상점을 찾아갔다.
‘역시 블랙 상점이 좋아.’
상엽은 그렇게 느꼈다.
도착한 곳은 모델 에이전시였다. 상점은 그곳의 실장으로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외모는 소속된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몸매와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옅은 화장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고, 검은 원피스는 옆이 찢어져서 긴 다리가 대부분 드러났다.
길게 뻗은 눈썹과 깊은 눈은 몸매와 어울려 관능적인 매력을 더했다.
“어서 와요. 한여주라고 해요.”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여인처럼 밝은 표정으로 상엽을 맞이했다.
“의외네요. 이미 최상급 상점을 이용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상엽을 살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유산이 좀 많아요. 외부엔 비밀이지만.”
상엽은 그렇게 둘러대며 상점을 확인했다.
“와인이라도 한잔 마실래요?”
“좀 바빠서요.”
“그러지 말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던데.”
한여주는 그의 손을 잡은 상태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상엽의 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레 상엽은 그녀를 뒤에서 안은 상태가 되었다.
“냄새 좋네요. 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요.”
“한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잖아요. 절 찾아오지 않아서 질투 많이 했어요.”
“질투까지 해 주다니 고맙네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상점을 살펴보는 건 문제가 없었다.
상엽은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상점의 메뉴로 시선을 돌렸다.
메뉴는 언제나 같았다.
무구.
신체개조.
스킬.
무구에는 욕심나는 것이 없었던 상엽은 신체개조 항목을 살폈다.
‘음.’
예상대로 강화 항목은 다섯 가지였다.
근육 개조.
반응 개조.
정신 개조.
관절 개조.
피부 개조.
“단어들이 참 무섭네요.”
“무서워하지 말아요.”
품에 안긴 한여주가 상엽의 손을 꼭 끌어안았다.
“위로가 되네요.”
“제가 잘하는 거죠.”
상엽은 얇은 드레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만족하며 다시 상점을 보았다.
“반응 개조는 말 그대로 반응 속도가 개선되는 거예요. 상급 블랙 상점의 특징이죠. 관절 개조는 인체의 한계를 넘는 행동이 가능해요.”
그 외에 근력 개조는 힘이었고 정신 개조는 정신력, 피부 개조는 자체적인 방어력에 해당되었다.
“시작은 5만 코인이에요.”
1단계가 무려 5만 코인으로 한 항목을 10단계까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5천만이 넘는 코인이 필요했다.
‘어마어마하네.’
상엽의 생각을 읽었는지 한여주가 상엽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만큼 상승폭도 크죠.”
“매혹적이네요.”
상엽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다.
“모든 항목 5단계까지 할 게요.”
한 항목을 5단계까지 강화하는 데 155만이 필요했고, 다섯 항목이면 775만이었다.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 고통이 시작되었다. 지독한 고통이 올라오자 한여주는 상엽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흥분되는 떨림이네요.”
상엽은 고통을 참느라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항상 반복되는 고통임에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게 블랙 상점 개조의 특징이었다.
10여 분간의 고통이 끝났을 때, 상엽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는 한여주의 피부를 움켜잡았다.
“미안해요.”
“저도 고통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당신을 이해하고 싶거든요.”
“친절하네요.”
“아직 제 친절의 반도 못 보셨어요.”
“궁금하네요. 어떤 친절인지.”
대화를 하는 동안 땀이 식었고 몸도 가벼워졌다.
“이제 괜찮아졌나요?”
“덕분에요.”
“그럼 이제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보여 줄래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요.”
한여주는 상엽의 거부에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상엽은 그녀의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다음 메뉴를 확인했다.
‘상급 블랙 상점의 스킬.’
스킬은 언제나 갓코인 유저들을 흥분시켰다.
‘10개라.’
상엽은 스킬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정신 관련이 많구나.’
정신을 공격하는 스킬과 마법처럼 정신력을 이용하는 스킬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상엽의 눈에 띄는 스킬이 있었다.
-자데크의 가시 안개.
일정 범위에 가시가 돋힌 안개를 만든다.
특이한 스킬이었다. 응용을 한다면 꽤 강력한 위력을 보일 것 같았다.
‘이것도 괜찮아 보이고.’
-바드리아의 거울인형.
충격을 반사하는 인형을 남겨 두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이 역시 치열한 전투에서 조커가 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이건 나중에.’
다른 스킬들도 다시 한 번 살폈지만 상엽의 원래 계획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스킬은 다음에 다시 볼게요.”
“다음에 다시 본다는 말. 실망시키지 않을 거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조건 다시 올 거예요.”
그녀는 천천히 상엽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상엽과 눈을 마주쳤다.
“다음에는 바쁘지 않게 하고 와요.”
“여기 와서 바빠질게요.”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상엽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상급 블랙 상점을 나섰다.
화이트 상점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현재 한국은 블랙 유저가 장악하고 있기에 화이트 상점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결국 상엽은 은밀히 중국으로 가야 했다.
상급 화이트 상점은 말투가 딱딱한 사무원이었다. 덕분에 상엽은 상점에 집중할 수 있었다.
“5가지 전부 5단계까지.”
상엽의 결정은 같았다.
근력.
민첩.
정신.
저항.
인내.
5가지 항목이 모두 5단계가 되었다.
5단계마다 발생하는 대폭 상승을 노리고 이렇게 결정을 한 것이다.
무사히 강화를 마친 상엽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집으로 왔다.
“레나. 안녕.”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널 만났잖아. 이것보다 좋은 일은 없지.”
“거짓말인 거 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네.”
레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상엽이 이를 거부했다.
“나 지금 시간 많은데.”
“웬일이야? 항상 바쁘더니.”
“안 바빠. 너무 한가해서 시간을 나눠 주고 싶을 정도야.”
“그럼 그 시간을 내가 좀 가져 볼까?”
레나는 내숭을 떠는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엽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어디 덤벼 봐.”
“각오는 됐지?”
“각오가 필요할까? 별로 강한 상대가 아니라서.”
“항복하게 될 거야.”
“해 봐.”
상엽은 거부하지 않고 레나를 들어 올렸다.
유쾌한 노곤함 속에서 상엽은 손을 더듬었다.
침대에 누운 그대로 레나의 손을 잡아 상점을 열었다.
“파이어스의 망치 10단계까지.”
상엽이 원하는 마지막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다 끝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겨우 탐색전이 끝난 건데.”
“글쎄. 그 정도로는 날 항복시킬 수 없어.”
“진짜는 지금부터야.”
“날 이길 무기는 있어?”
“걱정 마. 진짜 망치가 따로 있거든.”
상엽과 레나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