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리더 발락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 명이 흩어졌고 근처에 있던 그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가 자랑하던 매끈한 피부는 완전히 녹아 버려 내부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싼 향수를 쓰고 피부 관리에 공을 들이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바닥에서 뭔가가 치솟았다.
푹!
아홉 줄기의 사슬이었다.
가시를 잔뜩 품은 사슬은 그의 몸을 꿰뚫어 버렸다.
발락은 뒤늦게 상엽의 등을 공격하는 수하들을 원망스런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네 명을 처리한 상엽은 약해진 포위망 안에서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쾅! 쾅! 쾅!
그는 일부러 수십 번이나 바닥을 때리며 그들을 교란했다. 그러다 틈이 보이면 유령잔상과 팔각대시를 섞었다.
경로가 바뀌고 잔상이 뒤따르는 상황에 가끔씩 추종자가 신경을 건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어김없이 엄청난 속도의 스트라이크가 꽂혔다.
그럼에도 그들은 버텨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명이 쓰러졌다.
-정보와는 완전 다르다.
또 한 명의 사내가 쓰러졌다. 그렇게 두 명을 처리한 상엽은 갑자기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뭔가를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상엽의 몸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난 듯 공기들이 사방으로 밀려났다.
‘동희야. 고맙다.’
상엽은 지속시간이 끝난 음료의 힘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6명이 4명이 되고 다시 3명이 되었을 때, 더 이상 포위망은 의미가 없었다.
“후퇴한다!”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상엽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건방지게 10명만 오다니.”
쾅!
등을 보인 사내를 처리한 상엽은 또 다른 사내의 발을 사슬로 감았다.
등을 보인 순간부터 그들은 상엽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한 명과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도망갈 수 있다.’
그는 속도에 자신이 있는 자였다.
‘저 녀석은 나보다 느리다.’
이렇게 확신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들이 상엽을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착각이었다.
“일부러 잡혀 준 거야.”
상엽은 스트라이크를 섞으며 빠르게 그를 뒤쫓았고 결국에는 잡아냈다.
“넌 유령이랑 좀 놀아 줘야겠어.”
그의 해머가 사내의 허벅지에 꽂혔고 추격전은 거기까지였다.
* * *
18명이 죽었다.
챙!
보고를 받은 마리를 아끼던 와인잔을 집어 던졌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진열장이 박살이 나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의 앞에 서 있는 20대 중반의 사내는 마리의 분노에도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로이. 이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흥미롭잖아요. 대장님.”
20대 중반의 로이는 워낙 동안이라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선천적인 눈웃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라 경계를 허무는 힘이 있었다.
“우리 길드에서 18명이 당한 적이 있던가요? 이건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라고요.”
“우리 길드원이 죽었다는 것만 빼면 그렇지.”
“어쨌든 이제 제가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마리는 로이의 웃는 표정을 다시 보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로이의 다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상대를 잔인하게 죽일 때도 로이는 이런 표정이었다.
“좋아. 빨리 처리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대장님!”
로이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 * *
김대진은 파면을 당했지만 여전히 군부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큰 부탁은 들어줄 수 없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 작은 도움은 박광신의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싸움은 넓게 생각해야 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이유가 없어.
박광신은 첫 번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한국을 떠나자.
힘이 부족한 집단에 좁은 곳에 갇혀 있으면 결국에는 말라죽는 형태가 된다.
이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박광신은 과감히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이제 우리가 공격을 하는 거야.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상엽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3일 후.
가을이 한창인 시기였다.
마리에게 명령을 받았던 로이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보고를 했다.
“그놈들이 사라졌어요. 빨리 찾아 주세요. 진짜 죽이고 싶어요.”
“나한테 투정 부릴 일이 아니야. 이 자식들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마리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녀석들만 처리하면 작전도 끝인데.”
많은 길드들이 노리는 한국을 거의 손실 없이 먹는 셈이었다.
소멸한 18명을 감안하더라도 훌륭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 마지막 잔당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 짜증 나!”
마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을 때였다.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리며 부하 한 명이 다급히 달려 들어왔다.
마리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에서 벗어나지 않은 보고가 들렸다.
“벨기에 본부가 습격당했습니다.”
“뭐? 무슨 미친 소리야?”
“사망 인원은 5명. 중상이 1명입니다. 경비대원만 처리하고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리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중상 1명?”
“그렇습니다.”
“빨리 격리시켜!”
“네?”
“중상자! 빨리 격리시키라고! 일부러 살려 둔 거야!”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한국의 격리실은 비명으로 가득했다.
그나마 다른 부상이 없는 자들은 그레이 상점을 통해 간단히 치료를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훨씬 많았다.
이는 그레이 상점의 특징 때문이었다.
-완전한 치료만 가능하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전투에 참여한 많은 전사들은 기본 치료 코인이 5만을 넘어섰다.
이 코인이 없는 자들은 그냥 고통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 더 지켜보고 코인 지원 준비해.
마리는 결국 이런 결정까지 내렸다. 코인을 지원해 줘서 치료를 하는 것이다.
“이 자식들이 본진으로 갔다는 거지…….”
“대장님. 그럼 저도 그 녀석 잡으러 갈게요.”
“기다려. 거기선 내 명령이 우선이 아니야.”
“아. 그렇죠.”
길드 아레나의 본부가 있는 나라였다. 당연히 길드장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
“미친놈들. 곧 후회하게 될 거야.”
“안타깝게도 저한테는 기회가 안 오겠군요.”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손을 찢어 죽였어야 하는데.”
그들은 화가 났지만 위기감은 없었다.
“거길 제 발로 가다니. 미친놈들.”
“이제 우리 손을 떠나 버렸네요.”
마리와 로이는 이 모든 사건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했다.
* * *
벨기에는 유럽의 대표 국가는 아니지만 영국과 해안을 두고 마주하고 있고 동쪽으로 독일과 네덜란드,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형성했다.
국방력이나 경제력을 떠나서 유럽 최고 국가와 모두 인접한 위치였다.
아레나가 벨기에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전지대라더니 확실히 다르네.”
상엽은 벨기에의 북쪽 해안도시 브뤼허에 있었다. 아레나의 총단이 있는 수도 브뤼셀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가 본 벨기에는 한국보다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한국은 여전히 변종이 존재하지만 벨기에에는 단 한 마리의 변종도 없었다.
아레나의 완전 소탕 작전의 결과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그 평화는 국력으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이를 노릴 수 있는 집단은 없었다. 이 역시 아레나가 있기에 가능했다.
“자. 버티기를 시작해 볼까?”
상엽은 해안 구경을 그만두고 박광신에게 받은 주소로 움직였다.
도착한 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액세서리 상점이었다.
브뤼허는 유럽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였고 도시 중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도 있었다.
그가 방문한 핸드 메이드 액세서리는 아기자기한 팔찌와 목걸이를 주로 만드는 곳으로 20대 초반의 명랑한 느낌의 여성이 주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라이라의 가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금발에 귀여운 표정의 여인은 평균보다 작은 키였지만 몸짓은 누구보다 컸다.
“상점 좀 이용하러 왔어요.”
“네. 둘러보세요.”
“이 상점 말고요. 그레이 상점.”
“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이라는 인사를 하더니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부탁해.”
“알았어.”
가게를 맡긴 라이라는 상엽의 손목을 잡더니 상점의 안쪽으로 끌고 갔다.
상점 안쪽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그녀가 머무는 10평 남짓한 방이 나타났다.
수수한 느낌의 침대와 책상, 옷장이 전부지만 워낙 깨끗하고 정갈해서 낡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브뤼허의 바다는 그림처럼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네.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요? 와! 반가워요!”
라이라는 상엽이 알던 다른 상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상점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아. 제가 시간을 너무 끌었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도 천천히 하는 걸 좋아해요. 오늘은 특히 더 천천히 둘러보려고요.”
“얼마든지요!”
라이라는 손을 내밀었고 상엽이 그 손을 잡았다.
이틀이 흘렀다.
라이라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지워져 있었다.
“이건 정말 너무하네요.”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제가 결정 장애가 있어서요.”
“지금 일이 너무 밀렸다고요. 소환서에도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럼 일단 결정한 것부터 할게요.”
“제발 빨리 해 주세요.”
상엽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점 업그레이드. 중급까지 해 주세요.”
“이틀 만에 드디어 결정하셨나 보네요.”
라이라와 상엽은 이틀 동안 함께 있었다. 상엽이 상점을 열고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치 등록도 할게요.”
상엽은 이로써 한국의 레나와 벨기에의 라이라를 연결했다. 언제든 바로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이라는 상점 업그레이드를 끝내자 상엽을 보며 물었다.
“이제 끝났어요?”
“미안해요. 스킬 좀 살펴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휴. 안 될 건 없죠. 하지만 빨리 해 주세요. 정말 일이 많이 밀려서 그래요.”
상엽은 다시 스킬을 살피기 시작했다.
‘버티기.’
지금 이 현상은 벨기에와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박광신의 작전에 의해서였다.
-그레이 상점을 모두 붙잡고 있어. 녀석들이 소환서로 치료하지 못하도록.
흑점 길드원 전체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서 그레이 상점을 붙잡고 있었다.
-허점이 있겠지만 결국 치료는 한 녀석밖에 못해.
소환서로 불려 온 그레이 상점은 오직 그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다.
결국 통증을 참거나 직접 상점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먼저 상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저기 심심하면 제가 살아온 이야기라도 해 줄까요?”
“빨리 좀…….”
“제가 말을 하다 보면 빨리 결정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해서요.”
“그럼 알았어요.”
상엽은 친절한 라이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5분쯤 지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들은 상점에 대한 생각은 잊고 말았다.
첫 습격은 겨우 입구로 그쳤다. 그렇게 3일이 흘렀다.
미미한 충격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동희의 근육통 전염병은 아레나 길드를 비명으로 덮었다. 치료사가 있었지만 통증을 완화시키는 정도였고 결정적으로 감염자가 너무 많았다.
습격 소식을 듣고 자동으로 전투요원들이 모인 탓에 전염자는 150명을 넘어섰다.
그들 중에 그레이 상점에서 치료를 한 자는 불과 40명이었다. 나머지는 치료할 코인이 없거나 그레이 상점이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에게 위안거리는 한국에서 먼저 전염병이 돌았던 탓에 그 결과를 안다는 것이다.
-서서히 통증이 사라지고 후유증은 없다.
시간만 지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오늘부터 3일이다.
근육통의 통증이 최고조로 달하는 날이었다. 그 상황에서 정상적인 전투는 불가능했다.
120명의 길드원이 싸움에서 제외된 것이다. 습격소식을 듣고 도착한 탓에 전투요원의 비율이 높은 것도 악재였다.
-3일 동안 철저히 방어에 집중한다.
결국 이런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레이 상점에 머물고 있는 자들의 정보를 철저히 파악하고 절대 놓치지 마라.
-사살할 수 있는 자는 처리하고, 나머지는 지켜보기만 한다.
그들의 대응은 빠르고 정확했다.
-3일 후, 그들은 모두 처단한다.
이 결과에 닿기 위한 가장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모든 게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다.
가장 위험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에 상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붙잡고 있던 그레이 상점도 자유로워졌다.
갑자기 모든 제약이 풀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렸다.
-한국에서 긴급 지원요청이 왔습니다!
혼란은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