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형. 아레나 길드라고 알아?”
“당연히 알지. 유럽 최고를 다투는 화이트 길드야. 1위라는 평가도 있고 2위라는 평가도 있어. 순수 화이트 길드로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이야.”
상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 되니까 팔아먹으려고 했겠지?”
“팔아먹는다는 게 무슨 소린가?”
상엽은 더 이상 뜸들이지 않고 세 명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말했다.
“아레나 길드에게 한국을 넘겨주려고 했어요. 당연히 그 녀석들은 자리를 보장받았고요.”
그 외에도 아레나 길드와의 많은 협상내용이 있었다.
복잡한 내용이었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권력을 주겠다.
-대신 한국의 주권을 양도하라.
이걸 받아들인 것이다.
“미친놈들!”
김대진은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내뱉었다. 항상 냉정한 그가 이처럼 흥분하는 것은 상엽도 처음 보았다.
군인으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그런데 박광신은 반대였다.
“명분은 확실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형. 무슨 뜻이야?”
“아레나 길드에 한국을 넘겨주면 국민들에게도 나쁠 게 없어.”
“뭐?”
박광신은 상엽의 반응에도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전쟁이 없잖아.”
그의 말대로였다.
아레나 길드에게 한국을 넘겨주면 어설픈 길드들은 도전할 수가 없게 된다.
아레나 길드의 힘에 한국의 군사력까지 합쳐지면 어떤 길드도 함부로 넘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게 현명하진 않아. 그냥 이 녀석들이 이렇게 합리화시켰다는 거지.”
문제는 주권에 있다. 박광신은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아레나 길드를 받아들이는 순간, 한국은 식민지가 될 거야. 국가에 애정이 없는 집단은 이익만 추구하게 되니까.”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내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게 아니거든.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그 많은 인원이 아레나 길드 쪽에 붙다니.”
“브로커가 있어. 박 실장이라는 녀석인데 정치권 쪽이 아니야. 그런데 이상한 건 죽은 녀석들도 박 실장의 진짜 정체는 몰라.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로비스트라는 것밖에.”
상엽은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박광신은 상황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들이 먼저 움직인 거야. 그걸 정치권이 받아들였고.”
박광신의 정보망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박 실장이라는 녀석을 찾아야 돼. 그 녀석이 이번 일의 시작점을 알고 있을 거야.”
“갓코인 유저겠지?”
“그런 거 같아.”
“일단 알았어. 바로 찾아볼게.”
박광신은 자신의 할 일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김대진이었다.
지금 가장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그였다.
“군인 아저씨. 뭔가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준비라니?”
“나라를 지켜야죠. 이 나라가 식민지가 되게 둘 거예요?”
“쿠데타를 말하는 건가?”
김대진의 단어 선택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에 상엽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할 거예요. 한국을 지키려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선을 동원하지. 일단 그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건 어떻게든 막고 있겠네.”
김대진도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공무원들 정신교육 좀 해야죠.”
상엽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매국노들의 명단이 있거든요.”
“자네가 공무원들을 더 싫어하겠군.”
“걱정 마세요. 벌을 주기 전에 상을 줘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 * *
빌딩이 밀집한 삼성동에 위치한 오래된 분식집이었다.
튀김과 떡볶이, 김밥을 테이블에 둔 금발 여인은 한껏 각도를 잡으며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오면 꼭 먹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녀는 고급 스테이크를 음미하듯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먹었다.
“음. 맛있어.”
만족스런 감탄사는 분식집 할머니의 웃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 즐거운 건 아니었다.
금발 여인의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다급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리 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다 먹고 말하면 안 될까요? 모처럼 만족스런 식사인데.”
“죄송합니다.”
20대 중반에 고급 양복은 입은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텔레포터 마리.
결국 그녀는 자신이 만족할 만큼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사내에게 말했다.
“그깟 한국의 국회의원 몇 명 죽었다고 웬 호들갑이야?”
“그들은 우리에게 동조하는 자들로…….”
“동조?”
마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개가 주인한테 동조?”
“죄송합니다.”
사내는 화가 치밀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계산이나 해.”
마리는 물을 마시더니 분식집을 나섰다.
삼성동 특유의 높은 빌딩들이 숲처럼 햇빛을 막고 있었다.
“매력적인 나라야.”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걷다가 귀찮다는 듯이 주변으로 다가온 사내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문제가 뭐야?”
“정상엽과 흑점에서 우리에게 동조, 아니 아레나를 따르는 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피해 없이 한국을 장악하려던…….”
마리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그만. 듣기 싫어.”
그녀는 몸을 돌려 사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 계획은 이미 실패야. 그걸 알면서 왜 투정을 부리는 거지?”
“죄송합니다.”
“이제 우리한테 맡기고 넌 목줄 건 강아지들이나 지켜봐. 쓸데없이 짖고 돌아다니지 않게.”
“시간을 알려 주시면…….”
“내일.”
“네? 그렇게 빨리…….”
“닥치고 이제 꺼져. 개는 적당히 짖어야 사랑받는 법이니까.”
마리는 당황한 사내를 뒤로하고 인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금발의 귀여운 여인은 사내들의 시선을 받았고 그때마다 귀여운 웃음으로 화답을 했다.
“그래. 많이들 즐겨. 내일부터는 웃지도 못할 테니까.”
마리의 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 * *
-조심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상엽은 박광신에게 문자를 받았다.
-우리가 주시하던 정보원들이 전부 한국을 떠났어. 해외에서 들어오려는 움직임도 사라졌고.
기를 쓰고 들어오려던 자들이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괜찮아. 직접 물어보면 돼.”
상엽은 높게 솟은 담을 보았다.
‘인연이 깊네.’
국회의원 정득수.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 이하나의 아버지였다.
이하나의 본명은 정하나였고 정득수의 외동딸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반대를 한 인물이라니.”
이번 아레나 사건에서 정득수는 끝까지 반대를 했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좀 다른데?’
정득수는 오랫동안 정치판에 있었고 능구렁이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결코 사명감에 목숨을 걸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는 유일하게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갓코인 유저가 정득수를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큰 사건을 알고 반대를 했으니 처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나 보면 알겠지.”
상엽은 담을 넘어 잘 꾸며진 정원에 내려섰다.
‘이렇게 허술해?’
그는 굳이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정득수도 마찬가지였다.
흔한 경호원조차 보이지 않은 것이다.
‘벌써 당했나?’
상엽은 추종자를 통해 내부를 살폈다.
저택 내부에 있는 사람은 정득수뿐이었다. 그는 2층 서재에서 한문이 가득 섞인 책을 읽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가?’
상엽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좋아. 갑자기 애국자 행세를 하는 이유나 들어 볼까?”
상엽은 2층으로 뛰어올라 통유리벽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정득수는 통유리벽 한쪽의 유리문을 가리켰다. 당황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엽은 마다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책상 앞에 섰다.
“기다린 건가요?”
“온다면 만나려고 했었네. 안 온다면 내 목숨도 끝이었겠지.”
“도박을 했다는 건가요?”
“살다 보면 그래야 할 경우가 있기 마련 아닌가?”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정득수는 사각턱에 고집스러운 느낌의 굵은 눈썹을 가진 자였다.
인상만으로는 이하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사모님이 예쁜가 봐요?”
“무슨 뜻인가?”
“미안해요. 속마음이 밖으로 나와 버렸네요.”
“하나 그 아이는 엄마를 많이 닮았지.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이하나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정득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 이번 도박에 판돈으로 목숨을 걸었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아저씨가 이 도박에서 이기면 얻는 건 뭐죠?”
“더 강한 권력이지.”
“너무 솔직한 거 아니에요?”
“난 이번 싸움에서 자네와 김대진을 선택했네.”
“저만 그 사실을 몰랐나 보네요.”
“상관없네. 결국에 한쪽이 이기는 싸움이고, 난 내가 원하는 쪽에 배팅을 했으니.”
상엽은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아는 걸 전부 말해 주겠어요?”
“그러지. 알고 싶은 게 뭔가?”
“누가 이 일을 기획했죠?”
“민앙 그룹과 도성 그룹이네. 그들의 주도 하에 재계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었지.”
상엽은 그 이름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도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네요.”
“본성을 깨운 것뿐이지. 언젠가는 그렇게 할 자들이었어.”
“알았어요. 제가 직접 확인해 볼게요.”
“소용없을 것이네. 주요 인물들은 오늘 아침에 모두 한국을 떠났으니.”
상엽은 그 말에 속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는 걸 더 말해 주겠어요?”
“오늘이 디데이인 것 같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나요?”
“아니. 그건 모른다네.”
박광신과 정득수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했다.
‘오늘.’
안타깝게도 상엽이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좋아요. 이제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건가요?”
“자네를 만났으니 몸을 숨겨야지.”
“의외네요. 끝까지 여기서 버틸 줄 알았더니.”
“나도 목숨은 하나뿐이라네. 그리고 누구보다 내 목숨을 아끼지.”
상엽을 만난 것으로 정득수의 첫 번째 도박은 성공했다.
“김대진에게 전해 주게. 내가 그래도 강단은 있는 사람이라고.”
정득수는 김대진과 이미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상엽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조심하세요.”
“혹시.”
돌아서려던 상엽이 정득수의 부름에 행동을 멈췄다.
“딸아이를 만나면 잘 부탁하네. 그렇게 훌륭한 부녀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딸이라서 말일세.”
“약속은 못해요.”
상엽은 그 말을 남기고 정득수의 서재를 떠났다.
정득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민앙 그룹과 도성 그룹의 회장들은 주요 간부들과 함께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그 외에 몇 명의 국회의원을 만났지만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하늘은 어둑해졌고 남은 오늘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9시.’
오늘이 디데이라면 3시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상엽과 박광신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상엽이 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뉴스 확인해.
박광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봤을 때, 상엽은 오늘 일어날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괴한들에 의해 청와대가 점령되었습니다.
청와대 점령.
드디어 오늘 일어날 일을 알게 되었지만 상엽의 답답함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은 그동안 평화를 찾은 듯했다. 적어도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부에서 그렇게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변명이었는지는 얼마 되지 않아 현실로 밝혀졌다.
테러리스트들이 소탕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20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한국의 상징을 점령했다.
-청와대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뉴스 속보에 국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대통령의 안위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속보는 계속되었지만 새로운 소식은 많지 않았다.
늦은 밤에 시작된 속보는 새벽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지만 희망적인 소식은 없었다.
-정찰할 수 없습니다.
유령추종자마저 청와대 정찰에 실패했다. 접근을 막는 강한 결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야?”
-지금까지 겪은 최고입니다.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상엽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
유럽 최고 화이트 길드 아레나.
현재 청와대를 점령한 인물들의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