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92화 (92/300)

# 92

중급 그레이 상점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었다.

중급 이상의 그레이 상점 두 곳을 등록해 놓으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상엽은 코인이 아까워서 레나에게만 등록을 해 놓았지만 이는 전략적으로 많은 활용도가 있었다.

심장을 자극하는 절정의 음악이 잠시 멈췄다.

한순간 유쾌한 피로감이 넓은 홀을 가득 메웠고 곧이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대 위에서 홀을 지배했던 DJ레나는 특유의 거만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들어선 그녀는 소파에 앉아 클럽 내부와는 상반된 고요를 즐겼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의 휴식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빛이 모여들었고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안전한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원형으로 번진 빛은 곧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워프홀이었다.

이는 누군가 그레이 상점 등록지점을 통해 이동한다는 뜻이었다.

나타나는 이는 금발 머리의 20대 초반 여자였다.

붉은색의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트레이닝 복을 세트로 갖춰 입은 그녀는 레나를 보자 웃음을 지었다.

“안녕.”

레나는 그녀를 기억했다.

한 달 전에 찾아와서 상점 업그레이드를 하고 등록지점을 설정한 여자였다.

“어서 와. 상점 필요해?”

“아니.”

“그럼 볼일 봐.”

“불친절한 게 컨셉이야?”

금발 여인의 도발에 레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여인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난 말이야. 시끄러운 음악이 좋아.”

“그런데?”

“음악 외에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거든. 그런데 넌 여길 시끄럽게 만들 거 같거든.”

레나의 말에 여인이 웃었다.

“간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상점이야. 어떤 일이든 의무 외에는 끼어들지 않아.”

“그럼 잘됐네.”

여인은 보란 듯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하얀빛이 모이더니 가루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레나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이에 가루와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섭하지 않는다면서?”

“여긴 보호구역이야. 이 클럽 안에서 시끄럽게 하지 마. 경고는 한 번뿐이야.”

금발 여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인정했다.

“나가는 길이나 알려 줄래?”

“처음 왔던 길로 나가. 너랑 잡담은 별로 재미가 없네.”

레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금발 여인은 레나에게 다가오더니 놀리듯 말했다.

“갑자기 살 게 생겼어.”

얄밉게 내민 손이지만 레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달빛 캔디 하나.”

결국 금발 여인은 가장 저렴한 달빛 캔디 하나를 구입했다.

레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고 거래를 마쳤다.

“진짜 갈게. 안녕.”

금발 여인이 대기실을 떠났다. 한실장이 그녀를 안내해서 뒷문을 알려 주었다.

“마리.”

홀로 남은 레나는 금발 여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텔레포터라…….”

텔레포터 마리.

레나도 실제로는 처음 만나는 형태의 유저였다.

순간이동, 블링크, 텔레포트, 워프존 생성.

이것이 텔레포터들의 특징이었다.

초보 텔레포터는 혼자만 이동이 가능하지만 성장이 계속되면 타인이 이용할 수 있는 워프존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의 희귀성은 스카우트들보다 훨씬 높았다.

“정상엽.”

레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너도 여기까지인가?”

그녀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무 빨리 유명해져 버렸어. 게다가 혼자니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녀의 심장이 쓰라렸다.

그녀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상엽은 소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이는 상엽이 유일했다.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 줄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응원밖에 없었다.

그렇게 평소답지 않게 한숨을 쉴 때, 다시 대기실 문이 열렸다.

갓코인 유저의 방문이었다.

40대 후반의 외모로 늘씬한 키에 중절모가 어울리는 미중년이었다.

그런데 레나가 그를 보는 눈빛에는 호감이 없었다.

“상점을 부탁드립니다.”

그는 중절모를 벗으며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레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신경을 간질이는 소름이 그녀의 몸 전체로 흘렀다.

이를 느낀 미중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분명한 비웃음임에도 객관적으로는 인자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떨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나 씨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지금 꽤 만족스러운 상태라서 말입니다.”

“또 누군가를 유린하고 왔겠지?”

“비난은 사양합니다. 호르몬제만 사서 돌아갈 테니까요.”

연금술사의 실패작.

상엽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는 물품이었다. 이를 구입하는 이들은 특별한 스킬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지난번에 꽤 사 간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 장난감이 꽤 버텨 주어서 말입니다. 덕분에 아주 즐거웠지요.”

장난감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레나는 알고 있었다.

“널 외부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변태 도깨비.”

그는 이미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상엽이 그토록 찾고 있는 변태 도깨비는 레나의 상점을 이용하는 갓코인 유저였다.

그는 상엽보다 훨씬 빨리 레나를 알았고, 지금까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제 좀 적당히 하는 게 어때?”

“상점이 훈계도 하던가요?”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말한 거야.”

“거절하지요. 전 아직도 부족함을 느껴서 말입니다.”

레나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오랜만에 남자 하나를 사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태 도깨비가 남자를 필요로 할 때는 단 한 가지다.

오로지 살인을 즐길 때였다.

“절 노리는 녀석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교육을 시켜 줄 작정입니다.”

레나는 심장이 뜨끔했다.

“널 노리는 녀석은 많지 않아?”

“이번에는 좀 특별한 녀석이더군요. 정상엽. 한국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지요.”

“너도 위험할 텐데.”

“힘으로 싸우는 건 아니니까요. 녀석의 근육 신경을 하나하나 뜯어서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지켜볼 작정입니다. 세포 하나하나, 혈관 하나하나를 전부 분해하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니까요.”

그는 언제나 이처럼 자신의 계획을 레나에게 말했다. 결코 말을 옮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운을 빌어.”

“진심입니까?”

“아니. 사실 불운을 빌고 있어.”

“감사합니다. 전 레나 씨와 대화하는 시간이 매우 즐겁습니다.”

“난 아니야.”

“그럼 이만.”

그는 중절모를 쓰며 다시 인사를 하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후우.”

레나는 주저앉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정상엽. 그냥 기적으로는 안 되겠는데. 이제 어떻게 할래?”

그녀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 * *

“야! 지금 장난해?”

상엽은 뜻밖의 방문자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 그의 아파트에는 반가운 손님이 왔다.

곧 오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던 동희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엽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동희의 품 안에서 담비가 나타났을 때부터 평화로운 아침이 깨졌다.

-역시 바보 같은 인간이었군.

“뭐?”

-잘 생각해라. 누가 이득인 제안인지.

“생각은 이미 끝냈거든. 그러니까 이번에 너희들이 한국을 위해서 싸워 주겠다는 거 아니야? 대신 설악산 일대를 완전한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달라는 거고. 비무장지대에 진출도 허락해 주면 북한으로부터 남한으로 넘어오는 것도 막아 주고.”

상엽은 자신이 들은 바를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담비는 큰 눈을 눈꺼풀로 반쯤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바보군.

“야!”

상엽이 흥분하자 동희가 급히 다가와 진정을 시켰다.

“상엽아. 일단 들어 봐.”

-내가 도와주는 건 한국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유일한 소통자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뿐이지.

그 소통자는 동희를 의미했다.

-소통자를 도와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위험에 비해 우리가 얻는 것이 없다. 일종의 명분이 사라진 것이지. 그래서 나는 명분을 원하는 것이다.

“그게 그 말이잖아.”

-전혀 다르다.

“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 동희가 끼어들며 고개를 돌렸다.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아.’

담비들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상엽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각 개체는 큰 위협이 아니지만 그들의 단체 행동은 상엽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걸 받아들이느냐가 문젠데.’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 했다.

문제는 변종이라는 단어가 가진 거부감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만큼 변종이라는 단어에 치를 떠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변종을 아군으로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상이라니.’

담비 대장이 말하는 설악산 구역은 예전 국립공원이었던 경계 전체를 말했다.

‘변종이 안전구역에서 성장하는 상황이 될 테고. 어쩌면 오히려 위험지역이 사라질 수도 있고.’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결국 신뢰가 관건인데.’

모든 문제는 하나로 연결되었다.

‘변종을 믿을 수 있을까?’

상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지금은 일단 망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관계자들을 만들 수 있게 해 줄게.”

동희가 담비와 함께 찾아온 것은 김대진과 박광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상엽은 고민 끝에 이들의 자리를 주선해 주기로 했다.

한 시간 후.

고급 한정식 식당.

상엽과 동희, 김대진과 박광신이 서로를 보고 마주 앉았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상엽이 테이블을 두드리려 말했다.

“접시에서 내려올래? 음식 같잖아.”

접시에 앉아 있던 담비가 자리를 옮겼다.

-너희들이 뭔가에 앉길래.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방석에 앉아 있었다. 담비는 그것이 문화라고 생각하고 테이블 위의 접시에 앉은 것이다.

“자. 빨리 시작하자고.”

협상이 시작되었다.

말하는 담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에는 심각한 주제가 거론되자 집중력이 생겼다.

상엽은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았다.

어차피 김대진과 박광신이 결정할 일이었다.

많은 의견이 오가고 협상도 있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결정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략적인 부분은 협의가 이루어졌다.

-설악산 일대에 군사작전을 중단한다.

-보호구역 밖으로 나온 변종은 지금처럼 사살한다.

-작전을 위한 변종의 이동은 미리 김대진에게 알리고 임의적으로 움직여 국민을 불안하지 않도록 한다.

-작전의 주체는 동희로 한다.

이 네 가지가 기본이었다.

북한과 관련된 문제는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다들 수고했어.”

상엽은 긴 회의의 종료를 선언했다.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자.”

상엽은 동희와 함께 한정식집을 나섰다.

-주인님.

대문을 나서던 상엽이 추종자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추종자가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다.

한정식집의 기와 위에 달을 등진 누군가가 서 있었다. 굳이 몸을 숨기고 있지는 않았다.

관능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적설.”

동희도 그 이름을 듣더니 상대를 알아봤다.

적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엽과 동희를 보고 있었다.

“잡으러 갈까?”

동희의 물음에 상엽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대비했을 거야.”

상엽은 그녀의 집착이 거슬렸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 참 많네.”

“네가 너무 강해서 그래.”

“날 잡고 강해지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성장했으니까 받아들여야지.”

“넌 역시 대인배야.”

동희는 여전히 상엽의 모든 면을 좋게 보았다.

“동희야. 너 조심해.”

“알아. 내가 다치면 너도 위험해지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 사실 날 잡는 거보다, 널 잡는 게 훨씬 이득이거든.”

“응. 알았어. 그런데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친구가 많아.”

동희는 웃으며 적설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 순간, 수십 마리의 담비가 적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튀어 올랐다.

적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 아쉽다. 잡을 줄 알았는데.”

“대장 담비만 온 게 아니었어?”

“아. 인사를 안 시켜 줬구나.”

동희가 바닥을 보며 친구들을 불렀다.

“얘들아. 인사해. 몇 번 봤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이 일제히 뒤집어지며 백여 마리의 담비가 튀어나왔다.

“살벌하네.”

상엽은 백여 마리의 시선을 동시에 받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자. 인사하자.”

동희가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먼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담비들이 일제히 이빨을 드러내며 특유의 소리를 냈고 공격 자세처럼 허리를 숙였다.

“동희야. 인사는 앞으로 안 해도 될 거 같아.”

상엽은 망치를 꺼내고 싶은 본능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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