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89화 (89/300)

# 89

박광신의 빌딩 지하실에는 취조실이 있었다.

사방이 벽지조차 없는 시멘트벽으로 되어 있는 사각 공간 안에서 상엽은 쓰러진 여인을 보고 있었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추종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을 읽을 수도 없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기절한 여인의 몸으로 추종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신공격에 대한 방어력도 출중합니다.

‘그냥 처리할까?’

위험한 여자였다.

무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 같은 기술들은 순식간에 한 지점을 폐허를 만들 수도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박광신의 건물은 무너졌을 것이다. 흑점이 흔들린다는 것은 침략자에 대응할 힘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보다 빨라.’

곧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강렬한 습격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야기 좀 해야겠어.”

상엽은 고스트 체인으로 그녀의 몸을 묶었다. 가시가 없는 형태로 사용해서 직접적인 고통을 주진 않았다.

체인에 묶인 작은 몸이 상엽 앞에 떠올랐다. 상엽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상태에서 체인이 그녀를 조르도록 했다.

“으…….”

얼음 여인이 눈을 떴다.

“성질부리면 죽일 거야.”

상엽의 경고에 얼음 여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진 않았다.

“유령아.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 보이면 말해.”

추종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섰다.

“너한테 시간이 많지 않아. 난 네가 가진 코인과 조각들을 가지고 싶거든.”

여인은 말이 없었다. 상엽은 이를 무시하고 질문을 계속했다.

“빌딩을 무너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했지?”

이번 역시 대답은 없었다.

챙!

그녀의 무릎 아래에 있던 체인에서 가시가 솟구쳤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발 아래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문에는 취미가 없지만 못할 것도 없잖아.”

상엽은 평소의 웃음을 지우고 얼음 여인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시 물을게. 네 계획이 뭐야?”

“주, 죽일 거야!”

“뭐. 할 수 있으면 그러던지.”

챙!

허벅지와 무릎까지 다시 가시가 솟구쳤다. 그녀의 하얀 피부를 뚫은 가시만 20개가 넘었다.

가시에 관통당한 뼈가 부러졌고 신경이 난도질을 당하자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유럽 쪽인 거 같은데.’

여자는 억양이 센 영어를 사용했다. 이것만으로 출신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뭐 고문이 큰 의미는 없겠네.”

상엽은 얼음 여인이 고통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넌 반드시 죽을 거야!”

운명을 알게 된 여인이 살기를 뿜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너한테 죽진 않겠네.”

챙!

그녀를 몸을 감싼 고스트 체인 전체에서 가시가 돋았다. 그녀의 동공이 잠시 커지더니 힘을 잃고 곧 빛으로 흩어졌다.

‘블랙 유저라.’

코인은 예상대로 상엽에게 흡수되었고 보관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꽤 많네.”

이를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빌딩 전체에서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울렸다.

상엽은 곧장 지하실을 빠져나와서 1층 로비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불인가?’

하늘에서 불꽃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엽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나만 있는 게 아니었지?”

한 명의 습격자를 상대로 누군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덩이가 난무하는 전장에 선 사내는 상엽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저씨 형.’

흑점 길드장 강청.

상엽이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습격자의 심장에 강청의 칼이 꽂혔다.

덕분에 다른 길드원들은 빌딩의 화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형.”

“자네가 도와줬다고 들었네. 진심으로 고맙네.”

“말투가 더 아저씨처럼 됐네요.”

상엽은 사라진 사내의 흔적을 보았다.

얼음 여인에 이어 불을 쓰는 사내의 습격으로 인해 광장은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이 녀석들이 누군지는 알아냈어요?”

“그건 광신이가 하겠지.”

“형도 참 속편하네요.”

“자네만큼은 아니지. 광신이의 상상력을 즐겼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곳에 있었고.”

이번 역시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일단 들어가지. 지켜보는 눈이 많아질 테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요란한 전투는 분명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상엽은 강청과 함께 빌딩 안으로 이동했다.

빌딩 안에서 상엽은 흑점의 또 다른 현실을 들었다.

“유럽의 블랙길드 밴시입니다.”

박광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강청과 상엽에게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이유가 있는 습격이었습니다. 두 달 전부터 우리에게 연합을 제안했던 길드였습니다.”

“연합?”

“말이 연합이지 실제로는 우리 길드를 흡수하려는 제안이었습니다.”

불공정한 제안을 한 것이다.

“제안은 압박으로 변했고, 결국 최근에는 협박을 했습니다.”

“무시를 했다는 거네.”

상엽의 말에 박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지켜 줄 테니 밴시로 들어오라고 제안했어.”

“지켜 줄 힘은 있는 집단이야?”

“가능성은 있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길드니까. 블랙 길드 중에서는 유럽 3위 정도로 평가하고 있어.”

유럽 3등이라면 한국을 단숨에 무너트릴 힘이 있었다. 하지만 상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등도 아니고 3등 따위가?”

그의 말에 강청이 웃었다. 하지만 박광신의 이어지는 말에 그 웃음은 사라졌다.

“1등도 물론 협박이 있었지. 아직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

한국을 장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흑점을 지배하는 것이다.

흑점을 장악하면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고 한국을 흡수할 수 있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같은 제안이 있었지. 그 외의 나라도 마찬가지고.”

“흑점이 인기가 좋네.”

“그러게.”

대화를 듣기만 하던 강청은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박광신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강청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 너 혼자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었더니.”

“그게 역할이니까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박광신은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대단하군. 그걸 버텨 냈다니.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

“아직 버텨 내진 못했습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인내가 아니라 오만이 되는 겁니다.”

“버틸 수 있을 거라 판단하나?”

항상 막힘없이 대답하던 박광신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그의 판단은 단호했다.

“내가 도와줘도 마찬가지야?”

“동생이 도와주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에는 무너질 거야. 힘 차이가 너무 커.”

“그래도 형이라면 그렇게 대책 없이 버티진 않았을 거 같은데.”

박광신은 지금까지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군사력이 필수야.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버틴 힘이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선제공격을 해야 돼. 그들이 뭔가를 하기 전에.”

한 마디로 화를 입기 전에 미리 처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일단 사전작업으로 외교부에 명단을 넘겼어. 파악된 자들에겐 비자가 발급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들어오겠지만 그걸로 이유를 만들어 봐야지.”

그만큼 한국의 상황은 급박했다.

“그리고 연합도 해야 돼.”

“누구랑?”

“데스문.”

상엽과도 인연이 깊은 일본의 블랙 길드였다.

“그들에게 여유가 있을까? 일본 상황도 치열할 텐데.”

“한국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일본이야. 그걸 계속 어필하는 중이야. 그렇다고 해도 충분한 보상은 약속해야겠지만.”

“보상?”

“그래서 동생이 필요해.”

박광신은 상엽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습격을 막아 내면 일본에 가 주지 않겠어?”

“무슨 뜻이야?”

“난 이번 일을 기회로 삼을 거야. 단순히 막는 걸로 끝내면 얻는 게 없어.”

“그래서?”

“이번 습격을 막고 그걸 힘으로 일본을 잡을 거야.”

박광신은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갓코인은 적을 처리하면 자연스레 강해지는 구조였다. 이를 힘으로 삼으면 일본을 장악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쉽지는 않겠네.”

상엽은 현재 상황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결국 내가 지켜 내야 돼.’

이는 이미 결정한 일이었다.

‘켄사로가 그냥 도와주진 않을 텐데.’

그는 데스문의 길드장을 떠올렸다. 터프가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요다가 분명히 반대할 테고.’

데스문은 흑점과 닮은 점이 많았다. 대부분의 정책은 켄사로가 아닌 부길드장 요다가 결정했다.

그리고 켄사로는 요다의 결정을 신뢰했다.

“형. 데스문과 얼마나 이야기가 된 거야?”

“노력하고 있어. 솔직히 낙관적이지는 않아. 누가 봐도 우리가 지는 싸움이니까.”

“형이 데스문의 길드장이라면 한국을 도와주겠어?”

“절대 안 해.”

상엽의 예상대로였다.

“일단 알았어. 그 문제는 나한테 맡겨.”

“방법이 있어?”

박광신의 눈동자가 반작였다.

“켄사로가 어떤 남자인지 내가 잘 알거든.”

상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것만 해결하면 가능성은 있는 거지?”

“희박하지만 가능해. 그걸 시작으로 더 많은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

상엽은 그 말을 남기고 빌딩을 나섰다.

* * *

데스문 길드장 켄사로.

그는 부길드장 요다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평소에는 흔치 않은 일이라 곁에 있던 몇몇 간부들은 숨을 죽였다.

“그는 도박을 걸어 볼 가치가 있는 남자다!”

오래된 고성의 넓은 홀이었다.

이곳은 데스문의 회의실로 켄사로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장소였다.

“알고 있습니다.”

요다는 콧잔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올리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가 흑점에 합류했다면 가능성이 있는 싸움이다.”

“아닙니다. 한국이 확률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기적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자는 것이냐!”

“한국은 이미 끝났습니다. 잊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했다!”

쾅!

결국 켄사로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앉아 있던 의자를 내리치며 일어섰다.

의자가 가루로 부서지며 그 여파로 먼지가 안개처럼 홀을 가득 메웠다.

“그 약속은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요다!”

켄사로는 요다를 보며 분노했다.

“그가 약속에 따라 우리에게 요청을 했다! 날 만나고 싶다고! 그런데 만나지 말아야 한다니!”

“분명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부탁을 할 것입니다. 길드장님은 그 부탁을 그냥 넘기지 못할 것이니 애초에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요다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의 판단은 명확했다. 그는 데스문을 지키기 위해 켄사로의 분노를 홀로 감당하는 중이었다.

“약속은 목숨과 같다!”

“그 약속은 제가 한 것입니다. 제가 부길드장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징계도 달게 받겠습니다.”

“요다!”

켄사로는 요다의 진심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

3일 전.

상엽은 일본에서 만나자는 요청을 했고, 켄사로는 당연히 날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요다가 끝까지 반대를 하며 지금의 상황까지 흘러온 것이다.

쾅!

화를 이기지 못한 켄사로는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고성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때였다.

회의실 외부가 소란스러워지며 한 사내가 다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정상엽이 찾아왔습니다!”

흥분한 사내의 목소리에 회의실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길드장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그 말에 요다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길드장님!”

“그만.”

켄사로는 요다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특유의 저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만나겠다. 들어오라고 전해라.”

결국 켄사로의 허락이 떨어졌다.

잠시 후,

상엽이 불쾌한 표정으로 회의실 중앙에 섰다. 자연스레 주변으로는 간부들 외에 전투조가 배치되었다.

이를 본 켄사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러가라!”

켄사로는 전투조를 모두 내보내고 본래 회의를 하던 간부들만 남겼다.

“실망이야. 약속을 어기다니.”

“사과하지. 하지만 완전히 어긴 것은 아니다. 그 약속에 대해서 지금도 회의를 하는 중이었으니.”

“회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약속을 어긴 거야.”

상엽은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강한 어투로 말했다.

“정식으로 사과한다.”

켄사로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요다를 비롯한 간부들의 표정이 변했다.

본거지에서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켄사로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좋아. 일단 그 정도로 넘어갈게.”

상엽은 그제야 주변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이를 가는 요다의 모습이 보였다.

“요다. 널 원망하진 않아. 그런데 나에 대해서 잘못 평가한 거 같아.”

툭.

상엽은 회의실 바닥에 뭔가를 던졌다.

그것은 갓코인 유저들에겐 익숙한 상자였다.

유물 보관함과 유산 보관함.

“협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결국 요다가 상엽 앞으로 나섰다.

“협상은 거절합니다. 우리는 이번 싸움에…….”

“누가 그딴 구걸이나 하러 온 줄 알아?”

상엽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요다의 말을 잘랐다.

“내용물이나 확인해.”

요다는 상엽의 자신감에 눌려서 보관함의 조각들을 살폈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변했다.

“이건…….”

엄청난 가치의 조각들이 보관함 밖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조각을 알아보았다.

문제는 그 조각들의 가치가 아니었다.

“료사기리 길드장…….”

일본 최고의 화이트 길드 료사기리.

그 조각은 길드장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아주 멍청하진 않네.”

상엽은 그제야 사실을 밝혔다.

“내가 처리했어.”

데스문의 최고 난적을 상엽이 처리한 것이다.

“자. 이제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상엽의 강렬한 눈빛이 켄사로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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