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가정석은 치욕을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작전을 포기하겠습니다.”
“이유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김대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쇼케이스는 성공적이었다. 20명의 간부들은 김대진의 의도대로 상엽의 힘에 압도되었다.
더불어 변종 사냥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앞으로 국가 방위가 어떻게 흘러 갈지를 예상치 못하는 바보는 없었다.
이는 곧 김대진이 더욱 강한 실권을 쥐게 된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많은 간부들이 쇼케이스가 끝나자 김대진과 친분을 쌓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후유증도 있었다.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무력감에 빠졌다.
상엽과 함께 작전의 중심에 있던 가정석은 자신의 팀이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해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에 김대진은 마음이 아팠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나?”
“네. 그렇습니다.”
“해 보겠나?”
“저희 팀 모두 받아 주시겠습니까?”
가정석은 지독한 무력감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최고의 사냥꾼이 되어 주게.”
최고의 특전사 팀이 특수치안대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박광신이 상엽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현실을 보여 주고 싶어서. 변종 사냥꾼을 너무 쉽게 생각하더라고.”
“자신감까지 상실해 버렸다니 안타깝네. 그래도 특수여단 제1팀은 훌륭한 군인들인데. 국방부의 자랑이기도 했고.”
“의지가 있다면 다시 성장하겠지.”
“그러고 보면 동생도 많이 어른스러워졌어.”
박광신은 진짜 동생을 대하듯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형. 한국의 갓코인 유저가 그렇게 약해?”
“많이 약해. 아마 우리 길드가 무너지면 한국은 아수라장이 될 거야.”
“그 정도야?”
“잠깐 기다려 봐. 보여 줄 게 있으니까.”
박광신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서랍을 열더니 서류를 가지고 왔다.
“형답지 않게 웬 서류야?”
“디지털에는 남기지 않은 서류거든. 오직 이 문서로만 존재하는 서류야.”
“그럼 무슨 대단한 금고 같은데 넣어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집무실은 안전해. 나 외에 비서와 길드장밖에 안 들어오니까.”
상엽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동생은 특별한 존재니까.”
실제로 박광신의 집무실은 손님이 들어올 수 없었다. 접객실이 따로 있었고, 집무실처럼 꾸며 놓은 곳도 있었다.
“이걸 봐. 이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서류는 100장이 넘었다.
모든 서류는 한 장짜리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100장이 모두 다른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갓코인 범죄자가 이렇게 많아?”
그가 보고 있는 서류는 흑점에서 처리한 갓코인 범죄자들의 목록이었다.
“소멸시킨 자들의 서류야. 확실한 증거와 피해자가 있는 경우지. 지금 조사 중인 사건이나, 증거가 확실하지 않아서 처벌을 보류 중인 자들까지 합치면 500명이 넘어.”
“음. 생각보다 많네.”
그런데 상엽이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그게 겨우 1년짜리 자료야.”
“뭐? 1년에 이렇게 많다고?”
“지금 우리 길드가 없으면 치안유지가 안 돼. 범죄자들은 빠르게 성장을 하거든.”
상엽도 이 부분은 알고 있었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 그 100명 중에 3명 이상을 죽인 연쇄살인범만 20명이야.”
이미 흑점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구나. 변태 싸이코패스 도깨비라는 놈.”
“우리가 주목하는 놈이야.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아.”
도깨비는 상엽이 꼭 잡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야 오명진 죽음을 위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원이 많이 부족해. 이 말은 한국의 치안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라는 거야. 이게 한국 갓코인 유저의 현실이야.”
“그런데 기술력과 생산력이 높으니까 좋은 먹잇감이라는 거지?”
“맞아. 그리고 지리적인 이점도 있어. 한국을 중심으로 일본을 먹으려 할 테고, 다음은 혼란에 빠진 중국이겠지.”
미국이 무너지고 당연히 세계 제일이 될 줄 알았던 중국은 꽤 복잡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안전지역과 최고등급 위험지역이 혼재한 탓에 정책이 갈리기 시작했고, 중앙 군대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는 13성도가 거의 다른 나라처럼 각각 움직이는 실정이었다.
“중국은 갈라질 확률이 높아. 갓코인 유저들이 끼어들기 좋은 상황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한국을 장악하는 게 엄청난 힘이 될 거야.”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큰 이슈가 되었다.
“침략만 막아 내면 결국 내가 이 나라를 지킬 거야.”
특수 치안대가 성장한다면 상황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상엽은 알고 있었다.
‘특수 치안대의 대장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겠지.’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상엽은 이 부분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난 형이 좋아. 진심이야.”
그냥 이렇게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
“응?”
“4층에 잠깐 들렀다 가. 최근 동생이 안 와서 상상력이 굳어지는 거 같아.”
“그건 안 되지. 난 형의 상상력이 좋거든.”
상엽은 그렇게 말하며 4층으로 갔다.
4층은 암흑의 공간이었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비서처럼 따라붙은 여자가 손뼉을 치자 바닥에 두 줄의 긴 LED등이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화려한 불빛으로 꾸며진 침대가 있었다.
“1스테이지입니다. 총 5스테이지까지 존재합니다.”
1스테이지의 상대는 아슬아슬한 수영복을 걸친 여성이었다.
“행운을 빕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형. 사랑해.’
상엽은 박광신이 만든 게임을 시작했다.
* * *
상엽이 박광신의 상상력을 경험하고 빌딩을 나설 때였다.
만족스러운 경험의 노곤함을 느끼며 빌딩 광장을 걷고 있는데, 거슬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광장과 이어진 인도의 가로수 뒤였다.
그곳에 햇빛을 담은 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빌딩을 보고 있는 여인을 보며 상엽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묘한 여자네.”
160이 조금 넘는 신장에 발목을 덮는 하얀 원피스를 입어서 차가운 느낌이 더욱 강했다.
푸른 눈빛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피부는 화장을 한 것처럼 하얀색이었다.
‘사람이 아닌가?’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본인은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주인님!
특이한 여인을 먼저 파악한 이는 추종자였다.
-위험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네킹처럼 서 있던 여인이 오른손을 들었다.
콰릉!
100미터 공중에 차가운 느낌의 하얀빛이 모였다.
‘뭐야?’
상엽은 빛을 확인하는 순간 여인을 향해 뛰었다.
어떤 의도를 가졌든 그 목표가 박광신의 빌딩이라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상엽은 스트라이크까지 시전하며 속도를 높였고 결국 들어 올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툭.
여인은 저항하지 않았다. 상엽의 손에 붙들린 채로 파란 눈동자에 하늘을 보기만 했다.
콰릉!
번개처럼 떨어진 빛이 상엽을 향했다.
상엽은 감히 맞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빛은 흥분한 추격자처럼 상엽을 쫓으며 바닥을 터트렸다.
정돈된 광장의 보도블록들이 번개의 충격에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습격이라니. 상황은 간단해졌네.’
물러서던 상엽은 생각을 바꾸고 전진을 택했다.
‘잡는다.’
상엽은 파이어스의 망치를 꺼내 들었다.
‘심판.’
거대한 해머가 여인이 만든 빛과 충돌했다.
쩌엉!
빛을 흡수한 해머가 공기를 찢는 진동을 일으키더니 함께 소멸해 버렸다.
쾅!
이로 인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가로수들이 부러졌고 주차된 차마저 뒤집어졌다.
충격파에 휩쓸린 사람들이 도로를 뒹굴었다. 주변의 혼란이 극에 달해 갔다.
쾅!
그때, 또 한 번의 굉음이 터졌다.
‘잡았다.’
상엽은 그렇게 확신했다. 망치가 정확히 여인의 옆구리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치로 전달되는 촉감이 이상했다.
‘얼음?’
마치 단단한 얼음을 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음은 망치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하얀빛으로 부서지는 얼음 파편이 시야를 가릴 때, 얼음 여인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얼음을 방패 삼아 타격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얼음 여인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떠올랐다.
‘위험하다.’
상엽은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거리를 주면 안 돼.’
이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수십 개의 얼음창을 겨누고 있는 여인을 향해 달렸다.
팟! 팟!
얼음 창들은 잠복을 끝낸 살쾡이처럼 상엽을 향해 튀어 나갔다.
‘팔각 대시.’
얼음이 몸에 닿기 직전, 상엽의 몸이 지그재그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단숨에 얼음의 위협을 돌파한 상엽은 다시 한 번 여인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챙!
처음과 같은 느낌이었다.
‘고스트 체인.’
상엽은 부서지는 얼음 파편의 중앙으로 유령 사슬을 던졌다.
아홉 줄기의 사슬이 얼음 여인을 덮쳤다.
‘잡았다.’
상엽은 손끝을 통해 뭔가가 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이봐. 얼음 아가씨. 한국이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야.”
얼음 여인의 허리에 고스트 체인이 감겨 있었다. 가시로 인해 고통을 느낀 얼음 여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무표정보다 훨씬 예쁘네.”
은발의 얼음 여인은 그 말을 듣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고스트 체인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이 급속도로 확산되며 상엽의 손까지 접근했을 때, 상엽은 등을 타는 한기를 느꼈다.
“귀찮은 아가씨네.”
상엽은 체인을 소멸시키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 하늘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우박?’
정확히는 얼음 못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짜 위험한 여자네.’
상엽의 머리에 드바란의 투구가 소환되었다. 고스트 실드로 몸을 보호한 상엽은 멈추지 않고 얼음 여인을 향해 달렸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
얼음 여인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함정.’
상엽은 이를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고스트 실드.’
그는 정면으로 고스트 실드를 겹겹이 쌓았다. 순간 얼음 여인 몸에서 거대한 얼음 톱니바위가 튀어나왔다.
몸을 세로로 가르고 나오는 섬뜩한 모습에 상엽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 잡아야 돼.’
위협을 느끼면서도 상엽은 멈추지 않았다.
쩌엉!
고스트 실드가 얼음 톱날에 의해 단숨에 잘려 나갔다. 그 순간 상엽은 몸을 옆으로 세우며 그대로 돌진했다.
얼음 톱날이 아슬아슬하게 얼굴 앞으로 지나갔고 결국 상엽이 얼음 여인을 들이받았다.
쿵!
충격을 받은 여인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깨끗하던 하얀 원피스는 고스트 체인에 의해 허리 부분이 붉게 물들었고, 바닥을 구르는 바람에 먼지도 가득 묻었다.
상엽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여인을 향해 다시 한 번 도약했다.
그렇게 여인의 등 뒤로 내려섰을 때, 어디선가 또 다른 위협이 느껴졌다.
바닥이 갈라지며 불꽃이 솟아오른 것이다.
‘위험!’
강렬한 열기를 느낀 상엽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다잡은 사냥감을 놓치진 않았다.
그는 열기를 감안하며 손을 뻗었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잖아.”
상엽은 결국 여인의 뒷덜미를 잡으며 몸을 띄웠다. 덕분에 발아래에서 튀어 오른 불꽃에 하체가 휩쓸리고 말았다.
피부가 검게 그을리며 진한 고통이 느껴졌다.
“우린 참 뜨거운 인연인 거 같네.”
상엽은 공중에서 여인의 뒷목을 눌렀다. 여인이 정신을 잃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방향을 바꿔 전장을 한창 벗어난 곳에 내려섰다.
“저 녀석이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반쯤 부러진 가로수 뒤에 있는 사내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그는 상엽을 향해 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 빌딩 안에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뛰쳐나왔다.
흑점 길드원들이었다. 이를 본 붉은 머리의 청년은 이를 갈더니 물러났다.
“동생. 괜찮아?”
상엽은 박광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된 거 같은데?”
폐허가 된 광장의 모습은 앞으로 한국에서 일어날 일의 예고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