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루나 엔터테인먼트.
마루나는 기획실장이라는 이름으로 일했다.
대표는 아버지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운영을 하는 건 그녀였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사업이었고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업계 선두권으로 성장을 시켰다.
-검은 돈으로 일어선 집안.
마루나에겐 이런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대부업계의 사람이었고 이로 인해 항상 불쾌한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녀가 연예 기획사에 집착한 것은 이런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20살이 되던 해.
그녀의 아버지는 장난감을 사 주듯이 성인이 된 기념으로 루나 엔터테인먼트를 차려 주었다.
아버지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5년 만에 회사를 업계 탑으로 올려놓았고, 지금도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재벌의 자식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부탁 때문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사업에 도움도 되는 터라 그녀는 아버지가 만든 자리에 참석했고,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하지만 그녀의 빼어난 외모와 사업 수완이 빛을 발하면서 점차 멤버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와 잠자리를 원하는 남자들의 속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상류사회에 들어서던 그녀는 설악산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파티에서 상엽을 만나게 됐고 항상 폭탄을 안고 사는 삶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납치되어 지하실에 던져지는 신세였다.
쿵!
마루나도 3단계 갓코인 유저였다.
하지만 실전경험이 전무했고 훈련을 한 적도 없다.
신체는 조금 강화를 했지만 스킬이라고는 사업에 관련된 세 가지 스킬과 비밀스런 한 가지 스킬이 전부였다.
-가둔테스의 이모션 아이. 감정의 눈.
원하는 대상의 감정이 색으로 표시된다.
-신의 소통.
4단계 – 모든 언어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라이라의 신뢰의 속삭임.
5단계 – 상대가 강한 신뢰를 가지게 한다.
이것이 사업에 관련된 스킬이었고 그녀가 은밀히 가진 비밀 하나가 있었다.
-서큐버스 퀸의 침묵을 위한 환희.
상대에게 쾌락을 선사하며 기력을 빼앗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써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 만족하는 비밀스러운 스킬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가진 스킬들은 전투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냥 죽이기는 아까운데.”
그녀를 지하실에 던진 한 사내가 말했다.
다섯 명의 사내는 쓰러진 마루나를 둘러싸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중국인.’
마루나는 이를 알아차렸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킬 정보는 아니었다.
납치 과정에서 찢어진 베이지색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가려 주지 못했고, 오히려 자극적인 모습이 되었다.
다섯 명의 납치범들은 즐겁다는 듯이 몸을 가리려는 마루나를 내려다봤다.
“흐흐.”
사내들은 본능에 충실하며 서서히 마루나에게 다가갔다.
그때, 쓰러졌던 마루나가 손을 묶어 놓은 수갑을 풀며 근처에 있던 사내에게 손을 뻗었다.
툭.
하지만 그녀의 손은 공중에 멈추고 말았다. 목표가 되었던 사내가 다가오는 손을 간단히 잡아냈다.
“계속 그렇게 반항해. 그래야 더 재미있으니까.”
촤앗!
사내는 그녀의 소매를 잡아 그대로 찢어 버렸다. 소매가 그대로 뜯어지며 그녀의 하얀 팔이 드러났다.
“다들 그만.”
사내들이 점차 마루나에게 접근할 때,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 한 명이 짧은 명령을 내렸다.
순간 사내들은 로봇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며 물러났다.
“할 일이 남았을 텐데.”
명령을 내리는 사내는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을 덮고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근육질이었다.
“즐기는 건 그 후에.”
“네! 대장!”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힘차게 대답을 한 후에 다른 자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곧바로 지하실에 마련된 고리에 사슬을 걸기 시작했다.
얇은 사슬은 열 겹이나 마루나의 몸을 묶었고, 결국 그녀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 일어선 상태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첫 사슬은 끊어 냈던 그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수록 얇은 사슬이 더욱 죄어 왔다.
“보기 좋군.”
털보 사내가 저항을 포기한 마루나 앞에 섰다.
“정상엽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라.”
털보는 강압적인 말투로 명령했다. 마루나는 입이 자유로웠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버텨야 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말해 봤자 그들이 만족할 정보는 없어.’
그게 밝혀지면 그녀는 죽는다.
‘비참하게 죽을 거야.’
그냥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서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들이 이를 증명했다.
‘제발 빨리 좀 와라.’
그때, 털보의 거친 손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여성의 본능을 침범하는 손길에 마루나의 몸이 떨렸다.
“더 거칠게 다뤄 줄 수도 있다. 절대 죽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루나는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인간은 스스로를 죽이게 된다. 몸이 죽을 수 없으니 정신이 먼저 죽는 거지.”
털보의 손이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그런데 넌 몸으로도 충분할 거 같군.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곁에 있던 사내들이 웃었다.
“역시 대장은 이길 수가 없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미칠 때까지 괴롭혀 주지.”
“빨리 그렇게 해 주고 싶은데.”
중국어로 더 심한 말들이 쏟아졌다.
마루나는 처음으로 신의 소통이라는 스킬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했다.
“진짜라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겠군.”
털보는 한 발 뒤로 빠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내들이 접근했다.
‘제발…….’
수많은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들의 입김이 느껴졌다.
‘제발. 제발.’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나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제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쾅!
지하실 천정이 무너지며 뭔가가 떨어졌다.
‘대비하고 있었다.’
마루나는 사내들을 보며 이 사실을 알았다.
‘난 결국 미끼였어.’
본능에 충실하던 것과 달리 사내들은 바람처럼 떨어진 물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사내들이 원하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머!’
천정을 뚫고 떨어진 물체는 해머였다.
사내들이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엄청난 기파가 몰려왔고 폭발이 일어났다.
지하실 벽이 완전히 무너지며 위로 있던 5층 건물 전체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지만 한 명은 폭발에 휩싸여 소멸하고 말았다.
대장까지 다섯 명이 건물 밖으로 대피했고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들 앞에 섰다.
“니들은 뭐야?”
나타난 이는 상엽이었다.
“왔군.”
“또 중국인이야? 정말 글로벌하게 귀찮네.”
상엽은 살아남은 다섯 명을 보았다.
‘암살자는 아니고.’
파악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여자를 구하러 온 게 아니었나?”
털보가 무너진 건물을 보며 말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 위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별로.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라서.”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군. 무모하게 나타나다니 이런 미끼가 통할 줄은 몰랐어.”
“너 바보냐?”
상엽은 그들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뢰를 받을 때는 좀 더 생각을 했어야지.”
상엽의 비난에 털보 사내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미끼를 쓰려면 내가 찾을 수 있도록 했어야지.”
“뭐라고?”
“그렇게 무작정 납치해 가면 내가 찾을 수가 없잖아. 난 사람 찾는 데 재주가 별로 없어서 말이야.”
상엽의 말이 끝날 때쯤, 주변에 있던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부탁을 좀 했거든.”
흑점의 길드원들이 다섯 사내를 포위했다. 그중에는 길드장 강청도 있었다.
“아저씨 형. 원래 다 내 건데 나눠 주는 거야. 알지?”
“도움은 자네가 먼저 요청했을 텐데.”
“쳇. 나 지금 허세 부리는 중인데 좀 도와주면 안 돼?”
“아. 그건 내가 미안하군. 사과하지. 사내의 자존심은 목숨과 같은 법인데.”
상엽과 강청의 대화에 털보 사내는 이빨을 드러냈다.
“한국 애송이들 주제에!”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러 인물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싸움에 나서는 이는 상엽과 강청뿐이었다.
나머지는 오히려 뒤로 물러나며 전투와 관련 없는 위치를 잡았다.
-도주하는 자만 막는다.
흑점 길드원들에게는 이런 명령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그들의 집중력은 상엽과 강청에 못지않았다.
-분명히 봐 둬라.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테니.
그들에게 상엽과 강청은 현실을 인지하고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좋은 교과서였다.
쾅! 쾅!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길드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을 보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지켜볼 만큼 대단한 전투였다.
상엽이 대장을 포함한 두 명. 강청은 세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청과 상엽이 밀리는 듯했다.
하지만 전투에 작은 변화가 생기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상엽이 상대가 아닌 바닥을 때리며 협공을 하던 사내의 중심을 무너트린 것이다.
그리고 상처를 감안하며 결국 한 명을 처리했다.
이에 질세라 강청도 허벅지를 스치는 공격을 내버려두고 한 명의 목을 베어 냈다.
그때부터 기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야. 털보. 또 웃어야지. 왜 화가 난 표정이냐?”
“닥쳐라.”
“수염 뒤에 숨겨진 표정이 궁금한데. 그러려고 수염 기른 거지?”
상엽의 말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염은 상엽 씨가 더 많은데.”
소곤거리는 길드원들의 말이 상엽의 귀에 정확히 들렸다.
“에이씨. 허세 좀 부리는데 도와주질 않네.”
최근에 면도를 하지 못해 상엽의 얼굴에도 수염이 가득했다.
“빨리 끝내자.”
결국 그 분노는 털보가 감당해야 했다.
부하를 잃고 개인전투가 되자 털보는 상엽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힘을…….’
털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졌다.
그동안 그가 했던 전투경험은 오히려 싸움에 방해가 되었다.
막고 반격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파워였다.
막는 순간 중심이 흐트러졌고 더욱 수세에 몰렸다.
무리를 해서 피하려 하면 폭발이 뒤따랐으며 중요한 순간에 이상한 녀석이 나타났다.
유령추종자는 그가 조금이라도 중심을 잡으려 하면 어김없이 신경을 건드렸다.
툭.
겨우 등을 긁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신경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났다.
상엽의 망치가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 때였다. 그는 늦었다고 판단하며 두 개의 도끼로 정면을 막았다.
그게 실수였다.
상엽은 기회라 생각하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쾅!
엄청난 힘에 털보의 몸이 30미터나 밀려났다. 그리고 중심을 잡기 전에 상엽이 스트라이크로 따라붙었다.
털보가 이를 악물며 반격을 준비하려 할 때, 상엽이 방향을 바꾸며 털보를 그냥 통과해 버렸다.
대신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해머가 떨어졌다.
쿵!
해머가 덮치기 전에 털보가 몸을 날렸다. 바닥을 굴러서 겨우 이를 피했을 때, 그의 눈에 또 한 번 망치가 보였다.
금빛 망치는 결국 털보의 머리를 때렸다.
쾅!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청과 싸우던 사내들도 쓰러졌다.
“아저씨 형. 내가 빨랐어.”
“인정하네. 하지만 난 셋이었지.”
“난 대장이 있었어.”
“대장이라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법은 없지.”
“형 참 얄미운 거 알지?”
“광신이도 한 번씩 그렇게 말하더군.”
둘은 각자가 처리한 사내들의 전리품을 챙겼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 인사는 받아 주겠네.”
강청은 그 말을 남기고 길드원들과 함께 돌아갔다.
모두가 돌아간 후, 상엽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앞에 섰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이 잔해들을 치워 냈다.
“야. 일어나.”
상엽은 잔해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마루나를 발견했다. 그녀도 3단계 유저인 만큼 무너진 잔해에 깔려 사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
상엽을 본 마루나의 얼굴근육이 떨렸다. 그러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그리고 갑자기 상엽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음이 더욱 커졌다.
이에 상엽이 그녀를 내버려둔 채 말했다.
“유기견을 잃은 주인의 마음 같은 거야. 오버하지 마.”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상엽의 냉정한 말에도 마루나의 목소리는 낮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