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누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퍼즐 조각 같은 정보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직 명확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은 것이 보였다.
“오명진. 결국 그 자식이 중심에 있다는 건데.”
상엽은 당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강차연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안경철을 정찰하는 데 집중했다.
‘오명진과 안경철이 관계가 있을까?’
안미영과 안경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터라 다양한 변수가 있었다.
‘하루 남았어.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안경철은 극도의 불안 증상을 보였다.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제자리를 서성이거나 손톱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한 번은 가족의 전화에 신경질을 내며 끊기도 했다.
‘하루 남았어. 그 시간 안에 분명히 뭔가를 할 거야.’
상엽이 이미 집까지 들어왔고 그를 보호하던 자들은 하루 뒤면 떠나게 된다.
결국 안경철은 바쁘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이는 거의 없었다.
‘버려진 거 같은데.’
안경철의 눈빛에 독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뭐든지 하게 되어 있지.’
잠복의 지루함이 사라졌다. 안경철이 다급해지면서 상엽도 바짝 집중했다.
결국 안경철은 스스로 서재의 금고를 열었다.
‘드디어.’
금고 안에서 그가 꺼낸 것은 세 권의 장부였다. 보통 이런 장부는 뇌물을 건넨 사업가들이 보관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장부를 서재의 책상 위에 놓고 가죽 의자에 몸을 묻으며 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장부를 열지 않고 오히려 천장을 보았다.
‘최후의 수단이라는 거지.’
죽음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악마가 봉인된 석판을 만지듯이 이를 악물며 장부를 잡았다.
그리고 그 장부가 공개되었을 때, 제일 먼저 놀란 사람은 상엽이었다.
‘사진첩이었군.’
숫자가 적힌 장부가 아니라 사진들이 정리된 사진첩이었다.
그리고 상엽은 유령 추종자를 통해 그 사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비밀 파티.’
비밀 파티를 몰래 찍은 사진들이었다. 숨어서 찍은 듯 가려진 부분이 많았다.
사내들의 사진을 중점적으로 찍었고 몇몇 여자들이 자연스레 배경으로 찍혔다.
다섯 명의 남자와 열 명의 여자들이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채로 파티를 즐겼고, 진한 스킨십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침대 위의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부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자를 덮치는 장면도 있었다.
‘더럽게도 놀았네.’
문제는 그 사진에 담긴 인물들이었다.
‘안미영도 있네.’
사진에는 안미영도 있었다. 상엽은 정신을 집중해서 봤지만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안미영이 이 사진을 신경 쓴 것도 이 때문이겠지.’
드디어 명확한 증거 하나를 찾아냈다. 저 사진첩만 확보할 수 있다면 비밀 파티에 참여한 모든 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상엽은 잠시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 경찰 아니잖아.’
증거를 확보하는 건 경찰들의 방식이었다.
‘얼굴만 기억하면 돼.’
유명 인사들이라면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상엽은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명확히 기억하려 애썼다.
‘확보할 수 있으면 확보하고.’
가장 좋은 건 사진첩을 확보해서 강차연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있으면 해당 인물들을 협박하기도 좋았다.
‘일단은 충분해.’
안경철이 떨리는 손으로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는 순간이 상엽에겐 중요한 퍼즐 조각을 찾는 시간이었다.
“후우.”
사진첩을 모두 넘긴 안경철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는 펼쳐 놓은 사진을 다시 핸드폰으로 찍어 어디론가 전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분 후,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의 전화를 거부하던 이들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오. 날 살려 주시오. 그럼 이 사진은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없어질 테니.”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했다.
“정상엽, 그자만 없어지면 되지 않겠소?”
그가 살아남는 방법.
그것은 상엽이 죽어야 가능했다.
“하루 남았소. 그 안에 그자가 사라지지 않으면 난 이 사진을 모든 언론사에 뿌리겠소.”
안경철은 사건 당사자들 모두에게 같은 말을 했다.
‘일곱 명.’
상엽은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정찰을 끝냈다.
‘날 죽이는 게 제일 빠를 테지.’
오히려 그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서로 원하는 게 명확해졌네.”
더 이상의 정찰은 의미가 없었다. 안경철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고 남은 건 협박을 받은 다른 이들이 할 것이다.
상엽은 강차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내일까지만 좀 숨어 있어. 하루면 돼.”
-무슨 일인데?
“내일 말해 줄게. 가연수도 함께 숨어 있어. 절대 들키지 않는 곳에 있어.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알았어.
강차연은 상엽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깨닫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 누군가 날 죽이러 온단 말이지?”
분명히 그들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상엽은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 * *
시드는 이번 명령이 불쾌했다.
한국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차에 명령이 떨어졌다.
-정상엽을 제거하라.
명령이 바뀐 것이다.
“이것 참 유감이네. 거짓말쟁이는 싫은데.”
상엽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팀장님.”
수하 제이슨의 뒤로 아홉 명의 전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엽이 눈에 걸렸던 그들은 이번 명령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으로 괜찮지 않습니까?”
“그런가?”
시드는 핸드폰으로 전송된 명령을 다시 보았다.
“유감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걸었다.
“시드입니다. 이번 명령에서 전 빠지겠습니다.”
그의 말에 수하들의 표정까지 변했다.
“이미 보고드렸지 않습니까? 서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합의했다고.”
-명령을 수행하라.
“안 합니다. 30분 내로 명령 철회 안 해 주시면 전 사표 쓰겠습니다.”
시드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하들을 보며 말했다.
“30분만 기다려. 알았지?”
그는 웃었지만 수하들은 웃지 못했다.
* * *
자정이 막 넘은 시간이었다.
상엽은 양평의 변종 지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는 제한 없이 싸워 보고 싶은 의도도 있었지만 강이라는 도주로가 있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깊은 밤은 블랙 유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상엽에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상대도 블랙 유저면 소용이 없지만 그럴 확률은 반반이었다.
-왔습니다.
추종자가 상대를 발견했다.
“일단 돌아와.”
숨을 곳이 없는 들판에서 상엽은 상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도 당당하게 정면에서 나타났다.
“구면이네.”
상엽은 상대를 알아보았다.
안경철을 지키던 경호원들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시드는 어디 있어?”
상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죽여라!”
“인사도 안 하네.”
상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동희가 남긴 음료였다.
폭발적인 힘을 느낀 상엽은 다가오는 상대들을 확인했다.
상대의 숫자는 10명이었다. 시드는 보이지 않았고 스포츠머리의 서양인이 리더 역할을 맡았다.
사각 턱에 신경질적으로 찢어진 눈매를 가진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상엽은 평소와 달리 뒤로 물러나며 상대가 포위망을 펼칠 수 없도록 했다.
‘내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가 됐을 테고.’
상엽은 그들의 정보에 없는 스킬을 준비했다.
팔각 대시.
이를 위해 상대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 여자군.’
리더를 포함한 8명은 포위망을 형성하려 달려들었고, 두 명의 여자는 후방에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지팡이를 들며 대기했고, 다른 한 명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저 여자 맞지?’
-맞습니다.
추종자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능력자.
확인을 마친 상엽이 바닥을 차며 방향을 바꿨다.
정면에 있는 리더를 향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준비를 하던 그는 몸을 옆으로 틀었고 다른 이들은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다.
‘팔각 대시.’
그런데 상엽의 몸이 리더가 있던 자리에서 갑자기 두 번이나 꺾였고 그 자리를 지나 후방으로 진입했다.
상엽과 눈이 마주친 여자의 동공이 커졌다. 그리고 그녀 주변으로 보호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늦었어.’
스트라이크.
상엽의 몸이 갑자기 사라지며 그녀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콰쾅!
완성되지 않은 보호막이 산산이 부서졌고 추종자를 막던 여자의 몸도 함께 흩어졌다.
상엽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곁에 있던 다른 여자를 노렸다.
‘전쟁터에서는 여자 남자 없어. 이게 남녀평등이지.’
쾅!
지팡이를 든 여자는 회복을 전문으로 하는 유저였다. 힐러라고도 부르는 여자는 전투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사들이 그녀를 구할 틈도 없이 상엽은 힐러의 몸을 부숴 버렸다.
“유령아, 이제 놀아.”
두 명을 처리했지만 상대도 만만치는 않았다. 힐러가 죽는 순간 냉정한 판단을 내려 포위망을 만들었다.
‘꽤 하는 놈들이야.’
등이 간지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상엽은 상대가 손을 쓰기 전에 선공에 나섰다. 그의 선공은 특이하게도 망치로 바닥을 찍는 것이었다.
쾅!
흙먼지가 그의 몸을 가렸을 때였다.
‘고스트 체인.’
상엽의 고스트 체인이 뱀처럼 바닥을 스치며 사방으로 퍼졌다.
10개의 고스트 체인에 두 명의 발목이 걸렸다. 그중의 한 명은 상처를 감안하며 재빨리 물러났고 다른 한 명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채챙!
사슬에서 가시가 돋으며 한 명의 발목을 찢어 버렸다.
‘반응이 다르다.’
상엽은 이 공격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블랙과 화이트가 섞여 있군.’
아직 정확한 비율은 알 수가 없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상엽은 팔각 대시로 빠르게 움직였다.
짧은 동선이었고 결국에는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반응이 느린 자들이 있었다.
‘일단 두 명.’
상엽은 화이트 유저를 목표로 삼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공격이 먼저였다.
수십 개의 스킬들이 상엽을 향해 날아왔다.
고스트 실드로 버틸 것은 버티고, 위험한 공격은 완전히 피하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전부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뭐야?’
특이한 스킬이 있었다.
하늘에서 부서진 빛이 수백 개의 칼날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리더가 사용하는 스킬로 하나하나가 꽤 강력한 위력이 있었다.
고스트 실드를 지붕처럼 만들어 버티는 사이, 엄청난 속도의 암기들이 날아왔다.
방향을 바꾸는 암기부터 채찍처럼 날아와 칼날이 되는 스킬도 있었다.
츳! 츳!
상엽의 피부에 붉은 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강하다.’
스킬들을 모두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또다시 칼날의 비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상엽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날 비를 뿌린 리더를 향해 뛰었다.
챙! 챙!
수십 개의 칼날이 상엽의 몸에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치명상은 없었다.
투구와 갑옷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엽이 상처를 감안하며 돌진하자 리더는 맞서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정면충돌은 피해라.
그가 상엽에 대한 자료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가 본 자료에 상엽의 본능까지 적혀 있지는 않았다.
쾅!
폭발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팔각 대시로 방향을 트는 순간 스트라이크를 사용한 것이다.
한 명의 화이트 유저가 그 한 방에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심판.’
상엽은 뒤를 쫓는 자들의 머리 위로 심판을 떨어트렸다. 상엽의 등을 노리던 자들은 소리에 반응하며 즉각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다른 상대와 달리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지만 포위망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자.’
포위망을 풀어낸 상엽은 그때부터 최고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킬들이 다시 날아왔지만 포위망을 벗어난 상엽은 충분히 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스킬을 퍼붓는 전사 앞에 갑자기 유령 추종자가 나타났다.
쿵.
추종자는 전사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머리가 돌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시선이 흔들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갑자기 밝은 빛을 뿌렸다.
시선을 모으고 빛으로 시야를 멀게 한 것이다.
‘똑똑한 놈.’
상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접근했다. 그런데 그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드는 자가 있었다.
이들의 리더였다.
‘넌 좀 있다가.’
상엽은 스트라이크로 속도를 높여 리더를 무시했다. 하지만 수하들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상엽의 접근을 예상한 그들은 일제히 정면을 향해 공격 스킬을 펼쳤다.
감각이 뛰어난 자들이라 그 공격은 꽤 정확했다.
‘쳇.’
상엽은 이 기회를 그냥 날릴 수가 없었다.
결국 상처를 감안하고 돌진을 강행했다.
쾅!
상엽의 어깨와 옆구리에 제법 큰 상처가 남았다. 대신 두 명의 전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상엽은 처음 발목을 다쳐 전열에서 이탈한 자를 향해 달렸다.
쾅!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하던 자까지 처리를 한 상엽은 급히 정령의 손길을 꺼내 상처에 뿌렸다.
옆구리의 상처는 갑옷으로도 막지 못할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아찔했어.’
살이 완전히 꿰뚫린 상처였다. 조금만 안쪽이었다면 내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다행히 다시 싸우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난 너희들이 참 좋아.”
남은 전사는 이제 겨우 네 명이었다.
“코인도 많고, 조각도 많고. 와 줘서 고마워.”
전사들은 이를 갈았다.
“역시 사람 잡는 게 최고야.”
상엽은 인간 사냥감들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