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돌아가라.
“너 혹시 다른 말도 해?”
-꺼져라.
“이 자식이!”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변종한테 욕먹으니까 더 열받는데.”
“상엽아,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이건 예상을 못 한 일이라서.”
담비의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신기한 걸 떠나서 묘한 경계심이 든 것이다.
‘특별한 놈이야.’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특이한 유산을 흡수했겠지.’
가장 일반적인 결론이었다. 그런데 동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사람이 변신한 걸까?”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스킬이 존재하는 이상, 다양한 가능성이 있었다.
“야, 불꽃 담비. 너 사람이냐?”
상엽은 붉은색의 담비를 불꽃 담비라 불렀다.
-난 인간이 아니다.
“아니라는데?”
상엽이 동희를 보며 말했다.
“아, 그럼 아닌가 봐.”
둘은 담비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릴 그냥 보내 주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 않아?”
상엽은 폐허가 된 땅을 가리켰다.
쓰러진 나무와 흩어진 풀들이 전쟁터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가라 생각하지. 너희들이 침략했지만 공격은 우리가 먼저였으니.
“쿨하네.”
-더 이상의 희생이 싫을 뿐이다.
“변종과 인간, 서로 공생할 수는 없어. 그건 너도 알잖아.”
-우린 인간을 죽인 적이 없다.
“뭐?”
-늑대와 우리가 너희들 눈에는 같은 변종이겠지만, 우린 서로 다른 종족이다.
개와 고양이, 늑대와 곰, 담비와 표범.
인간에겐 같은 변종이었다. 다만 어떤 변종이 더 위험한지 구분할 뿐이었다.
-너희들이 침입하지 않았다면, 우린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쁜 놈.
“이게!”
다시 튀어 나가려는 상엽을 동희가 말렸다.
-우리는 모든 변종들을 굴복시키고 인간까지 몰아낼 힘이 있었다. 내가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면 수많은 인간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상엽은 설악산의 생태계를 이미 보았기에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담비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설악산 전체를 점령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상엽아, 이번에는 그냥 돌아가자.”
동희는 이 싸움이 찜찜했다. 평소에는 상엽의 말을 따르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상엽아.”
“이길 수 있어.”
“알아. 그런데 내가 찜찜해서 그래.”
결국 동희는 상엽을 설득했다.
“그냥 가자. 왠지 건드리면 안 될 거 같아.”
그는 힘이 아니라 분위기를 말했다. 그리고 상엽을 흔드는 결정적인 말을 했다.
“진짜 산신령일 수도 있잖아.”
“뭐?”
상엽은 그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담비를 다시 보았다.
“알았어. 네가 싫다니까 어쩔 수 없지.”
상엽은 동희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야, 불꽃 담비. 너 운 좋았다. 동희한테 감사해.”
-네 친구의 결정이 너희들을 살렸다.
스스스.
바람이 불었고 상엽은 이를 명확히 느꼈다.
-이름 없는 신의 반지.
바람을 느끼는 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바람에 엄청난 살기와 비린내가 느껴졌다.
‘뭐야?’
상엽의 의문에 유령 추종자가 즉각 반응했다. 그리고 결과를 말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유령 추종자는 짧게 사진처럼 자신이 본 것을 전했다.
3만 마리의 변종이 나무와 숲에 숨어서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설악산에 자리를 잡고 있던 변종들이 담비 대장의 명령을 받아 움직인 것이다.
“너 꽤 똑똑하네.”
-돌아가라. 너희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상엽이 대답하기 전에 동희가 먼저 나섰다.
“이거 가져. 친구들 죽여서 미안해.”
동희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 유물 조각 다섯 개를 놓았다. 변종이 이를 흡수한다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상엽아, 가자.”
동희는 여전히 아쉬워하는 상엽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대장의 옆에 있던 담비 다섯 마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담비들은 유물 조각을 챙기더니 대장 옆으로 돌아갔고 그때까지 동희와 상엽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현명한 인간은 현명한 지혜를 가질 자격이 있지.
대장 담비의 말이 끝나자 새 한 마리가 동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내려가는 길로 안내를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담비들은 모두 우거진 숲으로 돌아갔고 포위했던 변종들도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다.
“산신령 담비라…….”
상엽은 담비가 떠난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짹짹!
새가 안내를 위해 날아오르자 상엽도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잔잔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그들을 안내하던 새는 물 위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바위 위에 앉았다.
그러더니 부리로 바위를 쪼기 시작했다.
동희는 새가 가리키는 바위를 그대로 뽑아 계곡 밖으로 가지고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바위였다. 그런데 동희가 겉면을 두드리자 공허한 울림이 들렸다.
“속이 비었어.”
“그래?”
상엽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바위 곁으로 왔다.
“부숴 볼게.”
동희는 주먹으로 바위를 내려쳤다. 그러자 바위는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흩어진 조각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어?”
나타난 것은 손바닥 크기의 수첩이었다. 오래된 양피지를 줄로 엮어 놓은 형태였다.
동희는 책을 들어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우와!”
“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왜 놀란 거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상엽은 동희가 들고 있는 수첩을 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방법이 떠올랐다.
“너 신의 소통 몇 단계야?”
“나? 3단계.”
대답을 하던 동희도 상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5단계면 글자도 볼 수 있지?”
“이건 아마 보일 거야. 그 녀석들이 쓰던 언어니까.”
“넌 역시 똑똑해.”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헤헤.”
동희는 담비 대장의 선물을 품 안에 챙겼다.
“진짜 산신령이었나 봐.”
“쳇, 기분 나빠. 내가 산신령인데.”
둘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 * *
“일단 코인을 좀 모아야겠어. 이걸 꼭 읽고 싶어서.”
동희는 수첩을 읽기 위해 코인을 모으기로 했다. 설악산에서 모은 유물 조각들을 감정하는 게 먼저였고 부족하면 브로커를 통해 음식을 좀 더 팔 생각이었다.
“이거 챙겨 둬.”
동희는 음료수 10병을 상엽에게 주었다.
“알았어. 조심해.”
상엽은 동희를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진 않았다.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는데.”
그가 설악산 사냥을 한 기간은 닷새였다. 그동안 모은 코인은 13만 코인이었다.
담비를 대량 학살한 것이 코인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유물과 유산 조각은 전부 동희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다른 이득은 없었다.
코인 중에는 세 명의 부잣집 도련님과 그들의 사냥꾼을 처리하고 얻은 블랙 코인도 섞여 있었다.
그가 동희에게 유물 조각을 전부 넘겨준 것은 자신이 많은 코인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일단 강화부터 하자.”
상엽은 설악산 사냥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상엽이 선택한 강화는 블랙 상점 신체 개조였다.
머리, 몸, 팔, 다리를 모두 6단계로 강화할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상엽은 처음으로 한국의 중급 블랙 상점을 찾아갔다.
“여긴 또 뭐야?”
네일아트 숍이었다.
강남의 네일아트 숍은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였고 피부 미용과 마사지까지 함께 하는 곳이었다.
-아르마
간판을 확인한 상엽은 숍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가게 내부에 남자라고는 상엽이 유일했다. 당연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성 전용입니다.”
“아, 그런가요?”
“일행이 있으시면 휴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20대 후반의 여성은 손님이 불쾌하지 않게 허리를 숙이며 안내를 시작했다.
상엽은 일단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서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는 세 명의 남자가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여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 좀 만나러 왔어요.”
상엽은 명함을 안내원에게 건네며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30대 초반에 정갈한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이 상엽 앞에 섰다.
“이쪽으로 오시죠.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건물 3층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여성은 문만 열어 주며 자신은 옆으로 비켜섰고 상엽은 안으로 들어섰다.
“김 실장, 이분이 나가실 때까지 다른 손님은 모셔 오지 마세요.”
“네, 사장님.”
명령을 내리는 이는 20대 후반에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이었다.
170이 조금 넘는 신장에 하이힐까지 신었고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옆트임이 있는 정장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의 채워지지 않은 단추 사이에는 붉은 점이 또렷한 목걸이가 걸려 있어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이연이에요.”
“정상엽입니다.”
오이연은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테이블이 있는 소파로 상엽을 안내했고 자신은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아 턱을 괸 채로 상엽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것 참 불편한 자리네요.”
“여성 전용에 홀로 들어온 남성. 떨리지 않아요?”
상엽은 그 말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최하급 블랙 상점이었던 정신과 의사 도지연이었다.
오이연은 도지연에 못지않은 야릇한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상엽 씨, 만나고 싶었어요.”
“저를요?”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나 보네요.”
상엽은 그 말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젠 상점들도 정상엽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아직은 일본과 한국 정도지만 양쪽 상점을 모두 이용하는 상엽에겐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한 라면집 사장을 먼저 만난 건 섭섭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다행이네요.”
오이연은 천천히 다리를 꼬며 상엽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어느새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일본의 하얀 벌레들을 처리하고 오셨으니 작은 선물 정도는 드려야겠죠?”
“선물이라면…….”
오이연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상엽의 곁에 앉았다.
“전 강한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도발적인 말과 행동에 상엽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 위로 오이연의 붉은 입술이 닿았다.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입을 맞추더니 상엽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제가 쑥스러움이 많아서요.”
“그러게요. 무지 내성적이네요.”
“제 매력이죠.”
상엽도 더 이상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오이연은 은색 테이블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그 손을 잡았다.
* * *
늦은 밤.
-주인님.
잠을 자던 상엽은 유령 추종자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강차연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
상엽은 실크 이불을 걷어 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유령 추종자의 이어지는 말에 표정이 변했다.
-많이 다친 것 같습니다.
“뭐? 지금 어디야?”
상엽은 위치를 가늠하고 곧장 현관문을 나섰다.
“누나!”
강차연은 한 손으로 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엽은 일단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녀를 눕힌 상엽은 중급 그레이 상점의 지혈 진통제인 정령의 손길을 꺼냈다.
그리고 배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을 치웠다.
배꼽 옆의 피부가 갈라졌지만 다행히 내장까지 손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상엽은 상처에 약을 뿌리고 다시 강차연을 살폈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격렬한 전투를 했는지 옷 대부분이 찢어져 있고, 기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힘을 전부 다 쓰고 온 거야.’
상황을 파악한 상엽은 일단 유령 추종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쫓아온 놈 없는지 확인해.”
유령 추종자가 정찰에 나섰고 상엽은 그녀를 최대한 편하게 눕혀 놓았다.
다행히 정령의 손길이 빠르게 피부를 재생시키면서 그녀의 고통도 줄어들었다.
“누나, 어떻게 된 거야?”
강차연은 겨우 눈을 뜨고 말을 하려 했다.
“됐어. 일단 좀 쉬어.”
상엽이 수건이라도 가져오려고 일어서는 순간,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연수…….”
“가연수? 연수가 왜?”
“위험해…….”
“뭐?”
강차연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어떻게든 소식을 전했다.
“연수가 위험…….”
상엽은 그 말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에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여, 연수는 국회 의원 안경철, 집에 갔어.”
“거긴 왜?”
“함정이야…….”
상엽은 중요한 정보를 모두 들었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한테 맡겨.”
“부, 부탁…….”
강차연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