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뚫고 들어온다.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되며 내장을 끊어 내는 금속을 원망하게 된다.
그 후에야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내장이 꿰뚫리고 속이 뒤집어진 채로 죽어 가는 기분.
“헉!”
상엽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렷한 기억이었다.
회생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이처럼 악몽으로 재생되었다.
“후우.”
상엽은 침대에서 벗어나 물을 마셨다.
“아! 물맛 좋다!”
그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커튼을 젖혔다.
한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한강 변의 고급 아파트였다.
오상식이 그를 위해 마련해 준 집이었다.
매매가만 40억이 넘는 아파트였지만 오상식은 음료수를 건네주듯 열쇠를 주었다.
-서류 정리는 제가 다 해 두었습니다.
이젠 유물과 유산뿐만 아니라 자산 관리까지 시작했다.
‘봄이구나.’
긴 겨울이 끝났다.
“나도 21살이네.”
상엽은 햇빛을 반사하는 물결을 보며 지난 2년을 되돌아봤다.
“열심히 했어. 결국 살아남았고.”
소장의 집에 살던 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아파트를 가지게 되었고, 평범하던 몸은 이제 괴물처럼 변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거야.”
사쿠라 길드와의 전투로 인해 상엽은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이것은 상엽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그들의 힘을 흡수한 거야.”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모아 놓은 힘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셈이었다.
“누군가는 또 그렇게 할 테고.”
사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결과였다. 분명히 이를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할 거야.”
어쩌면 상엽이 모르는 곳에서는 이미 벌어졌을 수도 있다.
“누나 사건도 다시 조사해야 돼.”
이미 모든 유산 조각은 오상식에게 넘겼고, 안타깝게도 유물 조각은 하나도 없었다.
네 명의 추적자들은 모든 유물을 흡수한 상태에서 코인도 전부 소모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 짜낸 것이다.
결국 상엽이 얻은 것은 11개의 유산 조각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상식은 유산 조각을 보더니 유물 못지않게 좋아했다.
-가치가 큰 것들입니다.
상엽은 오상식을 믿고 그냥 맡겨 두었다.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상엽이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상엽은 집에서 길게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의 피로 때문인지 그 시간이 지겹지 않고 오히려 행복했다.
“좀 더 쉬자.”
정오가 될 때까지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자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지금 갈게.
“집들이 선물은 없어도 돼.”
-알았어. 꼭 사 갈게.
전화를 건 이는 강차연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홀로 사건을 계속 추적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실종된 여자의 행방을 알아냈다.
“선물은 내가 줘야지.”
상엽은 강차연이 오기를 기다렸다.
강차연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5만 코인짜리야.”
상엽은 강차연에게 5만 코인짜리 유물 조각을 내밀었다.
“나 때문에 사냥도 못 했을 텐데.”
“틈틈이 했어.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냥 받아. 이걸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결국 강차연은 유물 조각을 받아 들었다.
“지금 찾으러 갈 건데. 바로 갈래?”
“응.”
상엽은 이미 외출 준비를 끝냈고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안녕! 멋진 오빠!”
“오랜만이네.”
“우리 언니랑 아무것도 안 했지?”
“사랑싸움은 취미 없어.”
뒷좌석에서 반가움과 경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여인은 강차연의 정보원 가연수였다.
“문신이 생겼네.”
상엽은 가연수의 손날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했다.
“어머, 나한테 관심 있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잖아.”
“나한테 첫눈에 반한 남자 많아.”
“난 아니야.”
상엽과 가연수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강차연은 차를 출발시켰다.
“내가 그 여자 찾아내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마워. 이 일이 끝나면 꼭 보답할게.”
상엽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강차연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답 안 해도 돼. 연수 뒷수습해 준 걸로 치면 내가 훨씬 더 많으니까.”
“그래? 그럼 편하게 받을게.”
“언니! 정말 이럴 거야?”
상엽은 가연수의 활달한 목소리를 듣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연지는 잘하고 있겠지?’
한국에 와서 그녀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 않았다.
‘동희도 걱정되고.’
동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엽은 세 명이 약속한 인터넷 메신저에 글을 남겨 놓고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안미영. 지금은 이름을 바꿔서 송유나로 활동하고 있어.”
“활동?”
“화류계에 있어. 흔히 말하는 텐프로. 꽤 잘나가는 접대부가 된 거지.”
“어떻게 찾아냈어?”
“그건 연수한테 물어봐.”
가연수는 뒷좌석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자랑하듯이 말했다.
“스폰서를 두고 알선까지 하던 여자애가 갑자기 평범하게 살아갈 리가 없잖아. 그래서 포인트를 조사했지.”
“포인트?”
“강남 명품 매장, 미용실, 피부과. 거기 고객 명단 빼내서 나이 맞는 애들 찾아다녔어.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뭐. 결국 찾아냈지.”
간단한 말과 달리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거야?”
“숙소. 아파트를 샀더라고. 정확히는 스폰을 받은 거지만. 일단 자세한 건 만나서 물어봐야지.”
차는 20분쯤을 달려, 강남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꽤 비싸 보이는데?”
“30억짜리야. 스폰으로도 흔치 않은 금액이지.”
“그만큼의 매력이 있다는 건가?”
강차연과 정상엽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가연수가 함께 오려 했지만 강차연이 이를 막았다.
“차에서 기다려.”
“언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찾아냈는데!”
“그래서 여기까지 같이 왔잖아.”
강차연의 눈빛에 가연수는 결국 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하더니 차로 돌아갔다.
“들어가자.”
말과 달리 강차연은 아파트의 입구가 아니라 베란다가 보이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상엽도 그 이유를 알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어디야?”
“14층.”
강차연이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상엽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꽉 잡아.”
상엽은 그대로 힘껏 몸을 날렸다.
엄청난 속도로 솟아오른 상엽은 단숨에 14층 베란다의 난간을 잡았다.
“유령아, 열어.”
유령 추종자가 유리를 통과해서 자물쇠를 풀었다. 덕분에 그들은 조용히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여자 한 명이 자고 있습니다.
오후 1시.
시계를 확인한 상엽은 침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특별히 잠겨 있지 않아 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
침대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은색 실크 이불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유령아, 미리 말해 줬어야지.”
-무엇을 말입니까?
추종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야.”
상엽은 설명을 그만두고 몸을 돌렸다.
“누나가 좀 데리고 와 줄래?”
“알았어.”
상엽은 거실의 소파에서 기다렸고 잠시 후에 놀란 안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지 마. 앞으로 놀랄 일이 더 많을 테니까. 미리 말해 두는데 널 죽이는 건 여기 들어오는 것보다 훨씬 쉬워.”
‘역시 멋있어.’
결국 안미영은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대충 옷을 입은 후에 거실로 나왔다.
‘음.’
상엽은 그녀를 보고 30억 아파트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예쁘네.’
방금까지 자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외모였다. 연예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외모였고, 몸매 역시 매력적이었다.
“앉아.”
“누구세요?”
“정다혜, 알지?”
“네?”
예상치 못한 이름에 안미영의 동공이 커졌다.
“알고 있다고 눈으로 대답했고. 이제 그 일에 대해서 대화를 좀 해 볼까 하는데.”
안미영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엽은 유령 추종자를 그녀 옆에 세워 두었다.
“악!”
그녀의 비명은 길지 않았다. 강차연이 그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잘 들어. 저 녀석이 네 몸에 들어가면 기억을 전부 읽을 수 있어. 그럼 아주 간단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과정이 아주 힘들어. 나 말고 너한테 말이야.”
상엽은 파이어스의 망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상황 파악 같은 건 하지 마. 그냥 살고 싶으면 사실대로 말하면 돼.”
변종 사냥꾼임을 확인한 안미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말해 봐. 정다혜가 죽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차연이 안미영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그녀는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디부터 말해 드려요?”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두 명의 습격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전부 다.”
“다혜를 처음 만난 건 미담 엔터테인먼트 연습실이었어요. 제가 다혜보다 두 달 빨리 연습생이 됐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진 않았어요. 정확히는 라이벌 관계였어요.”
안미영은 정다혜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습생 정다혜는 기획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뛰어난 외모에 독할 정도의 연습 벌레라서 관계자들은 금방 데뷔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정다혜가 이런 평가를 받기 전에, 똑같은 평가를 받던 이가 안미영이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라이벌이 되었고 모든 평가에서 서로를 이기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그 경쟁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왜지?”
“이하나가 나타났거든요.”
“이하나?”
상엽은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표정을 본 안미영은 뜸 들이지 않고 결론을 내려 주었다.
“걸그룹 릴리스. 그 이하나예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걸그룹 중의 하나였다.
데뷔곡부터 빅히트를 쳤고 그 후로도 인기 차트 1위를 놓치지 않으며 5년째 최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하나는 예능에 주로 출연하며 가장 친근한 이미지를 가진 멤버였고 20개가 넘는 CF를 찍으며 대한민국 최고 연예인의 자리에 있었다.
“그 이하나가 왜?”
“걸그룹 릴리스에는 원래 저와 다혜가 함께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하나가 나타나면서 계획 자체가 무산되었죠.”
이하나는 국회 의원 정득수의 딸이었다.
뛰어난 외모에 재능도 뛰어났지만 성격까지 그렇진 못했다.
“릴리스 데뷔는 무산되었고, 원래 멤버로 예정됐던 4명은 이하나에게 똑같은 제안을 받았어요.”
“제안?”
“스폰서 제안요.”
상엽이 들은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이하나는 우리를 전부 망치고 싶어 했어요. 전 이하나의 말대로 돈을 택했고, 다른 두 명도 함께 비밀 파티에 갔어요. 그리고 이하나의 마지막 목표가 다혜였어요.”
상엽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듣기만 했다.
“이하나가 저에게 협박을 했어요. 다혜를 비밀 파티에 데리고 가라고. 전 분명히 거절했는데 이상하게 파티로 가는 차에 다혜가 타고 있었어요.”
사건이 있던 그날.
안미영을 포함한 네 명의 19살 소녀는 고급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안미영은 귓속말로 승용차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 주었고, 정다혜는 차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기사는 끝까지 차를 세우지 않았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기사가 다혜에게 전화를 바꿔 줬어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혜는 그 뒤로 조용히 별장으로 갔어요.”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소파를 움켜쥐었다. 소파의 가죽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지만 안미영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30분쯤 별장에 있었어요. 술을 마셨고 아저씨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다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어요.”
안미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상엽이 강한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남은 말을 했다.
“그게 다혜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에요. 그 이후로 보지 못했고 소식만 들었어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상엽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강차연을 보았다. 강차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로 판단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상엽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질문에 나섰다.
“경찰에서 진술을 했다던데.”
“기획사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끝이라고 했거든요. 물론 그 후로도 끝이 나긴 했지만.”
“끝나다니?”
“이하나가 저에게 많은 스폰서를 소개해 줬어요. 전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아저씨들과 놀아 줬고요. 제 나이에 가질 수 없는 돈을 주더라고요. 그걸로 엄마 수술도 했고, 동생 대학교 등록금도 줬어요.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안미영은 여전히 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제는 스스로 선택해 화류계에서 프로가 되었다.
“이하나란 말이지?”
“TV에서의 이미지는 전부 가짜예요. 지금 릴리스 멤버가 어떻게 선택됐는지 아세요?”
“말해.”
“이하나에게 노예처럼 아부하고 심부름을 해 줬던 아이들이에요. 이하나가 뽑은 거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안미영은 뭔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나요?”
“거짓말을 했으면 언젠가는 죽게 될 거고, 전부 사실이면 없었던 일처럼 그냥 넘어갈 거야.”
“그럼 저는 살겠네요. 전부 사실이니까.”
상엽은 안미영의 눈빛을 보았다.
압도적인 상엽의 눈빛에 안미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당당하려 애쓰는 모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상엽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