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네 명이 두 명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해머를 버린 늑대 인간은 변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광기에 물든 늑대 인간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접근전을 펼쳤다.
쾅! 쾅!
건물의 기둥이 늑대 인간의 손아귀에 산산이 부서져 나갔고 손톱에 긁힌 피부에서는 검은 피가 흘렀다.
손톱 끝에 있는 독성이 순식간에 중독을 일으킨 것이다.
“크흐.”
늑대 인간은 집요하게 두 명을 쫓았다.
그리고 결국 료타의 심장에 늑대 인간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으아!”
홀로 남은 카케루는 괴성을 지르며 늑대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슬을 주먹에 감고 근접전을 펼쳤다.
옳은 선택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결과로 이어졌다.
늑대 인간의 손톱이 카케루의 목을 그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카케루의 몸이 연기로 흩어졌고 더 이상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상엽은 좀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크흐.”
광기에 젖은 상엽에게 또 한 명의 생존자가 보였다.
아이리였다.
모든 이가 떠났지만 아이리는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엽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근처로 다가왔다.
지금 그녀는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상엽의 광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이리가 다가오는 순간, 상엽이 손톱을 세우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때, 뭔가가 상엽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외쳤다.
-주인님!
그 외침에 늑대 인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늑대 인간은 다시 인간이 되었다.
“헉, 헉.”
상엽은 숨을 몰아쉬었다.
땀으로 인해 온몸이 젖었고 머리를 지배하는 두통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주인님.
“고마워.”
상엽은 추종자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이거 위험하네.”
광기의 외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만 지금처럼 이성을 잃을 수도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이리는 다시 상엽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널 죽일 뻔한 것만 빼면 말이야.”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눈빛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가득했다.
“진짜야. 다음에 내가 싸울 때는 절대 내 옆에 있지 마.”
“다음이 또 있다는 거네요.”
어느새 그녀의 표정에는 공포가 지워졌다. 그녀는 오직 상엽만 보고 있었다.
“그런 눈빛 할 때가 아니야. 약속해. 다음에는 절대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당신이 그러라고 하시면 그럴게요.”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좋아. 정말 널 죽일 뻔했어.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거야.”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죽는 거보다 못하게 살았을 테니까.”
아이리는 상엽을 안아 주었다. 그녀의 품은 지친 몸을 달래 주는 효과가 있었다.
-주인님. 유산…….
“분위기 파악해야지.”
-죄송합니다.
상엽은 좀 더 아이리의 품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제 끝났어.’
사쿠라 길드와의 전쟁이 끝났다.
‘좀 쉬고 싶어.’
그 생각을 할 때였다.
-주인님! 적입니다!
상엽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챙겼다.
그리고 아이리의 손을 잡고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등장이 빨랐다.
폐허가 된 건물 안으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망할.’
정확히 서른다섯 명.
그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다.
‘화이트 길드.’
상엽은 그들의 무기를 보며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료사기리.”
제1 화이트 길드의 전투 요원들이 상엽을 포위한 것이다.
“아이리, 내가 길을 열 테니까 무조건 뛰어.”
“차라리 같이 싸울게요. 전 괜찮아요.”
아이리도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 때문에 상엽이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 여기 가만있어.”
상엽은 자신의 정면에 있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단단한 체구에 사각 턱을 가진 사내였다.
사쿠라 길드의 길드장이었던 테라다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좀 더 체구가 작았다.
“여긴 우리 료사기리의 구역이다.”
낮고 굵은 목소리에는 위압감이 있었다.
일본 최고 길드의 길드장.
그 이름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싸움이 끝난 뒤의 습격인데 그딴 이유가 뭐 필요해?”
상엽은 파이어스의 망치를 꺼냈다.
“내가 넌 데려간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상엽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때였다.
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나타난 사내들과는 상반된 무기를 든 자들이었다.
블랙 길드 데스문.
그들이 곧장 료사기리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자네들이 치사하게 블랙 유저 한 명을 괴롭힌다고 해서 말이야.”
꺽다리에 여유로운 웃음을 가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데스문 길드장 켄사로.
그는 얼굴살이 극히 적은 편이라 표정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진한 비웃음을 띤 켄사로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두 돌아간다.”
결국 료사기리의 길드장은 후퇴를 결정했다.
상엽을 앞에 두고 실력이 비슷한 길드끼리 사생결단을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데스문 길드장 켄사로는 그럴 수 있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워낙 저돌적이고 예상을 뒤엎는 인물이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이미지였다.
결국 료사기리의 길드원들이 모두 물러났다. 그러자 켄사로는 입맛을 다시며 상엽에게 다가왔다.
“나 먹는 거 아니야.”
“큭큭.”
“웃긴 놈도 아니고.”
“역시 훌륭해.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할까?”
켄사로는 친구를 대하듯 상엽에게 물었다.
“거절한다면?”
“거절하면 거절하는 거지. 술은 혼자 마시면 되고.”
“좋아. 한잔해.”
“크큭! 역시 재미있는 친구야.”
그는 상엽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길드원들을 향해 외쳤다.
“자! 오늘은 내가 쏜다! 마음껏 마셔! 료사기리의 영역 안에서 미친 듯이 마셔 보는 거야!”
데스문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길드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를 하면서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길드장을 이겨 보지!”
“이기면 내가 길드장이야!”
“좋아! 덤벼! 길드장 자리 놓고 한판 붙자!”
그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그 틈을 타서 아이리가 나섰다.
“제가 대접할게요.”
“응?”
“바로 앞에 술이 있잖아요.”
로비에서 전투가 펼쳐진 바람에 식스헤븐으로 통하는 문은 박살이 났고 건물 벽에도 금이 갔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충분했다.
“제가 모실게요.”
켄사로는 상엽을 보았다.
“난 상관없어.”
“좋아! 소문으로 듣던 식스헤븐이라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야!”
그곳에 모인 사내들은 일제히 식스헤븐으로 들어갔다.
30분이 흘렀다.
호출을 받은 캬바걸들과 웨이터들이 나타나면서 그들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실컷 마신다더니?”
“우리 애들은 내가 지켜야지. 생각이 짧은 놈들이라.”
말과 달리 데스문의 길드원들은 흥청망청 술을 들이켜지 않았다.
적당히 기분만 맞췄고 일부 인원은 건물 주변에서 자리를 지켰다.
료사기리의 습격을 대비한 것이다.
‘꽤 괜찮은 녀석이네.’
겉과 달리 적정선을 넘지 않는다는 게 상엽의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렇고. 혼자서 사쿠라를 잘라 버린 소감이 어때?”
“수학 숙제 끝낸 기분이야.”
“크큭!”
켄사로는 상엽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유쾌하게 웃었다.
“난 네가 아주 마음에 드는데. 우리 길드에서 함께 놀아 보는 건 어때?”
“안 돼.”
상엽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왜지?”
“내가 길드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가야 할 곳이 있어.”
“한국에 있는 흑점을 말하는 건가?”
“맞아.”
“거기보다 우리가 훨씬 나을 텐데.”
“아니. 넌 절대 못 이기는 게 있어.”
그 말에 켄사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경쟁심이 일으킨 본능이었다.
“내가 절대 못 이기는 게 뭐지?”
상엽은 그의 눈빛을 받아 내며 당당히 말했다.
“상상력.”
“뭐?”
상엽은 켄사로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짧게 박광신이 가진 상상력을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켄사로는 패자의 얼굴을 했다.
“이길 수 있겠어?”
켄사로는 고개를 저었다.
“광신이 형 상상력의 끝을 보기 전에 다른 길드는 못 가. 이해하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솔직하네.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그 후로 켄사로는 더 이상 상엽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확인해야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일본은?”
“다시 올 계획은 없어.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지만.”
“오늘처럼 말인가?”
상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저 녀석이 꼭 알아야 한다고 하더군.”
켄사로는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안경을 끼고 키가 작은 모범생 느낌의 사내였다.
“안녕하세요, 정상엽 씨. 요다라고 합니다.”
“혹시 나한테 정보를 주던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정보는 고마웠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보답할게.”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요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엽에게 다가와 물었다.
“언제 한번 길드로 초대하겠습니다. 그것만 응해 주시면 보답은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초대?”
“그냥 저녁 식사일 뿐입니다.”
요다는 어리숙한 외모와 달리 말을 할 때는 또박또박 중요한 단어에 힘을 주었다.
“너 좀 치사하다. 결국 날 언제든 한 번 부르겠다는 거잖아.”
“생각보다 똑똑하시군요.”
“뭐?”
상엽은 웃음을 참는 켄사로를 보며 물었다.
“나 이 녀석 때문에 열받는데?”
“나도 자주 그래. 그런데 어쩌겠어? 저 녀석이 우리 길드의 보물인데.”
“쳇.”
상엽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요다는 조건을 바꿨다.
“상상력 말입니다.”
“뭐?”
“제 상상력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요다는 상엽의 취향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데스문의 명함입니다. 언제든 가까운 지부를 찾아가면 원하는 걸 들어드릴 것입니다.”
“서로 교환하자?”
서로에게 한 번씩 도움을 요청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다.
“뭐 좋아. 그런데 그건 너희들이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니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엽 씨가 와 준다는 약속입니다.”
“무슨 뜻인데?”
“료사기리를 견제하기 좋은 카드라서요.”
요다는 상엽의 성향을 파악했는지 사실대로 말했다.
“아, 너 그런 타입이구나. 비난하는 거 아니야.”
“누구나 장점은 따로 있는 법이니까요.”
“좋아, 약속해. 그 정도는 받았으니까.”
상엽은 블랙 길드 데스문과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 증표로 요다가 내민 검은 명함을 받았다.
“역시 화끈하군.”
“원래 더 화끈한데 오늘은 신중한 편이야.”
“큭큭! 그럼 한 잔 정도는 화끈하게 마셔야지!”
켄사로는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상엽도 질세라 한 잔을 크게 들이켰다.
“크크! 기분 좋아! 새로운 친구를 만나다니!”
흥이 오른 켄사로는 다시 잔을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든 길드원들이 함께 일어섰다.
“자! 블랙 유저만 술잔 들어! 하얀 벌레들은 꺼지고! 한바탕 놀다 가자! 데스문!”
“데스문!”
“데스문!”
엄청난 함성이 식스헤븐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상엽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나 블랙 유저 아닌데…….’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은 있는 법이다.
* * *
상엽은 아이리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사투를 벌였던 그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고 아이리는 그런 상엽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아이리는 상엽을 꼭 안고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상엽은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고마워.”
침대에 기대앉은 상엽은 그녀가 내미는 커피를 마시며 마지막 남은 졸음을 쫓아냈다.
“천천히 마셔요. 뜨거운 커피예요.”
“이 정도는 뜨거운 걸 못 느껴.”
“강해지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네요.”
“그건 맞아.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거든.”
“그 일 중에 저도 포함되나요?”
“아니. 넌 좋은 일이지. 강해지면 좋은 일도 생기거든.”
아이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상엽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부드러운 머릿결과 향기에 상엽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머무는 것도 좋을 거 같네.”
“정말요?”
아이리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해요.”
“진심이었어.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
“언제 가실 건가요?”
아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말이 나왔다. 아이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괜찮아요. 다시 기다리면 돼요.”
“미안해. 이것도 진심이야.”
상엽은 커피를 내려놓고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웃으면서 보내 드리고 싶어요.”
“내가 웃는 방법이 좀 과격한 건 알 텐데.”
“괜찮아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자.”
상엽은 아이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하루를 줄게.”
“네?”
“내 시간 중의 하루를 너 마음대로 써.”
결국 아이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가장 행복한 선물이네요.”
“내일까지야. 아낌없이 써.”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리는 상엽에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