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상엽은 마다하지 않고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상엽의 품에 안겼고, 은근히 은밀한 부위에 접촉을 유도했다.
박광신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수영장을 떠나자 여성들의 유혹은 더욱 강해졌다.
‘여기가 천국일 거야.’
상엽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충분히 즐겼다.
그리고 꿈같은 시간이 끝나자 박광신은 와인 한 잔을 들고 상엽 앞에 섰다.
“제가 기회를 잘 활용한 것 같군요.”
“완벽했어.”
“약속드리지요. 우리 길드에 들어오시면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 것입니다.”
박광신은 적절한 타이밍에 영입을 제안했다. 이에 상엽은 그를 향해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내가 화이트 유저 친구들이 있어. 알다시피 화이트 유저인 척하고 다녔거든.”
박광신은 상엽이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들을 꼭 처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게 흑점 길드에서 유일하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블랙 길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돈은 물론이고, 원하신다면 권력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 이 둘을 가지면 다른 부분은 자연히 따라올 것입니다.”
“달콤하네.”
“실제로는 더욱 달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엽 씨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야?”
“흑점 길드 소속임을 분명히 하시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상엽도 이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제안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흑점 길드에서는 그만큼 상엽이 절실했다.
‘길드장과 비슷한 실력이다.’
길드의 최고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상엽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아까 예쁜 누나들하고 놀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멈춰야 한다고.”
박광신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상엽의 말은 계속되었다.
“길드는 못 들어가는데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마음에 걸렸어. 화이트 유저와 이미 친구가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만날 거라서 말이야.”
“그 끝이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잖아. 그런데 말이야.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하니까,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다 싶더란 말이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이런 경험도 하게 해 주고.”
“그렇습니까?”
상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백섬은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블랙 유저라고 날 제거하려고 했다는 게 아주 짜증 나고 열 받아.”
“그들의 특징이지요.”
“내가 백섬과 싸우면 어차피 너한테도 도움이 되잖아. 그리고 그 틈에 어떤 이득을 취하든 난 관여하지도 않을 거고.”
박광신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그들과 싸울 생각이십니까?”
“날 죽이려는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 대신 증거를 좀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네 말만 듣고 거대 길드와 싸운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박광신으로서는 손해가 없는 장사였다.
‘균형만 깨트리면 우리가 처리할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
‘어차피 혼자서 백섬을 전멸시킬 수는 없어. 하지만 조금만 도와줘도 큰 타격을 주는 건 가능해. 나머지는 우리가 전면전으로 처리할 수 있어.’
백섬과 흑점은 지금까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처리한다. 이자를 희생시키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박광신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확보한 증거는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다면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오시죠.”
그가 상엽을 데리고 간 곳은 건물의 12층이었다.
그곳은 박광신의 개인 사무실로 보였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지만 집기는 분명 사무용품들이었다.
그는 한쪽 벽면을 채운 거대 모니터 앞에서 리모컨을 조작했다.
“드론으로 찍은 영상입니다.”
화면에 나타난 지역은 상엽과 박광신이 만난 곳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잠시 후에 일어난 일이 영상에 나왔다.
스무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자가 백섬의 길드장 김판종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투 요원들입니다. 20명이면 싸울 수 있는 길드원은 다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김판종이라, 이름도 별로네.”
“생긴 거나 말하는 건 더 별로입니다.”
박광신은 모니터에 김판종의 사진을 띄웠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음 증거 자료입니다. 제가 상엽 씨를 관찰한 것도 이 자료가 시작이었습니다.”
다음은 녹음된 파일이었다.
-백섬이 정상엽을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그럼 끼어들기라도 하자는 건가?
-김판종을 밀어주느니 차라리 정상엽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먼저 속이지만 않으면 뒤통수를 칠 자는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네. 백섬과 이미 함께하기로 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직접 겪어 보셨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자네는 더 이상 나서지 말게.
녹음 파일은 여기까지였다. 그중에 한 명의 목소리는 상엽에게도 익숙했다.
‘김대진.’
끝까지 상엽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이는 김대진 준장이었다.
‘그 아저씨, 의외로 의리가 있네.’
계급을 넘어서 그런 요청을 하는 게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엽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증거가 더 필요하십니까?”
“더 필요해. 그런데 내가 직접 알아볼 수도 있을 거 같아. 잠깐 기다려 줄래?”
“그러시지요.”
상엽은 고민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김대진의 이름을 찾아냈다.
“안녕, 군인 아저씨.”
-잘 지내고 있었나?
“준장 아저씨, 하나만 물어볼 게 있어요. 그냥 솔직히 대답해 주면 돼요.”
-말하게.
“백섬이 날 죽이려고 하는 게 사실인가요?”
김대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이네.
“고마워요. 제가 살아남으면 아저씨 의리에는 보답할게요. 조금 감동했거든요.”
-몸조심하게.
상엽은 전화를 끊었다.
“확인했어. 백섬 개새끼들이 날 죽이려고 한다네.”
“개새끼들이지요.”
“좋아. 이제 우리는 협력 관계가 된 건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길드 영입 제안도 언제든 유효합니다.”
“그건 됐고. 일 끝나면 한 번 더 부탁해.”
상엽이 무엇을 원하는지 박광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 강한 선물을 준비하지요.”
“여기서 더 강할 수도 있어?”
“제 상상력을 믿어 보시지요.”
박광신은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에 상엽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씨. 처음부터 형이라고 할걸.’
상엽은 다시 한번 고민했다.
* * *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춰도 당황하지 마시길.”
박광신은 상엽에게 스마트폰 하나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필요한 정보는 전부 이걸로 전달될 것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2층이던 엘리베이터는 곧 6층에서 멈췄다.
양옆으로 열리는 문은 마치 극장의 커튼처럼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서류철을 품 안에 안고 정갈한 정장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안경을 썼지만 깊은 눈을 가리진 못했고 타이트한 정장이 골반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도도한 표정에 어울리는 붉은 립스틱은 하얀 와이셔츠와 어울려 묘한 대비를 이뤘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러자 은은한 향수가 상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엽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3층에서 다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생머리를 길게 내린 사회 초년생 같은 느낌이었다.
귀여운 외모의 여인은 상엽을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상엽은 아쉬웠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3에서 2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1이 되면 내려야 돼.’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쿵.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더니 멈춰 버린 것이다. 두 여자는 놀란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상엽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상엽은 박광신이 했던 두 가지 말을 떠올렸다.
-제 상상력을 믿어 보시지요.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춰도 당황하지 마시길.
쿵.
엘리베이터의 불이 모두 꺼지고 파란 비상등만 켜졌다. 놀란 두 여인은 어느새 상엽의 품에 안겨 있었다.
상엽은 2에서 멈춰 버린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보며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형.”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 * *
-Heaven
천국.
김광신의 건물 이름이었다.
“착한 일 해서 꼭 다시 올 거야.”
상엽은 건물을 나서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몇 발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 바이크 한 대가 그에게 다가왔다.
바이크를 타고 온 이는 건물을 지키는 경비원이었다.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박광신이 그에게 바이크를 선물한 것이다.
“전 오토바이 못 타는데요.”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쯤 넘어지면 알게 된다고.”
경비원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키를 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받자. 서로 협력하는 거니까.”
상엽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오토바이에 앉았다. 그리고 박광신에게 받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정보라. 어디 볼까?”
상엽은 박광신에게 받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 안에 ‘백섬 명단’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다.
이를 누르자 백섬에 소속된 길드원의 명단이 나타났다. 이름을 누르면 정보와 함께 최종적으로 확인된 위치까지 보였다.
‘대단하네.’
실시간으로 정보가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30명 규모라서 별거 아니라고 판단했던 그는 시스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다.
‘갓코인 유저가 30명이라는 거지.’
거대 길드는 기업화가 된다는 뜻이고 이는 일반인들과 재력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서로 정보전도 치열하겠고.’
상엽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거 대상이 되었고 말이야.”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분명히 아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그는 복잡한 상황을 정리했다.
“날 죽이려는 놈들은 죽이고, 날 도와주는 사람은 도와준다.”
가장 깔끔한 정리였다.
“뒤에 상황이 변하면 또 똑같이 해 주면 돼.”
상황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확실히 보여 줘야 돼. 다시는 그딴 생각을 못 하게.”
차분하던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두고보자.”
그의 표정은 맹수를 닮아 있었다.
* * *
화이트 길드 백섬의 부길드장 천석강.
그는 신체 능력으로는 길드장 김판종에 필적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다만 타고난 성품이 잔인하고 집요해서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전투에서 워낙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터라 김판종은 그를 부길드장으로 임명했다.
“빌어먹을 회의. 그냥 잡아서 죽이면 될걸.”
못마땅한 회의를 꾹 참은 그는 불만을 토하듯 빠르게 차를 몰았다.
그의 스포츠카는 제한 속도를 넘어 곡예를 펼치듯 도로를 질주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 통화까지 시작했다.
“오피스텔로 한 명 보내. 저번처럼 이상한 애로 보내면 죽여 버릴 테니까 똑바로 해.”
그는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기를 조수석에 던졌다.
“그깟 어린 새끼 하나 때문에! 씨발!”
욕지거리를 쏟아 내는 그의 차는 시속 200킬로미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분을 달린 그의 차가 여의도로 들어섰을 때였다.
“어?”
그나마 속도를 조금 낮춘 그는 정면에서 뭔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시속 150킬로미터.
믿을 수 없게도 누군가 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천석강이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한 사내가 그의 차 앞에 나타난 후였다.
그 사내는 해머를 휘두르고 있었다.
콰쾅!
스포츠카가 폭발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사선으로 튀어 오른 스포츠카에서 한 사내가 탈출하듯이 공중으로 뛰쳐나왔다.
그 순간, 도로 위에 있던 사내가 다시 움직였다.
“스트라이크.”
사내의 몸이 공중을 향해 미끄러지듯 튀어 나갔다. 그리고 소음이 이어졌다.
쾅!
천석강은 모든 방어 능력을 동원했지만 스트라이크는 모든 것을 깨트렸다.
쿵!
천석강이 도로 위에 떨어지며 피를 토해 냈다.
그나마 강화 수준이 높아 즉사는 면했지만 이미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의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의 앞에 해머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정상엽…….”
천석강은 상대를 알아봤다.
무표정으로 나타난 상엽은 쓰러진 천석강을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 줘…….”
“지랄하네.”
상엽은 해머를 들어 올리며 쓰러진 천석강을 향해 말했다.
“전쟁 시작이다, 개새끼들아.”
쾅!
해머가 천석강의 머리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