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40대 중반의 성공한 연예계 사업가 오명진은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 받아.”
상엽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를 읽는 사이에 저택을 무너트렸다.
무너진 저택의 먼지는 그의 고급 양복을 회색으로 만들었고 패닉 상태에 빠트렸다.
“다 읽었어?”
상엽은 인사 대신 저택을 무너트리고 멍해 있는 오명진 앞에 섰다.
“누, 누구십니까?”
오명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억울하게 죽은 누나의 동생. 빨리 읽어. 죽이고 싶은데 꾹 참는 중이니까.”
그제야 오명진은 진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놀라기보다 점점 더 편안해졌다.
“다혜의 동생이었군요.”
정다혜.
누나의 이름에 상엽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한테도 아픈 기억입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오신 겁니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조금 전과는 상반된 느낌이었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차분한 대처에 오히려 상엽이 당황했다.
“알았어.”
피할 이유가 없었던 상엽은 오명진을 따라 대문으로 걸어갔다.
저택은 무너졌지만 담과 대문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문을 나섰을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경찰차와 경비업체의 차량이 거의 동시에 그들의 앞을 막았다.
“부자 동네라서 그런지 출동도 빠르네.”
세 대의 순찰차와 다섯 대의 경비업체 차량이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오명진은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철거를 요청했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경찰과 경비업체 직원들은 몇 번이나 오명진의 설명을 듣고서야 차를 몰고 사라졌다.
“가시죠.”
오명진은 상엽을 자신의 차량으로 안내했다. 고급 외제차였고 기사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근처의 카페였다.
그곳에서 상엽은 오명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고가 난 건, 다혜가 준비 중이던 데뷔가 무산된 일주일 뒤였습니다.”
상엽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경쟁 기획사에서 같은 컨셉의 그룹을 먼저 데뷔시키고 이슈가 되는 바람에 데뷔가 무산되었습니다. 다혜와 함께 세 명의 연습생이 그 일로 큰 상심을 겪었고요.”
오명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중에 미영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스폰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데뷔가 무산되자 다혜를 비롯해서 몇 명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지요.”
“제안이라니?”
“스폰서 말입니다. 돈 많은 사업가들과 계약 연예를 하는 거지요. 다혜는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사업가를 만나러 가는 날, 중간에 세워 달라고 난리를 친 모양입니다. 결국 다혜 혼자 내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근처에서 다혜가 발견됐습니다.”
상엽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명진은 아니었다.
“스폰서는 거절했지만 당시의 처지를 비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괴감이 컸던 걸로 생각됩니다.”
잠시지만 나쁜 선택을 했던 자신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말이다.
“다혜의 명예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회사 차원에서는 어떻게든 이 일을 묻어야 했습니다. 연습생과 스폰서의 스캔들에 자살까지 언급되면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장님께 청탁을 한 것입니다.”
앞뒤가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넌 이걸 어떻게 알게 됐어?”
“미영이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건을 인지하고 제일 먼저 미영이를 만났습니다.”
“그 애는 지금 어디 있는데?”
상엽은 자신이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기획사를 나갔습니다. 그 후로 연락한 적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때의 서류는 드릴 수 있습니다.”
오명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어.’
상엽은 혼란스러웠다.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정이 폭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기억을 읽는 스킬이라도 있었으면…….’
아쉬움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실제로 그런 스킬이 존재했지만 이는 코인을 주고 살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유산의 능력이었고 상엽은 레나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상엽이 처리한 여자는 유산을 모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류를 보내 달라고 하겠습니다.”
오명진은 상엽이 멍해 있는 동안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기로 자료를 받았다.
상엽은 이력서 같은 서류를 사진으로 찍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짓말이 아니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상엽은 홀로 카페를 나왔다.
문을 열자 시원한 겨울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나, 미안해. 이상하게 눈물도 안 나고 화도 안 나네.”
상엽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
“그런데 누나는 무지 보고 싶다.”
하늘을 보며 웃는 그의 웃음에 그리움이 가득 담겼다.
* * *
“잘 만든 각본 같은데?”
상엽에게 오명진의 이야기를 들은 강차연은 그렇게 평가했다.
“거짓말 같아?”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건의 진실은 아닐 거야.”
“어떻게 확신해?”
“각본은 완벽한데 소품이 안 맞잖아.”
“소품이라니?”
강차연은 상엽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 주었다.
“나무 위에 줄을 걸었어. 그렇게 우발적으로 내렸다면 줄이 있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19살 여자가 나무에 줄을 걸고 올라서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거든.”
“아…….”
“그렇다고 오명진이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어. 미영이라는 아이에게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그 여자애를 만나 봐야겠네.”
“그래야지. 사건 해결은 머리가 아니라 발로 하는 거니까.”
강차연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몰았다.
안미영.
그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강차연은 전화 몇 번으로 안미영의 주소를 알아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입 신고를 안 한 거 같은데.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
“찾을 수는 있어?”
“그럴 거야. 특별한 경우만 아니면. 대신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난 뭘 하면 돼?”
“조심하면 돼.”
“뭐?”
“상대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건드려 놨잖아.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몰라.”
상엽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반응이 나오면 누나 말이 맞다는 거네?”
“아니, 정확히는 그들에게 뭔가가 있다는 거지. 은밀한 파티는 많은 예상 중의 하나일 뿐이야.”
“수사라는 게 참 복잡하네.”
“그게 쉬우면 경찰이 왜 필요하겠어?”
“하긴.”
그들이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누나, 멋있어. 진심이야.”
“벌써 놀라지 마. 왠지 이번 사건은 놀랄 일이 많을 거 같으니까.”
“고마워. 이것도 진심이야.”
“그것도 아껴 둬. 두 번이나 살려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누나도 꽤 계산적인데?”
“받은 건 돌려줘야지.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상엽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럼 누나도 조심해. 나보다 누나를 먼저 노릴 수도 있어.”
“환영하는 바야.”
“역시 멋져.”
상엽이 그 말을 할 때, 전화기가 울렸다.
“어? 연지다.”
“여자 친구?”
“아니, 친구.”
“표정을 보니 많이 친한 것 같네.”
“부탁한 게 있었거든.”
상엽은 반가운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디예요?
“나? 서울이야.”
-저녁 같이 먹어요. 저도 방금 서울 왔어요.
상엽은 잠시 전화기를 떼고 강차연을 보았다.
“누나, 오늘 할 일은 끝났지?”
“어차피 안미영은 내가 찾을 거야. 넌 가도 돼.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마음 놓고 놀아.”
상엽은 그 말을 듣고 전화기 너머의 송연지에게 말했다.
“만날 수 있어.”
-장난해요?
“왜?”
-지금 나랑 만난다는데 누구 허락을 받는 거예요? 애인 생겼어요?
“애인은 아니고, 전직 경찰.”
-경찰? 오빠, 경찰한테 잡혔어요? 사고 친 거예요?
“만나서 말해 줄게.”
-알았어요.
그들은 잠시 실랑이를 하고서야 약속 장소를 정했다.
* * *
“여긴 처음 와 보네.”
“마음에 들어요?”
상엽은 잠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다.
천천히 흐르는 강가로 정돈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한강 공원.
타지 사람인 상엽은 복잡한 서울에서 발견한 여유로운 장소라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자, 앉아요.”
송연지는 상엽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잔디밭에 앉았다.
“그 여자는 누구예요?”
“경찰 누나야.”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내가 구해 줬어.”
간단한 대답에 송연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살려 주는 게 취미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상엽은 숨기지 않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누나가 관련되었다는 걸 듣게 된 송연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그 경찰은 예뻐요?”
“예쁘다기보다 멋져.”
“흥, 마음에 안 들어.”
송연지는 투덜거리며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 오늘 저녁은 이거예요.”
그녀가 꺼낸 것은 도시락이었다. 풍경과 제법 어울리는 저녁이었지만 상엽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내가 직접 만든 음식에 트라우마가 좀 있어.”
“저도 있어요. 그 변태 요리사 때문에.”
“그 말은 먹을 만하다는 거겠지?”
“적어도 동희보다는 나을 거예요.”
상엽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열었다.
김밥을 비롯해서 정갈한 반찬과 샌드위치까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우와.”
“먹어 봐요.”
상엽은 마다하지 않고 김밥을 집어 먹었다.
“맛있어!”
유물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기쁘게 외치는 상엽을 보며 송연지도 밝게 웃었다.
“얼른 먹어요.”
그들은 다른 사람처럼 여유 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도시락을 다시 가방에 챙겨 넣은 송연지는 또 다른 물건을 건넸다.
네 장의 양피지였다.
“오빠랑 제가 가지고 있던 것 두 장, 동희가 한 장, 제가 새로 구입한 한 장. 이제 총 네 장이에요.”
“그럼…….”
“이제 하나 남았어요.”
“고마워!”
파이어스의 망치를 완성하는 데 조각 하나가 남은 것이다. 상엽은 거절하지 않고 네 장의 유산 조각을 챙겼다.
“그런데 동희도 만나고 온 거야?”
“가마솥 조각을 주느라 만났어요. 그것도 하나 남았어요.”
“역시 연지야. 대단해.”
“파이어스의 망치, 나머지 조각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정말?”
상엽은 보물 지도를 발견한 해적처럼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송연지의 표정은 반대였다.
“중국 사천에 왕수라는 자가 가지고 있어요. 꽤 큰 화이트 길드 소속 간부인데, 실력도 상당하고 인맥도 넓어서 접근이 쉽지 않아요.”
“협상하면 되지 않을까?”
“해 봤어요. 할 수 있는 전부를 해 봤는데 거절당했어요. 유물과 유산 조각을 팔지 않는 걸로 유명해요.”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어차피 경쟁이잖아.”
“왕수의 실력도 문제지만 거대 길드의 간부라고요.”
“알았어. 그런 표정으로 말하지 마. 손 들고 벌서야 될 거 같잖아.”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상엽의 머릿속엔 온통 신의 망치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방법이 있긴 해요. 왕수가 딱 한 번 자신의 유산을 내놓은 적이 있어요.”
“그래?”
“방법은 간단해요. 그가 원하는 조각과 교환하는 거예요.”
송연지는 몇 가지 목록이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그가 찾고 있는 유산과 유물의 목록이에요. 다크 마켓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라 구하기 쉽지는 않아요.”
쪽지에는 세 가지 물품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 구했어요.”
송연지는 또 하나의 물품을 건넸다.
“어?”
“아오나의 신전 조각이에요. 하나밖에 못 구했어요.”
“정말 고마워.”
“원래 제가 전부 하려고 했는데 가야 할 곳이 생겨서요.”
“가야 할 곳?”
상엽은 그제야 송연지의 성격을 떠올리고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험한 곳에 가려는 거야?”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송연지가 마지막 조각까지 책임을 졌을 것이다.
송연지는 상엽의 질문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테크의 달, 오빠가 준 유물이잖아요.”
“신전에 가려고?”
“네. 반드시 통과할 거예요. 오래 걸릴지도 몰라서 미리 주는 거예요.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들고만 있어요. 무사히 다녀올 테니까.”
상엽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힘을 주어 물었다.
“자신 있지?”
“물론이죠.”
“그럼 해낼 거야.”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신전인데.”
“신전? 그래 봤자 전원주택.”
상엽의 비하에 송연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막연한 두려움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