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한 시간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동희는 여러 재료를 꺼내더니 양념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고, 송연지는 머리가 복잡한지 먼 산을 보고 앉아 있었다.
“저기.”
상엽이 슬쩍 송연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에 송연지는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연지야.”
“왜요?”
“넌 마음이 넓은 여자잖아. 예쁘고 착하고.”
상엽의 말에 분위기가 좋아지려는 찰나, 동희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가슴은 작아.”
“야!”
송연지가 다시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상엽은 급히 그녀를 말려야 했다.
“왜들 이래? 이제 어떤 코인인지는 상관없잖아.”
“저 자식이 하는 말 못 들었어요?”
“들었어. 내가 한마디 할게.”
상엽은 그녀의 편에 서서 동희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슴 작은 게 연지 죄는 아니잖아. 그런 걸로 놀리지 마.”
“오빠!”
“왜?”
“나 가슴 안 작거든요. 있을 만큼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알았다는 사람 표정이 왜 그래요?”
“스스로 만족하면 됐지 뭐.”
“야! 정상엽! 너도 덤벼!”
송연지가 소리치자 동희도 도구를 내려놓았다.
“바보 여자, 상엽이 괴롭히지 마. 내 친구야.”
“난 너보다 훨씬 오래전에 친구 했거든!”
“친구는 서로 괴롭히면 안 되는 거야. 넌 친구 자격이 없어.”
둘의 대화를 듣던 상엽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송연지와 동희 모두 상엽을 절대적으로 믿는 터라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자, 일단 대화를 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나도 강요는 안 할게. 둘이 꼭 친구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오해는 풀어야지.”
상엽은 일단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무기 꺼내면 안 돼. 알았지?”
둘 모두 대답이 없었다. 상엽은 그걸로 만족하고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다들 앉아.”
송연지와 동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자, 일단 내가 비밀 하나 털어놓을게. 아주 기구한 운명을 가진 불쌍한 인생의 이야기니까 잘 들어.”
상엽은 뜬금없이 과거를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야기부터 누나의 자살까지, 그리고 누나를 살리기 위해 갓코인을 모으고, 현재 누나 사건을 조사 중이라는 말까지 했다.
“누나만 살리면 돼. 그리고 누나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상엽이 아픈 사연을 이야기하는 동안, 송연지와 동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상엽의 마지막 말이 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너희들도 똑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잖아. 우리 셋 다 고아야.”
아픈 말이었지만 동질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동희야, 네 이야기부터 해 줄래? 나도 자세히 들은 적은 없어서.”
상엽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동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전부 진실은 아니었어.”
“뭐? 설마 부모님 이야기가…….”
“반은 진짜야!”
동희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빠가 엄마랑 나를 많이 때렸어. 그러다 나랑 엄마를 방에 가둬 놓고 며칠을 돌아오지 않았어.”
동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난 어려서 엄마가 뭐든 주면 먹었어.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엄마가 쓰러진 거야. 나 먹인다고 아무것도 안 드셨거든.”
상엽과 송연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일주일 만에 아빠가 돌아왔어. 그런데 쓰러진 엄마한테 욕을 하더라고.”
“그런…….”
“병원으로 옮겼는데 엄마가 죽었어. 너무 늦었대.”
“미안…….”
상엽은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희는 오히려 웃었다.
“괜찮아. 엄마랑 나는 이제 그 지옥에서 벗어났으니까.”
“아빠는 그럼…….”
“엄마 장례식에서 술 먹고 행패 부리다가 혈압이 터져서 죽었어. 아마 엄마가 날 위해서 데리고 간 거 같아.”
동희의 사연은 날카롭던 분위기를 촉촉하게 바꿔 놓았다.
“이게 내 사연이야.”
상엽은 별다른 말 없이 연지를 보았다.
동희의 사연에 눈가가 촉촉해진 연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는 고고학자였어. 나한테는 최고의 아빠였지만 엄마에겐 아니었어. 매일 바빴고, 내가 칭얼대지 않으면 연구실에서 돌아오지 않았거든.”
상엽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엄마는 오랫동안 외롭게 살았어. 그러다가 암에 걸린 것도 모르고 혼자서 죽어 가고 있었던 거야. 아빠도 몰랐고, 나도 몰랐어.”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알았어. 아빠는 그제야 후회하고 고고학자를 그만뒀어. 대신 엄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러 다녔어.”
송연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실패했어. 그런데 아빠는 엄마가 죽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어. 미친 사람처럼 뭔가를 찾아다녔어. 그러다 갓코인을 알게 됐고, 트레저 헌터가 된 거야. 엄마를 살리려고.”
“아…….”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신음을 내고 말았다.
“결국 아빠도 실패했어. 일기장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지. 그걸 내가 이어받은 거야. 아빠도 살리고, 엄마도 살리고. 그게 내 꿈이야.”
송연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각자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엽은 그들의 감정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동희를 향해 물었다.
“동희야, 라면도 끓여?”
“응.”
“친해지는 데는 라면이 최고지. 같이 끓여 먹을까?”
“알았어.”
동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라면을 준비했다. 그런데 끓이는 방법이 특이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풀과 고기를 냄비에 넣고 끓이자 금세 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육수가 만들어지자 건더기는 모두 덜어 내고 면을 넣어 끓였다.
면이 모두 익은 후에는 다섯 가지 양념을 뿌렸고, 순식간에 기괴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비리고 역한 냄새에 송연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상엽이 귓속말을 했다.
“먹어 봐. 먹어 봐야 진가를 알아.”
송연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걷어 내고 상엽의 말을 믿었다.
‘얼마나 맛있기에 이러는 거야?’
그녀는 은근히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진짜 맛있으면 좀 봐줄까?’
드디어 음식이 완성되었고 동희는 제일 먼저 상엽에게 라면을 덜어 주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또 하나의 그릇을 송연지에게 내밀었다.
송연지는 못 이기는 척 그릇을 받았다.
그릇을 받자 역겨운 냄새가 더욱 심해졌다.
‘이게 정말 맛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 상엽은 면과 국물을 동시에 들이켜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상엽은 멈추지 않고 라면을 넘기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냄새랑 맛은 다르니까.’
본능은 경고음을 보냈지만 미친 듯이 라면을 들이켜는 상엽을 보며 그녀도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면발을 잡은 젓가락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상엽이 빈 그릇을 동희에게 내밀었다.
“더 줄까?”
“한 그릇 더!”
“알았어.”
상엽은 동희가 다시 라면을 담는 틈에 연지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무조건 다 먹어. 부탁이야.”
연지는 젓가락을 입 앞에 두고 눈알만 굴려 상엽을 보았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나 믿고 무조건 먹어 봐.”
송연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순간 혀를 중심으로 모든 세포가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부탁이야.”
바로 뱉으려던 송연지는 상엽의 말에 이를 악물고 라면을 삼켰다.
그러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내장을 태울 것처럼 퍼져 나갔다.
그런데 상엽은 다시 한 그릇을 받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헤헤.”
동희는 그런 상엽을 해맑은 표정으로 보았다.
‘이걸 먹으라고?’
송연지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 상엽과 눈이 마주쳤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녀는 상엽처럼 단숨에 라면을 들이켰다.
그 모습이 동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다. 동희는 비어 있는 송연지의 그릇을 다시 가져가려 했다.
‘막아야 돼!’
그 순간 상엽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 이로 인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한 그릇이 그대로 채워졌다.
‘죽고 싶어.’
진심으로 송연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신전에서 살기 위해 바닥을 기던 그녀도 동희의 음식을 이겨 내진 못했다.
“많이 먹어. 몸에 좋아.”
동희는 그렇게 말했다.
송연지는 떨리는 손으로 또 한 그릇을 들이켰다.
다행히 모든 음식은 먹다 보면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난 이렇게 죽는 건가?’
그녀는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모든 혈관에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고, 신경을 가진 모든 내장이 불타는 느낌을 받았다.
‘괜찮아. 어차피 산적 오빠가 살려 준 목숨이니까…….’
그녀는 아련한 표정으로 상엽을 보았다.
“뭐해?”
“고마웠어요. 그 말은 꼭 하고 싶었는데.”
“이해해.”
“뭘요?”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상엽은 송연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데이트 갈래?”
“네?”
“뛰어. 그래야 알아.”
상엽은 무작정 숲을 뛰었다. 송연지는 자연스레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금세 깨달았다.
‘어?’
신체 능력 상승은 갓코인 유저가 가장 빠르게 느끼는 감각이었다.
“오빠, 설마…….”
“진짜 몸에 좋은 음식이야. 보약이지.”
“특이하네요.”
송연지는 빠르게 숲속을 달렸다. 10분쯤 마음껏 뛰고 나자 서서히 음식의 효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게 가능하구나.’
그녀는 신기한 경험을 끝내고 상엽과 동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동희는 이미 뒷정리를 끝내고 상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애라니까.”
“알았어. 네가 괜찮다니까 참아 볼게.”
“그래. 직접 지내봐. 성깔이 더러워서 그렇지 착해.”
송연지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오빠.”
“어? 왔어?”
“죽을래요? 한판 붙어요?”
“너 신전 다녀오더니 좀 거칠어진 거 같아.”
“절 거칠게 만드는 건 오빠인데요.”
“내가? 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잘 먹었어.”
송연지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넸다. 동희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또 해 줄게.”
“그래.”
아직 서먹서먹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화이트와 블랙을 따지지 않았다.
‘오빠를 믿으니까. 착한 녀석인 거 같기도 하고.’
‘상엽이 말대로 괜찮은 애일지도 몰라.’
그들의 마음은 꽤 열린 상태였다.
“그런데 연지야.”
“왜요?”
“유물이랑 유산 좀 봐 줄래? 뭐가 좋고 나쁜지 몰라서 일단 가지고만 있었거든.”
“알았어요.”
상엽은 소유하고 있는 유물을 모두 바닥에 늘어놓았다.
갓코인 유저에겐 목숨과 같은 유물이지만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 완성된 유물이 있네요.”
“응. 두 개짜리였어.”
송연지는 원형 유물의 문양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가 점점 눈동자가 커졌다.
“타르테크의 달!”
“아는 거야?”
“와! 이걸 완성한 거예요?”
“왜? 무지 좋은 거야?”
“오빠한테는 필요 없어요.”
“에이, 뭐야?”
송연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굉장히 특이한 신전으로 알려져 있어요. 스킬 자체에 위력이 있는 건 아닌데, 특이해서 많이들 원해요. 난이도도 별로 높지 않은 걸로 예상되고요.”
“그런 정보도 있어?”
“예상이에요. 일단 두 조각 유물이고, 추정되는 스킬과 유산도 두 가지뿐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했어?”
“트레저 헌터와 스카우트, 두 가지 능력을 키우는 유저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스킬이거든요.”
관망의 눈.
타르테크의 렌즈.
송연지는 역사의 기록을 통해 이를 예상했다.
“관망의 눈은 변종의 위치까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헌터 아이처럼?”
“헌터 아이의 상위 스킬이라고 보면 돼요.”
변종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분명히 큰 정보였다.
“타르테크의 렌즈는 신의 흔적을 찾는 망원경이에요.”
“신의 흔적이라면…….”
“유물과 유산이죠.”
상엽은 그제야 송연지가 놀란 이유를 알았다.
“좋아. 너 가져.”
“네? 이걸 그냥 준다고요?”
“너한테 필요한 거잖아.”
“그래도…….”
송연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완성 유물을 건네는 상엽을 멍하니 보았다.
그때, 동희가 그들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간식 먹고 해. 머리가 맑아져.”
상엽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희가 건넨 하얀 떡을 먹었다. 그 모습에 송연지도 자연스럽게 떡을 물었다가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이 맛에 적응할 수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맞서는 기분이었다.
“먹어, 몸에 좋아.”
상엽이 떡을 다 먹고 송연지를 재촉했다. 이에 송연지는 전투에 나서는 병사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떡을 씹어 넘겼다.
동희의 말대로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역시 몸에 좋지?”
상엽이 인정하라는 듯이 물었다. 이에 송연지는 이를 악물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혀도 몸이에요.”
상엽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