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레나의 대기실은 무대의 뒤편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가장 끝에 있었다.
상엽은 자연스럽게 복도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한 사내가 그의 앞을 막았다.
검은 양복에 단단한 체구의 사내였다. 숙련된 경호원처럼 감정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안녕하세요.”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실 텐데요.”
“다른 방문자가 있습니다.”
“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럼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아저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죠. 그럼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좀 알려 주시겠어요?”
“그러겠습니다.”
상엽은 다시 클럽 구석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누군가 그에게 맥주 한 병을 내밀었다.
“실장님께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경호원이 상엽을 배려해서 보낸 것이었다.
‘술이라…….’
인사를 하고 맥주를 받은 상엽은 한참 동안 맥주병을 노려봤다.
처음 변종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생소한 기분이다.
“한번 마셔 볼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첫 경험이다.
‘성인식에 술이 빠지면 안 되지.’
상엽은 조심스럽게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쌉쌀한 맛에 이어 칼칼한 쓴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우, 맛없어.”
상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맥주병을 입에 물었다.
“동희가 준 음식에 비하면 뭐.”
동희의 음식에 비교하면 못 먹을 것이 없었다.
상엽은 배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신기해서 다시 한 모금을 넘겼다.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섰다.
“혼자 왔어요?”
속옷이 보일 만큼 깊게 파인 티셔츠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었다.
진한 화장을 감안하더라도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의 미인이었다.
여자는 대뜸 상엽의 옆에 앉더니 소리가 나도록 맥주병을 부딪쳤다.
그러더니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드세요. 제가 살게요.”
여자는 빈 맥주병을 테이블에 놓더니 새로운 병을 시켰다.
상엽은 이를 보며 자신도 맥주를 비웠다.
“저 어때요?”
여자는 새로운 맥주를 상엽에게 건네며 물었다. 노골적인 유혹에 상엽이 대답했다.
“레나가 시켰어?”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대답을 하진 못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
상엽은 웃으며 다시 맥주를 삼켰다. 처음과 달리 두 번째 병부터는 제법 시원한 맛이 느껴졌다.
“나 위험한 사람이야. 그리고 술은 오늘 처음 마셨고. 내가 어떻게 변할지 예상할 수 있어?”
당황하던 여자는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상엽의 앞에 섰다.
“나 위험한 거 좋아하는데.”
“뭐야? 이런 역공은 예상 못 했는데.”
“갑자기 오빠를 가지고 싶어지네. 이젠 누가 시킨 거랑 상관없이 내 진심인데.”
여자는 대뜸 상엽의 옆구리에 붙었다. 진한 향기가 상엽의 코를 자극했다.
“나 어때? 듣기로 여자 경험이 없다던데.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거든.”
“진짜 힘들어.”
“뭐가?”
“참는 거. 진짜 안 참고 싶다. 휴.”
“그럼 참지 마. 난 준비됐는데.”
상엽은 술보다 여자의 향기에 더욱 취했다.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안해. 정말 네가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결국 상엽은 여자를 밀어냈다.
“다음 기회는 없을 거야. 그래도 좋아?”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난 그런 여자라서.”
상엽은 다시 고민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을 너무 오래 기다렸어. 미안해.”
결국 상엽은 여자를 거절했다.
“쳇.”
여자는 불쾌한 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상엽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여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선명한 하체 근육의 움직임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레나, 이것까지 보상해야 할 거야.’
아쉬움을 달랜 상엽은 자연스럽게 대기실 복도를 보았다. 그런데 누군가 복도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뒷문이 아니네.’
보통 갓코인 유저는 뒷문을 통해 신분을 숨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당당히 복도를 걸어 나왔기에 상엽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곳이지만 신체 개조를 진행한 상엽은 어려움 없이 그녀를 보았다.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정말 많구나.”
클럽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검은 정장 바지에 세로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대충 뒤로 묶어 턱과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고 액세서리는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움직임이 편한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놀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화장도 하지 않았는데,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미인이었다. 다만 여리고 매혹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강하고 거친 느낌의 중성적인 매력이 강한 여자였다.
여자는 상엽의 시선을 모르는지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놓여 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와! 멋있다.’
거친 매력의 여자를 주시하던 상엽은 경호원이 다가와서 정신을 차렸다.
“들어가시지요.”
“고마워요.”
상엽은 맥주병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취하신 겁니까?”
경호원의 말을 듣고 상엽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멀쩡해졌네요.”
상엽은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취한 것도 회복이 돼 버리네. 잠깐 기분 좋았는데.’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경호원을 따라 레나의 대기실로 갔다.
‘자! 드디어!’
상엽은 힘차게 대기실 문을 열었다.
레나는 대기실 소파에 다리를 꼬며 앉아 있었다.
무대 위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였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엽을 보며 얇은 웃음을 지었다.
“왔어?”
“함정을 뚫고 왔지. 훌륭한 함정이었어.”
“함정이 아니야. 시험이었지.”
“뭐?”
상엽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날 원하는 건 확실해졌네.”
“아, 그런 거였어? 내가 다른 여자한테 넘어가는지 시험한 거야?”
“맞아. 용케도 잘 통과했네. 오늘은 그 여자, 내일은 날 선택했으면 둘 다 잡았을 텐데.”
레나의 조언에도 상엽은 후회하지 않았다.
“너랑 꼭 붙어 있을 거야. 일주일 내내.”
그 말에 레나는 만족했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좋아하는 스타킹, 맞지?”
“응.”
“또 어떤 취향이 있는지 지금부터 한번 볼까?”
레나는 천천히 상엽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상엽의 무릎 위에 앉았다.
“마음의 준비는 됐어?”
그녀는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준비했어. 충분해.”
상엽은 정답을 대답하는 학생처럼 빠르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시간이야. 마음대로 해 봐.”
“일단 네 마음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럼 잘 배워. 이게 어른들의 방식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나의 입술이 상엽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더욱 깊이 상엽을 끌어안았다.
상엽은 레나의 몸과 향기에 취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이성이 잡고 있던 감각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던 모든 감각이 오로지 레나에게 집중되었다.
독설을 쏟아 내던 입은 부드럽고 집요한 쾌락을 만들었고, 욕을 표현하던 몸은 깊이 맞닿아 서로를 느꼈다.
굳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없었다.
상엽의 몸은 자연스럽게 원하는 곳을 찾아갔고, 레나는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상엽을 도와주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원했던 것처럼 열정적으로 그 순간을 즐겼다.
그때였다.
쾅!
대기실이 울릴 만큼 강한 충격에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레나는 반쯤 벗은 옷을 다시 입었고 상엽도 흐트러진 바지와 속옷을 끌어 올렸다.
“기다려. 확인하고 올 테니까.”
클럽의 주인인 만큼 레나는 직접 밖으로 나가려 했다.
“같이 가.”
“왜? 날 지켜 주기라도 하려고?”
“아니. 어떤 자식인지 죽여 버리려고. 진심이야.”
상엽은 레나에 앞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레나가 이를 막더니 화장대 앞의 무전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강차연 님께서 갓코인 범죄자를 체포하셨습니다.
“클럽 안에서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외부로 도망가게 하셨습니다. 규칙 위반은 아니라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정리는?”
-다 됐습니다.
상엽은 강차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까 그 멋진 누나 이름이 강차연이야?”
“멋진 누나? 그사이에 본 거야?”
레나가 상엽을 노려봤다.
“멋진 형이라고 한 거 같은데.”
“집중해. 아무리 내기라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나한테 집중하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기에서 이긴 건 난데…….”
“그래서 싫어?”
레나가 다시 상엽에게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가서 물었다.
“네가 이렇게 좋은 여자인 줄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알았으면 어떻게 했을 건데?”
“내기를 더 빨리 했겠지.”
“달콤한 말이네.”
이번에는 상엽이 먼저 다가가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해 볼까?”
“기대할게.”
상엽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 * *
이른 아침.
상엽은 눈을 떴다.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고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이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는 여인이 보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화장도 지웠지만 그녀의 미모는 여전했다.
상엽은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잘 때는 착하네.”
“뭐?”
레나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는 상엽의 팔을 베고 옆으로 누운 상태 그대로 매서운 눈빛을 했다.
“자는 거 아니었어?”
“욕은 다 들려.”
“그럼 이제 안 할 테니까 다시 자.”
“넌?”
“너 다시 잠들면 깨우려고.”
“어떻게 깨울 건데?”
“내 방식대로.”
그 말에 레나가 웃었다.
“뭐 네 방식도 나쁘진 않더라고. 그래도 좀 더 배워야 돼. 너무 자신하지 마.”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나한테 배워서 딴 데서 써먹겠다?”
상엽은 대답하지 않고 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빨리 자. 그래야 깨우지.”
“은근 변태 같은 기질이 있어.”
“변태 맞아. 의심하지 마.”
레나는 잠시 웃더니 상엽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엽은 그녀의 호흡이 안정됐을 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시.
아침 내내 레나의 오피스텔에 있던 상엽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끝낸 상엽은 준비했던 또 다른 계획을 말했다.
그러자 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거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안 하는 거 알지?”
레나의 말에 상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런데 부탁할 곳이 없어.”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도 이건 안 해. 그런데 나한테 이걸 해 달라고?”
“응. 너밖에 없어.”
상엽은 당당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부탁할 때 들어주는 게 좋아.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까.”
“쳇. 알았어.”
레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상엽과 약속한 내기는 6일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레나의 노란색 스포츠카에 앉았다. 그런데 상엽이 운전석에 앉았다.
“운전은 아는 사람끼리 가르쳐 주는 거 아닌데.”
레나는 끝까지 내켜 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운전이라도 배워야지.’
상엽은 이동 수단의 한계를 느끼고 쉬는 동안 운전을 배울 생각이었다.
“이거 비싼 차야.”
“알아. 그래 보여.”
“너 많이 긴장한 거 같은데.”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 상엽은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 때.
쿵!
레나는 그냥 한숨을 쉬고 말았다.
“미안해.”
“됐어. 그냥 범퍼카라 생각해. 뭐 놀이동산치고 사람이 없긴 하네.”
이미 스포츠카는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범퍼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괴물의 손톱자국처럼 곳곳이 긁혀 있었다.
“화난 거 아니지?”
“오늘 밤에 몸으로 갚아.”
“그냥 지금 갚고 다시 할까?”
“이거 비싼 차라고 했잖아. 다 갚으려면 꽤 힘들 텐데.”
“내가 힘든 걸 잘해. 힘든 거 전문이야.”
상엽은 운전대를 놓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레나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입을 맞추려는 순간,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벨 소리였다.
“받아야 돼.”
“누군지 모르지만 죽여 버릴 거야.”
“그건 알아서 해.”
레나는 상엽을 밀어내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현재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근처라고 직접 온다네.”
“쳇.”
그레이 상점의 의무는 상엽도 관여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약속한 부분이었다.
10분 후.
누군가 공터로 들어섰고 레나는 폐차 직전의 스포츠카에서 내렸다.
“방해하면 안 돼.”
“알았어.”
상엽은 차 안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어? 그 멋진 누나네. 강차연이었나?”
공터로 레나를 찾아온 이는 어제 클럽에서 보았던 중성적인 매력의 여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상엽이 있는 스포츠카로 다가왔다.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 줄래?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서.”
레나의 말에 상엽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상점의 특징을 아는 터라 충분히 이해했다.
“고마워요.”
차에서 내리자 강차연이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짧고 간결한 어투였다.
상엽은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툭.
불과 1분 만에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두 여인이 동시에 밖으로 나왔다.
상점 이용이 끝난 것이다.
볼일을 끝낸 강차연은 레나와 함께 상엽에게 걸어왔다. 그러더니 레나를 보며 물었다.
“남자 친구?”
“당분간은요.”
“잘생겼네. 남자다워.”
강차연은 시선을 상엽에게 돌리며 말했다.
“조심해요. 비밀이 많은 여자니까.”
“알아요. 비밀도 많고, 비밀에 집착하기도 해요.”
“똑똑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하더니 레나를 보았다.
“안녕, 잘 지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어.”
“무슨 일 있나 봐요?”
레나의 질문에 강차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경찰 때려 치려고.”
“그것뿐이에요?”
“내 발로 나오는 건 싫어서, 사고 쳐서 해고당할 거야.”
대답을 끝낸 강차연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공터에서 멀어졌다.
상엽은 강차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해?”
결국 레나가 멍한 표정의 상엽을 불렀다. 이에 상엽이 잠꼬대를 하듯이 말했다.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했어.”
“너 설마…….”
“헤헤.”
상엽은 강차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