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너 지금 날 여관으로 부른 거야?”
상엽은 태백의 여관에서 소환권을 사용했다. 그런데 레나는 허름한 여관의 내부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뭐 잘못됐어?”
“야, 너 지금 여자를 강제로 여관으로 끌고 온 거야. 이해가 돼?”
“강제로 끌고 와?”
“아니야?”
“맞긴 맞는데…….”
강제도 맞고, 소환했으니 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뭔가 억울한데.”
“그 뭔가가 뭔데?”
“그걸 말을 못하겠어.”
“그럼 네가 틀린 거야.”
“아씨.”
상엽은 머리를 굴렸지만 제대로 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좀 좋은 곳에서 자면 안 돼?”
“나 돈 없어. 안 그래도 통장 잔고 보면 눈물이 나려고 그래. 나 노숙자로 오해도 받아.”
지난 2년 동안 상엽은 꾸준히 저축을 해서 4천만 원 정도를 모았다.
번 돈의 대부분을 저축한 셈이었다.
20살이 되면 이것으로 방을 얻어서 독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갓코인을 알게 된 뒤로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했다. 큰돈이 나간 건 없지만 교통비, 숙박비, 식비로 꾸준히 사용했다.
모으는 데 익숙해진 상엽에겐 그리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변종 사냥꾼이 돈 때문에 고민이라니. 산에만 처박혀 있으니 당연한 건가?”
“도시로 나오면 뭐가 달라? 돈만 더 들지.”
“내가 설명할 이유는 없으니까. 본론이나 말해.”
“상점 업그레이드.”
“코인 좀 모았나 봐?”
“당연하지.”
레나는 더 이상 비난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상위 상점부터.”
1만 코인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넓게 퍼진 보호막의 색깔이 엷은 회색으로 변했다.
“그냥 표시일 뿐이야. 신경 쓰지 마.”
“알았어.”
상엽은 눈에 보이는 변화를 무시하고 메뉴를 먼저 살폈다. 제일 먼저 잡화였다.
‘역시.’
잡화 목록이 늘어나 있었다.
-그라덴의 유물 보관함 3000코인
-그라덴의 유산 보관함 3000코인
-정령의 정수: 지혈진통제 1000코인
-차원의 파동: 중형 아공간 가방 5000코인
-달빛 비스킷: 피로회복영양제 500코인
다섯 가지는 최하급 상점에 있던 물건과 효과는 같지만 효율이 다른 물건들이었다.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비싸면 원래 사던 걸로 사.”
레나의 말대로 원래 목록도 그대로 있어서 선택은 상엽의 몫이었다.
상엽은 그 외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목록을 살폈다.
-연금술사의 처녀작: 해독제 2000코인
-연금술사의 실패작: 호르몬제 3000코인
“호르몬제는 뭐야?”
“재료라고 보면 돼. 성장, 유혹, 속임수. 뭐 쓰임새는 다양해.”
“난 필요 없는 거네.”
그나마 해독제는 비상약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잡화 목록을 확인한 상엽은 스킬 목록을 다시 보았다.
“새로 추가된 건 전부 비싼 거네.”
“기본이 1만 코인 이상이야.”
그레이 상점의 스킬 분류는 간단했다.
상위 상점으로 갈수록 비싼 스킬을 파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살 수도 없겠는데.’
상엽이 가진 코인으로 1단계를 사면 끝이다. 이것보다는 잡화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런데 스킬 목록을 닫으려던 상엽은 익숙한 이름을 보았다.
‘아오나.’
고스트 실드와 고스트 체인에서 보았던 이름이었다. 두 가지를 모두 쓰다 보니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한번 볼까?’
상엽은 스킬의 내용을 확인했다.
-아오나의 유령 추종자
주인을 따라다니는 유령 추종자를 소환한다.
‘따라다녀?’
그냥 단순히 따라다닌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것도 유령이? 예쁜 여자도 아니고?’
상엽은 관심을 끄고 목록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쁜 여자 유령이면?’
잠시 그 생각을 했지만 1만 코인이라는 가격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라덴의 유물 보관함, 유산 보관함, 중형 가방, 해독제, 정령의 정수.”
“14000코인이야.”
“어우, 비싸.”
“짠돌이.”
“없이 살아서 그래.”
결국 모든 물품을 구입하자 남은 건 1600코인뿐이었다.
“소형 가방은 사라져. 가방은 하나밖에 가질 수 없거든.”
“쳇. 너무한 거 아니야? 보상은 해 주는 거야?”
“그런 거 없어. 싫으면 사지 마.”
아공간은 하나만 가질 수 있다. 그게 아공간 가방의 규칙이었다.
결국 상엽은 본래 있던 가방에서 남은 물품을 모두 꺼냈다.
아직 지난번에 샀던 소모품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하나 줄까?”
상엽은 달빛 캔디 하나를 레나에게 내밀었다.
“장난해? 그렇게 맛없는 걸 나보고 먹으라고?”
그 말에 상엽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알고 판 거냐? 알면서 미리 경고도 안 해 줬어?”
“안 물어봤잖아.”
상엽은 뭔가 불만스러웠지만 딱히 따질 수도 없었다.
“의뢰 목록이나 보여 줘.”
“의뢰도 하려고? 웬일이야?”
의뢰 목록도 달라져 있었다.
‘천 코인 이상의 의뢰가 생겼어.’
그가 볼 수 있는 최고 목록은 1500코인이었다.
총 금액 1600코인에 딱 맞는 의뢰는 없었다.
‘1500코인 의뢰라.’
완료할 경우 최소 3000코인에서 최고 1만 5천 코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제거 의뢰는 강한 녀석이 있을 테고.’
의뢰는 단순히 보상 코인만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특별한 변종을 처리하는 코인과 특이 변종이 지키는 유물이나 유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얻게 된다는 뜻이다.
‘해 볼까?’
초보 시절이긴 하지만 100코인 의뢰에서도 위험에 빠졌다.
1500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고 판단됐다.
‘단계적으로 해 보자. 일단 500코인부터.’
결정을 내린 상엽은 500코인 의뢰 목록을 살폈다.
레나의 설명대로 그는 블랙과 화이트의 모든 의뢰를 볼 수 있었다.
‘금산.’
500코인 제거 의뢰 중에 목적지가 금산인 것이 있었다.
‘다시 가 볼까?’
문제는 두 번이나 사냥꾼을 만났다는 것이다.
‘깊이 들어가면 오히려 없을 수도 있어.’
그는 너무 안전한 길로만 다녔고, 이것은 다른 사냥꾼이 자주 오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 보자.’
상엽은 결정을 내리고 의뢰를 구입했다.
-제거 의뢰
금산에 있는 하얀 표범을 처리하라.
보상 코인 3500화이트 코인.
표범이라는 말에 상엽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제대로 붙어 보겠네.’
상엽은 의지를 다졌지만 레나는 은근히 웃고 있었다. 이를 보며 상엽이 물었다.
“왜? 이번에도 죽을 거 같아?”
“쉽지 않을 거야.”
“알아. 지금까지 쉬운 적도 없었어.”
“그래? 그런데 용케 또 도전하네.”
“어려운 일이 보수도 높아. 일용직은 그렇게 사는 거야. 쉬면 굶어야 되고 힘들면 많이 버는 거야.”
상엽은 결정을 내리고 레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의뢰라는 것은 왜 있는 거야? 각 진영에서 훈련이라도 시키려는 거야?”
상엽의 질문에 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력이 겨우 그거야?”
“그럼 뭔데?”
“분명한 이유가 있지. 5천 코인짜리 정보야. 살래?”
“아니, 됐어.”
상엽은 관심을 접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가.”
“짠돌이.”
레나는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 * *
대전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상엽은 변종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세계 변종 지도.’
이는 UN에서 발표한 공식 자료였다.
각 나라와 위치별로 어느 지역이 가장 위험한지 분류해서 방문객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는 국가 간의 협력과 지원까지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사냥터 지도네.’
변종 사냥꾼에게는 이것이 사냥터 난이도 지도와 같았다.
‘아마존.’
아마존은 아직 수색조차 완료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미분류 지역으로 나뉘었다.
그 외에 정글로 유명한 아프리카 콩고,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최고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보르네오 섬이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모두 포함된 보르네오 섬은 특수 위험 지구로 분류되었다.
섬 전체가 열대 밀림이었던 탓에 변종 출현 이후 엄청난 사상자가 났고, 남은 인구는 모두 대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은 그렇게 변종들의 천국이 되었다.
그 외에도 정글은 대부분 변종들로 인해 위험 지구였고, 대표적인 산들도 이에 속했다.
‘한국은 주의 지역.’
사실상 주의 지역은 가장 낮은 경고라 안전 지역으로도 불렸다.
‘가장 약한 사냥터라는 거지.’
결국 영원히 한국에 있을 수는 없었다.
유물을 찾고, 유산을 완성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토의 크기만 봐도 한국은 갓코인 유저에게 유리한 지역이 아니었다.
‘미리 외국어 공부라도 해야 하나?’
그 생각을 할 때, 하급 그레이 상점에서 보았던 스킬 하나가 떠올랐다.
‘신의 소통.’
그런 스킬이 있었다. 다만 자세한 내용을 살피지는 않았다.
‘필요할 때 확인해 보자.’
일단 그는 금산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냥꾼 신분증.
이걸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방어선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다.
“뭐지?”
그가 군부대를 통과해 외부 방어선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그에게 다가왔다. 상엽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군인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선글라스 사내를 막지 않았다.
그는 상엽을 보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스미스? 외국 사람인가요?”
“외국에서 자라긴 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말투는 사무적이었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180cm 정도의 신장에 갸름한 얼굴이었고 검은 구두에는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거래를 소개하려고 왔습니다.”
“거래를 소개해요?”
말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상엽이 되물었다.
“전 갓코인 바이어입니다. 브로커라고 부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갓코인 브로커.
상엽은 이런 직업을 처음 들었다. 그런데 사내는 예상했다는 듯이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단가는 코인당 5만 원입니다. 변종은 전투 불능 상태로 데리고 오셔야 하며, 유물은 감정가 그대로 계산해 드립니다. 유산은 거래를 오래 지속하시면 제가 직접 판매해 드립니다.”
갓코인을 현금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100코인이면 5백만 원.’
변종 출현 이후 물가 상승을 감안해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브로커가 가져가는 돈까지 감안하면 더욱 비싼 것이다.
‘100코인이 더 아깝기도 하고.’
상엽은 쉽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1만 코인이면 5억이네.’
단위를 조금 올리자 생각이 달라졌다.
‘1만 코인이 더 아까운데.’
생각은 반복됐다.
‘10만 코인이면…….’
상엽은 자연스럽게 계산을 시작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관심 있으면 연락할게요.”
일단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부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았다.
‘부자들은 쉽게 갓코인을 모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종 출현 이후, 빈부 격차가 심해진 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괜찮아. 뭐든 가능성만 있으면 돼.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상엽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신이 될 수도 있지.’
그가 원하는 건 희망이었다. 갓코인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의미였다.
* * *
“저놈은 뭐지?”
금산 위험 지대로 들어선 상엽은 변종보다 사냥꾼을 먼저 만났다.
“이상한 놈이 있는데.”
방어선과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730그레이 코인, 20블랙 코인.’
블랙 유저가 확실했다. 그런데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다 잡은 변종 늑대의 사지를 부러트리고 내장을 도려냈다. 그러더니 이를 팔팔 끓는 냄비에 집어넣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종 양념을 넣고서야 그는 상엽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는 상엽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식사하고 가세요!”
그 말을 들은 상엽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위험한 놈이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내는 고급 레스토랑 주방장 같은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덩치가 작아서 아빠 옷을 훔쳐 입은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던 상엽은 사내와 마주치지 않게 걸어가는 방향을 바꿨다.
그때, 사내가 다시 한번 외쳤다.
“정력에 끝내줘요!”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