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17화 (17/300)

# 17

“45일 남았어. 알지?”

“네가 죽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상엽은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소환권으로 레나를 먼저 불렀다.

4,850블랙 코인을 먼저 소모하기 위해서였다.

두 가지 코인을 모두 들고 이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헌터 아이에 걸릴 수 있는 양인 데다 블랙과 화이트 상점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화이트 코인과 그레이 코인만 남기고 블랙 코인은 잡화를 구입해서 모두 소모하고 서울로 이동했다.

신체 강화 9단계와 10단계.

신체 개조 9단계와 10단계.

이 둘에 소모한 코인은 15만 3600코인이었고, 처음 잡화 구입에서 5,000 코인을 썼다.

이로써 남은 코인은 9,706그레이 코인이었다.

‘많이 남았네.’

남수사의 말대로 유물 습득이 코인 수집에 큰 역할을 했다.

‘사냥꾼이 사람을 잡으러 다니는 이유가 있었어.’

더불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트레저 헌터가 제일 위험하겠어.’

신의 힘에 직접 도전하는 만큼 많은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다음 상점으로 갈까?”

상엽의 주머니에는 두 개의 명함이 있었다. 하급 블랙 상점과 화이트 상점의 명함이었다.

“일단 옷부터 사자. 이발도 좀 하고.”

도지연의 병원 근처에 미용실과 의류점이 모두 있었다.

1차 목표를 이룬 상엽은 잠시 여유를 가지며 의류점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저렴한 옷을 파는 대형 매장이었다. 그런데 상엽이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시선을 모았다.

한겨울에 팬티보다 못한 찢어진 반바지에 산발을 하고 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저 돈 있어요. 쫓아내지 마세요.”

상엽은 경찰 앞에 선 범죄자처럼 천천히 지갑을 열어 돈을 보여 주었다.

“저기…….”

결국 점원이 다가와서 뭔가 말을 하려 했다. 이에 상엽은 선수를 쳤다.

“이미 골랐어요. 저기 청바지랑 티셔츠요.”

그리고 얼른 돈을 쥐여 주었다. 점원은 빨리 이 시간을 끝내려는 듯 빠르게 물었다.

“사이즈는요?”

다행히 상엽은 옷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미용실에서의 반응은 더욱 심했다. 결국 세 곳에서 쫓겨나고 손님이 없는 이발소를 찾았다.

노년의 이발사가 운영하는 이발소는 상엽을 내치지 않고 오히려 따뜻이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짧게 잘라 주세요.”

이발사는 산발이던 머리를 깔끔한 스포츠머리로 만들어 주었고 면도까지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상엽은 돈을 내고 이발소를 나오려 했다. 그런데 이발사는 돈을 받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걸로 맛있는 거 사 드세요. 웬만하면 집에 들어가시고요.”

상엽은 그때서야 이발사가 따뜻하게 맞아 준 이유를 알았다.

“저 노숙자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진짜 아니라고요.”

“잘 곳이 있다는 말입니까?”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이발사의 질문에 상엽은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없네요.”

“보통 어디서 주무십니까?”

“바, 밖에서…….”

이발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주는 안 되지만 두 달 후에 다시 오시면 또 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이발사는 돈을 받지 않고 돌아섰다. 상엽이 편하게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내가 노숙자였어?’

상엽은 혼란을 느끼며 이발소를 나왔다. 그래도 탁자 위에 돈을 놓고 나오는 걸 잊지는 않았다.

더 이상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작은 무늬 하나가 전부인 하얀 티셔츠.

머리는 스포츠로 단정하게 변했고 면도까지 했다. 얼굴 곳곳에 상처가 있지만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상의를 벗는다면 엄청난 흉터에 놀라겠지만 티셔츠가 이를 잘 가려 주었다.

‘이제 한 단계 왔어.’

10단계 강화를 완성하면서 다음 상점의 위치를 받았다.

최하급 상점을 벗어나 하급 상점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남수사는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다음 상점에서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것입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따뜻하게 나눴다.

반면, 도지연은 애인을 군대에 보내는 것처럼 아쉬워했다.

-꼭 다시 와요. 이제 상점이 아니라 주치의로 만나 줄게요.

진한 키스도 잊지 않았다. 그 키스를 받는 순간, 상엽은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에는 병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봐요. 늦은 시간도 괜찮아요.

이제 그들은 상엽과 공적으로는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유물 정보를 살 게 아니면 못 만나겠네.’

모든 상점은 서로 다른 유물에 대한 정보가 있는 만큼, 트레저 헌터들은 상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상엽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레나도 못 보는 건가?’

아직 그레이 상점의 다음 단계 정보는 얻지 못했다. 이 역시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좀 놀려 주러 가 볼까?”

상엽은 레나를 만나러 갔다.

도착한 곳은 홍대의 오피스텔이었다.

-집으로 와.

이른 시간이라 출근을 하지 않은 레나가 상엽을 집으로 불렀다.

오피스텔은 고급이었다.

혼자 살기 좋은 원룸으로 꾸며진 오피스텔은 넓은 침대에 푸른 실크가 덮여 있었고, 큰 도로 방향의 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심플한 집기에 기본적으로 넓은 크기라서 오피스텔 특유의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또 살아왔네.”

그녀는 막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은 채로 문을 열었다.

매끈한 목선과 쇄골이 드러나는 티셔츠라 꽤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짧은 바지가 긴 티셔츠에 가려져 있어 마치 벗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됐어.”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데?”

10단계 강화와 개조를 진행하면서 몸 상태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아직도 오른팔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생겼다.

“앉아.”

레나의 안내를 받은 상엽은 소파에 앉았다.

“차는 안 마실 거지?”

“공짜면 마실 건데. 그리고 보통 마실 거냐고 묻지 않아?”

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오렌지 주스를 상엽 앞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왔어?”

“이제 너랑 상점으로 만나는 건 마지막일 거야.”

그 말에 레나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였다. 워낙 익숙한 표정이라 상엽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른 상점이라도 찾았어?”

“아니, 이제 하급 상점으로 가려고.”

“아, 그런 거구나.”

레나는 예상과 달리 아쉬운 표정을 했다. 상엽은 그게 의외여서 잠시 그녀를 지켜봤다.

그런데 레나는 천천히 웃음을 보이더니 상엽에게 말했다.

“1만 코인이야.”

“뭐?”

“1만 코인. 하급 그레이 상점을 여는 데 드는 비용.”

“무슨 정보가 그렇게 비싸? 이거 바가지 아니야?”

“누가 정보래?”

상엽은 그때서야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뭐, 그 정보는 공짜니까 알려 줄게.”

레나는 수학 공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공격적으로 말했다.

“그레이 상점은 등급에 따라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야. 비용을 주고 상위 상점을 여는 방식이지.”

“무슨 소리야?”

“모든 그레이 상점은 최상급까지의 판매 목록을 가지고 있어. 대신 그걸 보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돼. 물론 자격도 되어야 하고.”

상엽은 그제야 그레이 상점의 시스템을 이해했다.

“그게 1만 코인이라는 거지?”

“맞아.”

“그걸 하면 다른 그레이 상점에서도 하급 상점을 열 수 있어?”

“아니, 오직 나한테만 되는 거야. 다른 상점에서 상위 상점을 원하면 또 1만 코인을 지불해야 돼.”

상엽은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레나에게 따질 일이 아니었다.

“상점 소환권, 그게 그래서 존재하는 거야.”

레나는 상엽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점 업그레이드, 할 거야?”

“해야지.”

상엽은 대답을 하면서도 그 손을 잡지 못했다.

“뭐해? 빨리 잡아.”

“지금은 안 돼.”

“왜?”

상엽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9706그레이 코인.’

코인이 부족했다. 항상 솔직하던 상엽이지만 레나에게 그 말을 하는 게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레나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어머, 고객님. 코인이 부족하세요?”

“네, 사장님. 깎아 주진 않으실 거죠?”

“정찰제예요.”

레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상엽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뜻이야?”

“안 살 거면 나가라는 뜻이야.”

“쳇, 야박하네.”

그렇지만 상엽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이야?”

“스킬. 필요한 게 있어.”

산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 있었다. 상엽은 기억 속에서 이를 해결할 스킬을 떠올렸다.

“고스트 체인, 3단계까지만.”

레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스킬을 판매했다.

-아오나의 고스트 체인: 유령 사슬

1단계-5미터 내의 물체를 사슬로 연결한다.

2단계-10미터 내의 물체를 사슬로 감을 수 있다.

3단계-20미터 내의 물체를 잡는다. 사슬 끝이 창으로 변한다.

고스트 방패와 같은 신의 이름이었다.

‘멀리 있는 놈을 잡을 수 있는 스킬이 필요해.’

접근전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던 상엽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500코인.’

시작 가격이 500코인이라 3단계까지 사는 데 3500코인이 들었다.

“이제 갈게. 또 봐.”

“그래.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가.”

“그 말도 자꾸 들으니까 친절하게 들리는데?”

“넌 역시 이상해.”

상엽은 밖으로 나가다가 벽에 걸린 전자 달력을 보았다.

“3월까지 얼마 안 남았네.”

“일단 그때까지 살아남고 말해.”

“미리 말해 줄 게 있는데, 3월 1일이 내 생일이야.”

“생일 선물이라도 달라는 거야?”

상엽은 그 말에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인식. 헤헤.”

그의 웃음에 레나는 의외로 같이 웃어 주었다.

“일단 그날까지 살아남아.”

그러면서 웃고 있는 상엽의 귀에 속삭였다.

“뭐든 상상해. 그대로 될 테니까.”

상엽은 샤워 후의 비누 냄새와 귀를 간질이는 속삭임에 작은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네가 상상하지 못한 일도 일어날 거야. 난 그런 여자거든.”

“헤헤.”

상엽은 시키지 않아도 이미 많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 * *

밤 9시가 되었지만 홍대 거리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상엽은 잠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서 평범한 사람처럼 걸었다.

‘1년도 안 됐는데.’

정확히는 9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들도 많구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다.

‘부럽다.’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한 상엽에겐 교복이 어떤 옷보다 예쁘게 보였다.

상엽은 잠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자연스레 헌터 아이가 발동되면서 사람들의 코인이 보였다.

‘쳇, 이게 아닌데.’

상엽은 의도적으로 헌터 아이를 지웠다.

‘하루만 쉬었다 가자.’

급하게 달려온 시간에 비해 짧은 휴식이었다. 그리고 그 휴식마저 한없이 달콤하진 않았다.

‘갈 곳이 없네.’

겨우 30분이었다.

거리의 모든 이들은 목적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었다.

다정한 연인도 있었고,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웃고 있는 고등학생도 보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화가 나서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걷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쳇.’

상엽은 그 벤치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부모님과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아이가 보였다.

가족을 보자 누군가 심장을 만지는 것처럼 아련한 아픔이 느껴졌다.

‘누나.’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들려고 했다. 이에 상엽은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아자!”

그의 괴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죄송합니다.”

상엽은 얼른 사과를 하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때, 익숙한 벨소리가 들렸다.

그의 전화기였다.

“내 전화기가 울릴 때도 있긴 있구나.”

송연지였다. 상엽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전화받네요. 산적 오빠, 어디예요?

“나? 홍대.”

-어! 잘됐다! 저도 그 근처예요! 우리 만날래요?

“그래, 만나자.”

-웬일로 그렇게 말을 잘 들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 일도 없어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아무 일도 없네.”

송연지는 상엽의 말뜻을 알아듣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평소보다 더욱 밝게 물었다.

-뭐 하고 싶어요? 제가 다 해 줄게요.

그녀의 배려에 상엽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밥 먹자. 길도 걷고, 말싸움도 하고, 장난도 치고.”

-친구처럼요?

“응. 내가 그게 없더라고.”

대답을 하는 상엽의 표정은 무척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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