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었다.
365일 중에 하루일 뿐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날에 의미를 두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나이가 바뀌고, 누군가는 미성년자에서 성인으로, 누군가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단 하루가 가지는 의미로는 지나친 감이 있지만 그것이 새해의 문화이자 축제였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이렇듯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강한 바람이 눈을 쓸어 내는 산속에서 새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아, 하아.”
상엽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에는 몸길이만 5미터에 달하는 거대 반달곰이 바위를 집어 던지고 있었다.
쾅!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바위를 보며 상엽은 해머를 휘둘렀다.
바위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반달곰이 달려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쿵! 쿵! 쿵!
고스트 실드 5단계가 만들어 낸 세 겹의 방패가 산산이 부서졌다. 반달곰의 돌진은 막았는데, 상엽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힘 한번 엄청나네.”
그의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얀 눈밭은 물감을 쏟은 도화지처럼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뿌려져 있었다.
상엽과 반달곰이 흘린 피였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둘은 사투를 벌였고 서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만신창이였다.
“으아!”
상엽은 괴성을 지르며 힘을 짜냈다.
‘스트라이크.’
보통의 움직임에 비해 몇 배나 힘이 들어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타격은 반달곰에게 대미지를 주지 못했다. 이것만이 반달곰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이었다.
지쳐서 몸을 웅크리던 반달곰도 이를 피해 낼 재간이 없었다.
쾅!
또 한 번의 충돌이 일어났다.
으드득!
반달곰의 가슴뼈가 완전히 박살 났다.
그리고 징그럽게 버티던 반달곰의 몸이 목석처럼 뒤로 쓰러졌다.
“하아, 하아.”
상엽도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아공간 가방에서 정령의 가루를 꺼냈다.
하지만 떨리는 손은 정령의 가루가 든 유리병의 마개조차 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눈밭에 누워 버렸다.
‘200코인.’
변종 반달곰은 표범처럼 특별한 변종이 아니었다.
일반 변종이었는데, 기본 200코인이었다. 그럼에도 정면 대결에서 상엽은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어떤 미친놈이 산에 반달곰을 풀어놓은 거야?’
반달곰은 본래 지리산에 소수만 방생해서 철저히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달곰이 본능적으로 사람의 감시를 피해 산을 넘어와 태백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표범은 운이 좋았던 거야.’
그때는 기습으로 표범의 머리를 터트리고 시작했다. 하지만 200코인 변종만 돼도 정면 대결에서는 이렇듯 애를 먹었다.
“김대진 나쁜 새끼.”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김대진 준장에게서 받은 지도 때문이었다.
수색이 되지 않은 지역이지만 주요 포인트라고 되어 있었다.
군대의 수색 지도는 꽤 유용했다.
상엽은 밀집도가 높은 지역을 찾아다녔고 하루에 2천 코인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지도로 인해 사냥이 용이해지자 미지의 지역도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곳이 반달곰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곰이라니.”
시간이 지나며 호흡이 진정된 그는 정령의 가루를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분홍색 가루는 피부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녹아 얇은 막을 형성했다.
피가 금세 멎었고 고통도 줄어들었지만 근본적인 치료가 되진 않았다.
상엽은 정령의 가루에 이어 달빛 캔디까지 복용을 하고 다시 눈 위에 누웠다.
“레나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어.”
그가 잠시 레나를 떠올릴 때, 어디선가 산 전체를 뒤흔드는 괴성이 들렸다.
구오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소리에 상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곰.’
다만 그 위용이 전혀 달랐다.
‘대장이 있었네.’
그 소리를 듣자 상엽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튀자.”
그는 곰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상엽은 군대에서 받은 지도에 곰의 영역을 표시하고 이를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늑대 지역?’
-일반 변종 늑대에 비해 2배의 속도와 힘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2배라면 딱 좋긴 한데…….’
상엽은 하얀 늑대들의 영역 근처에서 휴식을 가졌다. 몸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너도 내가 꼭 잡는다.”
그는 아직도 곰의 포효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우, 추워.”
상처가 많아지니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던 추위까지 그를 괴롭혔다.
“옷이라도 좀 사던지 해야지. 연지가 보면 또 놀리겠네.”
하얀 눈밭에 속옷이나 다름없는 짧은 청반바지를 입은 사내가 누워 있었다.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했고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제멋대로 엉켜 있었다.
‘머리도 좀 감자.’
상엽은 높게 쌓인 눈밭에 몸을 묻었다. 추위에 익숙해지자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쉴 때는 쉬어야지.’
그는 서두르지 않고 몸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 * *
하얀 털을 가진 늑대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
‘기본 20코인. 좋아.’
단순히 털 색깔만 다를 뿐만 아니라 신체 능력도 확실히 뛰어났다.
10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녔고 그중의 한 마리는 100코인이었다.
대장을 중심으로 군대처럼 움직이는 녀석들이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 위력은 상엽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엽도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절대 곰한테 뺨 맞고 너희들한테 화풀이하는 게 아니야.”
10마리의 늑대에 포위를 당했음에도 상엽은 여유가 넘쳤다.
‘500마리 정도로 추정된다고 했지?’
국방부의 분석 자료가 사실이라면 총 1만 코인이 넘는 것이다.
“시간 없어. 바로 가자.”
스트라이크.
상엽은 긴 잔상을 남기며 늑대 대장을 향해 돌진했다.
늑대 대장은 엄청난 속도에 놀라 한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엽은 타격 대신 스트라이크 종료 지점에서 바닥을 차고 올랐다.
속도가 붙었던 그의 몸이 10미터 이상 떠올랐고, 늑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스트라이크, 고스트 실드.’
상엽은 공중에서 바닥을 향해 두 가지 스킬을 동시에 펼쳤다.
그의 몸이 폭격하듯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정면에는 세 겹의 고스트실드가 펼쳐졌다.
늑대들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상엽이 떨어지는 방향에서 일제히 벗어났다.
상엽은 이를 확인했음에도 목적지에 떨어졌다.
챙!
바닥에 떨어진 고스트 실드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은 하나하나가 칼날 같은 파편이 되어 주변의 늑대들을 덮쳤다.
-고스트 실드
4단계-모든 형태의 보호막이 두 겹으로 늘어난다.
5단계-보호막이 세 겹으로 늘어나며 의도적으로 깨트릴 수 있다. 깨진 파편은 자신을 제외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스킬 5단계의 효과였다.
상엽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런 특징을 응용했다.
속도전을 펼치는 족제비와의 전투에서 우연히 시도하게 되었고 효과를 본 이후로 꽤 많은 연습을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정확히 원하는 방향으로 파편을 날렸다.
세 마리 늑대가 파편에 급소가 뚫렸고, 가장 가까이 있던 늑대 대장도 앞발에 큰 부상을 입었다.
상엽은 이를 놓치지 않고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시도했다.
이번 스트라이크는 돌진에 타격까지 이어졌다.
쾅!
큰 폭발이 일어나며 대장의 몸이 터져 버렸다.
리더를 잃은 늑대들은 이빨을 갈며 야성을 드러냈다. 상엽에겐 그게 훨씬 편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고, 상엽은 스킬 없이 남은 늑대들을 모두 잡아냈다.
대장 100코인과 나머지 180코인.
전투를 끝낸 상엽은 지금까지 모은 코인을 다시 확인했다.
‘81,200코인.’
김대진에게 받은 지도가 확실히 큰 역할을 했다.
“아직 멀었어.”
목표는 15만 3600코인이었다.
이제 겨우 절반을 넘은 것이다.
‘9단계를 올려야 하나?’
지금 코인이라면 강화와 개조 9단계가 가능하다. 하지만 서울까지 다녀오려면 최소 이틀이 필요했다.
상엽은 그 시간이 아까웠다.
‘일단 그냥 가자.’
그는 다시 사냥에 나섰다.
하얀 늑대의 영역에서 상엽은 일주일을 지냈다.
국방부 자료는 500마리라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600마리가 넘었다.
덕분에 이곳에서만 19,400코인을 모을 수 있었다.
“뭔 새끼가 저렇게 빨라?”
어젯밤 전투로 일반 늑대들은 모두 처리했다. 그런데 특별한 녀석이 남았다.
덩치는 다른 늑대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몸을 감싼 털도 솜처럼 부드러웠다.
그런데 상엽은 아직까지 마지막 새끼 늑대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츳!
둘이 스치는 순간, 상엽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새끼 늑대의 발톱이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벌써 네 시간째의 전투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정오까지 이어진 것이다.
새끼 늑대는 주로 도망을 다녔다. 그런데 늑대 영역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상엽이 빠르게 접근하면 반격을 가했다.
그때마다 손해를 보는 건 상엽이었다.
‘보이지가 않아.’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다 커서 만났으면 곤란했겠는데?’
정말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은 속도 위주의 상대에게 너무나 취약하다. 이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늑대는 지금도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상엽을 살피고 있었다.
‘500코인.’
어젯밤에도 발견했지만 지친 상태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늘 다시 싸우기 위해서였다.
‘뭔가 이상한데.’
전투는 길었지만 상엽은 지치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겁이 많은데 왜 떠나지 않는 거지?’
처음에는 단순히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동족이 모두 죽었음에도 떠나지 않는 모습은 이상했다.
-특별한 변종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상엽은 이를 떠올렸다.
“가디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상엽은 방법을 바꿨다.
“네 시간이나 지나서 깨닫다니. 연지한테는 비밀로 해야겠다.”
상엽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새끼 늑대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역시.’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유지한다?’
감시하는 것이다.
이에 상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디를 보호하는 걸까?’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나 시간 많아.”
상엽은 직접 찾기보다 새끼 늑대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30분 정도 위치를 바꾸자 드디어 이상한 지역이 발견되었다.
새끼 늑대가 처음으로 거리를 좁힌 것이다.
‘여기 근처겠군.’
방향을 조절하며 계속해서 새끼 늑대가 다가오는 곳을 찾아냈다.
그러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런데 땅과 닿은 부분의 흙이 파헤쳐져 있었다.
“저긴가?”
상엽은 잠시 숨을 골랐다.
새끼 늑대는 20미터 앞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까지와 달리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눈치 게임이었지?”
상엽은 갑자기 움직이는 행동을 했다. 그러자 새끼 늑대가 크게 움찔거렸다.
“귀엽네.”
몇 번 더 같은 동작을 하던 상엽은 크게 한 발을 뛰었다. 순간, 새끼 늑대가 오래된 나무를 향해 뛰었다.
‘잡았다.’
상엽은 새끼 늑대가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나무를 향해 스트라이크를 펼쳤다.
속도를 감안해서 미리 사용한 것이다.
새끼 늑대는 본능적으로 나무에 도착해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거대한 해머가 새끼 늑대를 덮쳤다.
쾅!
폭발이 일어났고 새끼 늑대는 단 한 방을 버티지 못했다.
“역시 싸움은 잔머리야.”
상엽은 새끼 늑대가 사라지고 코인이 흡수되는 걸 확인했다.
“자, 너는 여기다 뭘 숨겨 놨었냐? 어떤 선물이 있는지 한번 볼까?”
그는 나무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원형 나무통이 잡혔다.
‘뭐지?’
유물이라 생각했던 상엽은 예상치 못한 물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 폭탄 그런 건 아니겠지?”
상엽은 잠시 생각하다 원형 통의 뚜껑을 열었다.
“응?”
원통 안에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있었다.
“이게 뭐지?”
양피지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오른쪽 아래에 설명서처럼 완성된 그림 하나가 보였다.
“칼?”
상엽은 그제야 양피지의 용도를 알았다.
“이게 유산의 조각이구나.”
신의 무기.
상엽이 처음으로 유산 조각을 습득하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뭐야?’
헌터 아이가 발동했다.
‘12,300블랙 코인, 9,700화이트 코인, 5,400블랙 코인.’
세 명의 무리가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