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14화 (14/300)

# 14

12월 5일.

태백산에 눈이 내렸다.

썩지 않은 낙엽 위로 눈이 쌓이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제 다 모은 건가?”

상엽은 배낭을 챙겼다. 계곡을 떠날 시기가 된 것이다.

계획했던 대로 소백산까지 이동하면서 변종 사냥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5000코인은 모았으니까, 고스트 실드 5단계는 되겠고…… 조금만 더 모은 다음에 갈까?”

강화 비용 4800코인 외에 잡화까지 구입할 비용이 필요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여기에서부터는 길이 없어 외부로 나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곤란한데. 나가자니 시간이 아깝고, 들어가자니 물품이 부족하고…… 여기에서 깊이 들어가면 나오는 건 더 어려울 텐데.’

게다가 방어 병력도 상주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쳐도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정령의 가루 3개, 상점 소환권 1개, 달빛 캔디 10개.’

그가 필요한 잡화 목록이었다. 이것만 해도 2200코인이 든다.

‘가방도 사야 하는데.’

더 이상 한 곳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잡화를 보관할 가방은 필요했다.

‘얼마나 걸릴까?’

상엽은 이번 여정에서 첫 번째 목표가 있었다.

‘신체 강화 10단계, 신체 개조 10단계.’

9단계 강화에 25,600코인, 10단계에는 51,200코인이 필요하다.

여기에 강화와 개조를 모두 하려면 총 필요한 코인은 15만 3,600코인이다.

지금까지 상엽이 모은 모든 코인보다 많은 양이었다.

‘이쯤에서 선택을 하라는 건가?’

15만 코인이면 다른 많은 것들을 살 수 있다.

강력한 스킬도 살 수 있고, 무기를 강화하거나 더 좋은 걸 구입하는 것도 가능했다.

강해지기 위한 길은 결국 하나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한 전략은 수백, 아니 수천 개도 더 된다. 효율적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우직하게 갈 것이냐.

‘어차피 빨리 가면 한계에 빨리 부딪치는 거야.’

상엽은 정공법을 택했다.

‘하루 천 코인, 한 달에 3만 코인. 다섯 달만 한다고 생각하자.’

그는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하루하루 사는 거야. 다들 버티면서 살아. 오늘을 버티면 내일이 오고, 또 똑같이 오늘을 버티는 거야.

소장이 상엽에게 해 준 말이다.

‘하루살이 노가다의 삶.’

가진 게 없으니 내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늘 할 일만 생각해. 그러면 시간은 가게 되어 있어. 그럼 월급날이 되고, 선물처럼 쉬는 날도 오는 거지.

상엽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결심을 굳히고 배낭을 메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산적 오빠.”

“퇴원한 거야?”

“네. 이제 상점에 다녀오려고요.”

“그래, 조심해.”

“저도 강해질 거예요. 다음에는 제가 목숨 걸고 오빠 지켜 줄게요.”

상엽은 그냥 웃어 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이에요. 기대해요.”

송연지를 믿으라는 듯이 힘을 주어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그녀는 그렇게 계곡을 떠났다.

혼자가 된 상엽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변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대한민국 생태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멧돼지 피해가 매년 급증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이런 보도가 나왔다.

멧돼지를 잡을 수 있는 상위 포식자가 없는 탓에 개체 수가 심각할 정도로 증가했고, 이는 농작물에 대한 심각한 피해로 이어졌다.

정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농민들을 위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농민은 언제나 약자였고, 정부의 부실한 대응으로 멧돼지의 개체 수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건 뭐 멧돼지 밭이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상엽은 멧돼지가 왜 문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국립 공원에 있던 녀석들은 그냥 영역 싸움에서 밀려난 거였던 건가?”

계곡 근처에서는 한 구역에만 서식하던 멧돼지들이 이제는 가장 흔한 변종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상엽을 덮쳤고, 하나를 처리하면 또 다른 녀석이 나타났다.

실로 엄청난 개체 수였다.

“정말 끝도 없네.”

계곡에 있던 멧돼지와는 덩치부터 달랐다.

“비싼 놈이니까 봐준다.”

위험은 커졌지만 상엽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기본 30코인이면 감사하지.’

20코인과 30코인이 섞여 있었다.

덕분에 상엽은 목표로 했던 하루 1천 코인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익숙해지면 조금 더 높게 잡아도 되겠어.’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상엽은 미친 사람처럼 사냥을 하고 다녔다.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눈이 쌓이면서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생겼다.

움직임은 조금 불편해졌지만 변종을 찾기는 쉬워진 것이다.

발자국만 따라가도 어김없이 변종이 있었고, 이를 보며 개체 수를 예상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가 지나간 길에는 어김없이 눈보라가 쳤다. 강한 충격에 흩어진 눈의 파편이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이 눈보라가 또 다른 변종을 불렀고 상엽의 전투는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1800코인. 보람찬 하루네.”

태백산 계곡을 떠난 지 열흘 만에 상엽은 하루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첫날은 600코인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결국 멧돼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항상 1천 코인 이상을 모았다.

결국 목표였던 1만 코인을 넘어 1만 3천 코인을 모으는 데 성공해서 총 보유 코인은 1만 8천 코인이 되었다.

“레나 불러야겠다.”

지금까지는 고스트 실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레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잡화가 모두 떨어져서 이젠 미룰 수가 없었다.

상엽은 자신이 전투를 벌인 곳 중에서 시야 확보가 가장 용이한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아, 라면 먹고 싶다.”

기본으로 챙겨 온 초코바와 변종이 되지 않은 짐승을 구워 먹는 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달빛 캔디는 그중에서 최악이었다.

“조미료 맛이 그립다.”

상엽은 주변을 살피며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변종의 습격이 없다는 걸 충분히 확인한 그는 배낭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명함 크기의 회색 종이는 잿빛 주문서였다.

상엽은 편하게 상점 소환권이라 불렀다.

“레나 만날 시간이네.”

상엽은 명함을 반으로 찢었다. 그러자 종이가 빛으로 흩어지더니 한순간 갑자기 확산되며 사람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레나가 나타났다.

“야!”

모습이 완성되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엽은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샤워하는데 왜 불러!”

눈밭 위에 그보다 더 빛나는 나체의 여성이 서 있었다.

상엽은 눈만 껌뻑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분 후.

레나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보고 있었다.

“이게 걸레야? 옷이야?”

수십 군데 구멍이 뚫린 티셔츠 한 장만 걸친 레나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때마다 상엽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야, 좋냐?”

상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솔직하기는.”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솔직한 거.”

“부르기 전에는 미리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 아냐?”

“배터리가 다 떨어졌어.”

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상엽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불며 티셔츠가 펄럭거렸다.

상엽은 이를 보며 다시 웃고 말았다.

“헤헤.”

“그렇게 좋아?”

레나는 손을 거두고 상엽에게 다가갔다.

샤워를 마치지 않은 탓에 비누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레나는 상엽에게 안기듯이 양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귓가에 속삭였다.

“너도 좀 씻어. 이게 사람 냄새니?”

“알았어. 다음에는 씻고 부를게.”

“말이 좀 이상한데.”

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추워. 빨리 끝내.”

“네 말이 더 이상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상엽은 레나의 손을 잡고 상점을 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왜? 자주 보고 싶어?”

“됐어. 다 고른 거지?”

상엽은 주저 없이 결정을 내렸다.

고스트 실드 4단계, 5단계 4,800코인.

정령의 가루 10개 3000코인.

잿빛 주문서 1개 300코인.

달빛 캔디 40개 4000코인.

차원의 물방울 1개 1,000코인.

총 13,100코인.

상엽이 구입한 목록이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남은 코인도 다 쓰지 그래?”

상엽에겐 아직 4,900코인이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알 텐데. 나 안 죽어. 3월을 기대해.”

“자만하지 마. 아직 넌 모르는 게 훨씬 많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진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래, 그런 걸로 하고 그 저주의 다음은, 다음에 듣자고. 하지만 3월 달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잘 기억해.”

레나는 잔뜩 비웃음을 보이며 상엽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행운을 믿지 마. 그건 실력이 아니니까.”

그녀는 마지막 말을 마치더니 대충 걸치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마지막 서비스야. 안녕.”

그녀는 다시 나체가 된 채로 윙크를 하더니 돌아섰다. 이대로 잿빛 연기가 되어 사라지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에 상엽이 그녀를 불렀다.

“레나.”

“왜? 유언이 더 있어?”

“야한 속옷 있어?”

“그건 왜?”

“다 벗으니까 금방 질려.”

상엽의 말에 레나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상엽은 이겼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3월에 만날 때는 좀 꾸미고 와. 참고로 난 망사 스타킹이 좋아.”

“취향도 참 저질스럽네.”

“그래서 너한테 어울려.”

마지막 말에 레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화내는 표정이 훨씬 매력적이네. 그럼 안녕.”

상엽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나는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잿빛 연기로 흩어졌다.

* * *

레나는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1만 8천 코인이라…….’

그녀는 눈을 감고 상엽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빨라. 신체 강화까지 한 것 같던데.’

호기심이 그녀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전화기를 들었다.

“한 실장, 정상엽이 어떻게 코인을 모으는지 알아봐. 절대 관여하거나 들키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전화를 끝낸 레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보았다.

“흥미로운 사내야. 왠지 흥분되는데?”

그녀의 입가에 얇은 웃음이 걸렸다.

* * *

상엽의 사냥은 계속됐다.

“이렇게 편한걸.”

사냥을 하다 잠시 쉴 때마다 상엽은 처음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아공간 가방을 열었다.

아공간 가방은 말 그대로 손이 닿는 곳에 다른 차원의 공간을 창고처럼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공간이지만 분명히 공간의 크기가 있었고, 상엽이 구입한 초소형 아공간은 30센티미터의 변을 가진 직육면체였다.

큰 물건은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잡화를 보관하기는 충분했다.

“음식도 보관하고 싶은데, 그건 안 되겠구나.”

라면 한 박스도 들어가지 않는 공간이었다.

“다시 이동하자.”

멧돼지가 워낙 많아 이동은 느린 편이었다. 어차피 코인 수집이 목적이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음 공사 하러 가야지.”

상엽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뭐지?”

낮은 고도로 날아가는 헬기가 보였다. 그런데 헬기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상엽의 근처로 오더니 고도를 더욱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가 쓰러져 생긴 공간을 찾더니 긴 줄을 늘어트렸다.

곧이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사다리를 타고 누군가 내려왔다.

“꽤 열정적인 아저씨였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이는 김대진 준장이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배낭을 메고 흔들림 없이 바닥까지 내려왔다.

“기다려 줘서 고맙네.”

“받은 게 있잖아요. 병원비라 생각하세요.”

“결제가 전부 끝난 게 아니라면 좋겠군.”

김대진은 손짓을 해서 헬기가 올라가도록 했다. 소음이 사라지자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훨씬 편해졌다.

“시간을 아끼는 편인 것 같으니 사설은 그만두겠네.”

그는 상엽에게 노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서로가 원하는 것이라 판단했네.”

상엽은 일단 봉투를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10장으로 구성된 서류 더미였다.

구역을 나누고 점을 찍어 놓은 지도가 다섯 장이었고 나머지는 변종 분석 자료였다.

“변종 분포도인가요?”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군.”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확신하지 마세요.”

“그럼 설명하지.”

김대진은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도를 말했다.

“자네는 변종을 원하고, 우리는 토벌을 원하네. 그래서 자네에게 변종의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지.”

“제가 원하는 거긴 하네요.”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게. 자네를 이용하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네에게 제공하는 자료는 정말 확실한 거니까.”

상엽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김대진이 다른 의도가 있는지,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네. 하지만 의심하지 말게. 그 이야기도 해 줄 생각이니.”

상엽은 김대진의 말을 기다렸다.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국방부에서 3급 토벌 지역으로 분류했네. 5등급 중에 3급. 사실 다급하지 않다는 뜻이지.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분류에 비해 개체 수의 증가가 너무 빠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구역 책임자에게는 3급이든 1급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나?”

“좀 쉽게 말해 주면 안 될까요?”

“자네가 하는 행위가 내 공로가 된다는 뜻일세.”

김대진은 솔직했다. 돌리지 않고 핵심만 거론했다.

“뭐 그렇게 말해 주니 편하네요. 대신 저도 조건을 하나 걸어도 될까요?”

“뭔가?”

“아저씨하고 엮이지는 않았으면 하는데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제안은 받아들이지만 그건 저도 필요에 의해서 하는 거지, 아저씨를 도우려는 건 아니니까요. 이용당한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싫고.”

“나 때문에 피해를 볼 것 같아서 그러는 건가?”

상엽은 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정확하게 말하면 나중에 이용당하면 아저씨에게 복수를 하게 될까 봐요. 그럼 골치 아파지잖아요.”

김대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등에 멘 가방을 내려놓았다.

“자네 요구대로 하지. 그럼 이 배낭은 여기 버리고 가겠네. 다시 들고 올라가려면 귀찮으니.”

김대진의 손짓에 헬기가 다시 내려왔다. 그가 줄을 잡자 헬기의 사다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상엽은 바닥에 놓인 배낭을 보았다.

“버리고 가겠다니. 말투가 정치적이야. 마음에 안 들어.”

상엽은 불쾌한 심정으로 배낭을 툭 쳤다. 그런데 그 안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비닐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상엽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배낭을 열었다.

그 안에는 과자를 비롯한 라면이 버너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좋은 아저씨였어.”

상엽은 감동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헬기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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