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12화 (12/300)

# 12

단풍이 만연한 늦가을이었다.

예전 같으면 단풍놀이를 즐기는 시즌이었지만 지금은 TV나 기억 속에서 추억을 회상할 뿐이었다.

“와아!”

그래도 감탄사를 터트리며 가을을 즐기는 이는 있었다.

“안녕하세요!”

태백산 방어 부대에 어울리지 않게 핑크색 스포츠 웨어를 입은 소녀가 들어섰다.

이미 연락을 받은 김대진 준장은 직접 부대 입구에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나이와 직책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준장 아저씨.”

“또 뵙습니다, 송연지씨.”

부대를 찾아온 이는 송연지였다.

“군인 오빠들, 안녕하세요.”

송연지는 눈에 보이는 군인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군인들 중에는 얼굴이 붉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위험 지역에 들어갈 거예요.”

“네, 준비해 두었습니다.”

김대진 준장은 송연지에게 무전기 하나를 건넸다. 손바닥보다 작은 소형 무전기였다.

“보름 정도는 충전 없이 사용 가능하십니다. 특별한 상황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송연지는 무전기를 허리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이건 특별히 준비한 것들입니다.”

김대진은 군인들이 사용하는 전투 식량을 내밀었다.

“와, 역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미리 신고를 해 주시는 분들께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는 게 국방부 정책입니다.”

국가에서는 작전 중에 변종 사냥꾼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전 신고를 장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종 사냥꾼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사실 저도 신고는 처음이에요. 이제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언제든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런데 단풍이 정말 예쁘네요.”

“태백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송연지는 귀엽게 윙크까지 해 주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김대진의 인사는 끝나지 않았다.

“정상엽 씨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 뵙길 원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도 꼭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송연지가 다시 돌아서며 물었다.

“산적 오빠가 여기 있어요?”

“모르셨습니까?”

“석 달 동안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그녀가 정상엽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석 달 전이었다. 그 후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죽은 줄 알았잖아! 나쁜 새끼!’

속마음과 달리 송연지는 귀엽게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늦가을의 계곡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몸을 움츠릴 온도였지만 송연지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있네.”

그녀는 계곡에 대충 숨겨 둔 가방을 발견했다.

음식은 이미 바닥이었고, 대충 던져둔 옷은 걸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휴, 배낭은 그냥 쓰레기통이네.”

그나마 뭔가 다시 쓸 수 있다면, 그건 배낭이 유일했다.

“해도 지는데 슬슬 돌아오려나?”

이미 노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좀 기다려 보자.”

그녀는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았다.

물소리가 들리고, 단풍이 물든 숲 안의 하늘마저 붉게 물들었다.

“기분 좋네.”

송연지는 자연이 선사한 풍경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밤을 맞이했다.

쿵! 쿵!

평화롭던 밤에 소음이 침입했다.

산 전체를 울리는 메아리는 정확한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디지?’

자리에서 일어난 송연지는 소리에 집중하며 달빛에 비치는 나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저기다.’

방향을 잡은 송연지는 소리를 쫓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타고 다람쥐처럼 이동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콰쾅!

땅을 내려찍는 사내가 있었다.

단 한 방으로 아래에 있던 대형 늑대가 핏물로 흩어졌다.

“별거도 아닌 게.”

사내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돌아섰다.

늦가을에 어울리지 않게 훤히 드러낸 상체에는 멀쩡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흉터가 있었다.

원래는 청바지였을 바지는 이미 반바지가 되었고 곳곳이 찢어져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운동화와 청색 반바지만 입은 사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송연지가 숨어 있는 방향을 보았다.

“나와.”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에 송연지는 바닥에 내려섰다.

송연지를 발견한 사내는 그제야 적개심을 거뒀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산적 오빠.”

사내는 상엽이었다. 그런데 송연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상엽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산적 오빠가 거지 오빠가 됐어.”

송연지는 상엽의 몸을 하나하나 살폈다.

“야, 민망하게 왜 이래?”

“아우, 도대체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노가다 하고 있었지.”

“네?”

“일단 내려가자.”

“네. 산적 오빠, 아니 거지 오빠.”

상엽은 새로운 호칭을 그냥 받아넘기고 계곡으로 돌아갔다.

달빛이 비치는 계곡에 뛰어든 상엽은 몸에 묻은 피와 때를 씻어 냈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이 주변을 다 정리한 거예요?”

“며칠만 더 하면 끝날 거야.”

“그래서 군인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구나.”

“뭐라고 했는데?”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왜?”

“오빠가 여길 정리해 줬잖아요. 그래서 요즘 군인들이 다치는 일도 줄었고, 민원도 줄었고, 이래저래 도움이 된 거죠.”

“그럴 의도는 없었어.”

“알아요. 결과가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오빠.”

송연지는 바위에 걸터앉아 발만 계곡물에 넣었다.

“뭐 먹고 살았어요?”

“달빛 캔디.”

“아, 그거. 정말 맛없지 않아요?”

“안 그래도 누가 만들었는지 꼭 한 번 봐야겠어. 그리고 가진 코인으로 그걸 다 사서 입에 처넣어 버릴 거야.”

“그래서 말인데요.”

송연지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는 도박사처럼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봐요.”

“갑자기 뭔 소리야?”

“저한테 라면이 있거든요.”

“사랑해.”

“다시 한번요.”

“진심으로 사랑해.”

대답에 충분히 만족한 송연지는 숨기고 있던 라면을 흔들어 보였다.

“오빠, 진심을 담아서 끓일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에 라면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11월 25일.

상엽이 태백산에 돌아온 지 정확히 석 달이 되는 날이었다.

“산적 오빠, 좀 천천히 먹어요.”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상엽은 송연지가 선물처럼 끓여 준 라면을 먹었다.

어젯밤에 먹었지만 다시 먹는다고 그 맛이 실망스럽진 않았다.

“고마워.”

상엽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여기서 석 달 동안 한 번도 안 내려간 거예요?”

“응.”

“상점도 안 갔어요?”

“얼마 전에 다녀왔어. 소환권으로 부르기도 했고.”

“설마 그렇게 하고 다녀왔어요?”

“왜? 안 돼?”

“아우, 정말 내가 창피해서.”

송연지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옷이라도 좀 사 오지 그랬어요?”

“사 왔어. 열 벌이나 사 왔는데 하루를 못 견디더라고. 그래서 그냥 안 입고 있는 거야.”

바쁘게 대답을 한 상엽은 냄비를 들고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도대체 사냥을 얼마나 했기에 그래요? 석 달이면 그렇게 길지도 않은데, 군인들이 고맙다고 할 정도나 한 거예요? 그 정도로 할 수 있나?”

“보이는 대로 다 죽였어. 며칠 지나면 이 근처는 전부 정리될 거야.”

“설마 태백산을 완전히 소탕했다는 거예요?”

“응.”

“아우! 괴물!”

“나보다 강한 사람이 훨씬 많아.”

“하지만 오빠처럼 한 지역을 전멸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요?”

상엽은 그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전 의뢰하러 왔어요. 하루쯤 들어가야 할 거 같아요.”

“오늘 밤에는 못 보겠네.”

“빠르면 이틀 뒤에, 늦어도 3일 뒤에는 올 거예요.”

“알았어. 그때 보자. 조심하고.”

상엽은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저기, 산적 오빠.”

“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한 번쯤 물어보는 게 어때요? 나 열 받으려고 그러는데.”

“3일 후에, 그때는 이 구역 정리도 끝나.”

“진짜요?”

“응, 그때 보자.”

송연지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각자의 길로 갔다.

상엽은 8구역으로 갔다.

마지막 구역. 이곳은 2구역과 비슷한 멧돼지 구역이다. 다만 개체 수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럼에도 상엽은 거침이 없었다.

지난 석 달 동안 그가 획득한 코인은 무려 5만 4천 코인이었다.

첫 달은 하루 500코인.

둘째 달은 하루 600코인.

셋째 달은 하루 700코인을 목표로 잡았다.

이 코인으로 상엽은 신체 강화 8단계, 신체 개조 8단계를 완성했다.

여기에 든 코인만 4만 4800코인이었다.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다녀온 것이다.

상점 소환권은 오직 레나에게만 해당됐기 때문이다.

소환권 사용은 스킬을 강화하는 데 사용됐다.

스트라이크 5단계.

2단계를 올리는 데 든 코인은 7200코인이었다.

반면 고스트 실드는 강화할 수가 없었다. 잡화를 사느라 코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달빛 캔디가 의외로 효율이 좋아서 상엽은 이를 자주 복용했다.

3일 동안 허기짐이 없어지고 수면도 하루 2시간으로 충분했다.

밥을 먹고 싶은 욕구는 참아야 했지만 시간을 절약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됐다.

‘고스트 실드도 5단계까지만 가자.’

어제 오후에 레나를 불러 잡화를 사느라 상엽이 현재 가진 코인은 400코인이 전부였다.

‘4800코인.’

고스트 실드 5단계까지 가는 데 필요한 코인이었다.

상엽은 이를 위해 다시 사냥에 나섰다.

8구역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5단계 스트라이크가 펼쳐졌다.

그의 스트라이크는 5미터를 돌진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헬카누스의 습격: 스트라이크

4단계-3미터를 전진하며 타격 지점에 폭발을 일으킨다.

5단계-5미터를 전진하며 타격 지점에 큰 폭발을 일으킨다. 전진하는 속도가 크게 상승한다.

스킬도 신체 강화와 마찬가지로 5단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스트라이크로 전진하는 속도가 3배로 늘었고 웬만한 변종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속도가 증가하며 위력도 크게 상승했다.

“어딜 도망가?”

상엽은 멧돼지가 빛으로 흩어진 자리를 다시 한번 보았다.

“적당히 좀 할 걸 그랬나?”

해머가 떨어진 지점에 지름 3미터의 폐허가 생겼다. 그 충격으로 인해 자신도 중심을 잃을 때가 있었다.

완전히 뒤집어진 땅에서 빠져나오던 그는 잠시 뻐근한 근육을 풀었다. 스트라이크는 위력이 증가된 만큼 연속으로 사용하면 근육에 충격이 남는다.

조금 전도 여섯 번을 단시간에 사용한 탓에, 어깨와 팔꿈치가 뻐근했다.

“후우.”

근육이 진정되길 기다리며 상엽은 잠시 바닥에 앉았다.

“아, 라면 먹고 싶다.”

캔디에 익숙해지던 상황에 라면을 먹고 나니 맛있는 음식이 생각났다.

“순대, 떡볶이, 오징어 튀김, 김치찌개, 핫도그, 햄버거…….”

크앙!

그의 소망은 갑자기 들리는 메아리로 인해 사라졌다.

“뭐야?”

상엽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먼데, 여기까지 들린다고?’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맹수 같은데.”

지금까지 태백산에서 만난 최고의 맹수는 멧돼지와 족제비였다.

특히 족제비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 중에 담비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특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행동도 빠르고 똑똑한 데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은신에도 탁월했다. 그런데 지금 상엽이 듣는 울음소리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뭐지? 태백산에 맹수가 있다고?’

상엽은 자신이 봤던 태백산 정보를 떠올렸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기사가 떠올랐다.

-표범 흔적 발견.

한국은 예전부터 표범의 서식지였고 기록만 살펴봐도 꽤 많은 개체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멸종되었다고 알려졌다.

‘설마 표범이 아직 있었다는 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태백산 심마니들이 표범 발견.

-강가에 표범 발자국과 배설물 발견.

기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되진 않았다.

“잠깐.”

상엽은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지워진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연지가 간 방향인데.”

그는 휴식을 그만두고 산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