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상엽은 화이트 해머를 꺼냈다.
‘젠장.’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의뢰가 그냥 완료되다니.’
두더지를 잡는 순간, 화이트 코인이 생겼다. 이는 의뢰에 대한 보상이었다.
상대에게 헌터 아이가 있다면 분명히 화이트 코인을 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 해머를 꺼낼 수가 없었다.
“많이 다쳤나?”
상대는 보란 듯이 화이트 소드를 꺼내 들었다.
‘운이 좋았어.’
운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움직이지 말게.”
상대는 화이트 유저임을 확인하더니 빠르게 다가왔다. 상엽은 경계를 하면서도 접근을 막지는 않았다.
“상처를 좀 봐도 되겠나?”
사내는 2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그도 경계를 하는지 더 이상은 다가오지 않았다.
상엽은 팔뚝을 묶었던 셔츠를 걷어 냈다. 그러자 다시 출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정령의 가루를 사지 않은 건가?”
그레이 상점 잡화점에 있는 물품이었다.
손가락 하나 크기의 작은 호리병에 분홍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지금은 없어요.”
“그럼 일단 이걸 쓰게.”
그는 접근하지 않고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술처럼 병 하나가 나타났다.
‘저건 뭐지?’
상엽은 아공간 창고를 알지 못했다.
“어서 바르게. 위험할 수도 있으니.”
상엽은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코인 낭비라는 생각도 있었다.
레나도 이를 별로 문제 삼지 않았기에 그는 처음 방문 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쓸모없는 건 없으니까.’
이를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괜찮아요. 돌아갈 정도는 될 거 같아요.”
상엽은 다시 상처를 감싸며 대답했다.
‘믿으면 안 돼.’
같은 화이트 유저라고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다. 상엽은 사내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럼 어서 움직이게. 위험할 것 같은데.”
사내도 상엽의 반응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럼 가 볼게요. 또 봐요.”
“그래, 또 보세.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말씀하세요.”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사내는 사진 한 장을 꺼내 상엽에게 보여 주었다. 상엽은 사진의 인물이 누군지 분명히 알아봤다.
‘김만득.’
알고 있음에도 상엽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봤으면 무사하지 못했겠지. 실례했네. 그럼 또 보세.”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어젯밤에 동료가 실종됐네. 아무래도 이 녀석이 범인인 거 같아서 말이야.”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네. 어서 가 보게.”
상엽은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처리할 게 있다더니 그게 사람이었구나.’
상엽은 김만득의 말을 떠올렸다. 그냥 변종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이 실제로는 사람이었다.
‘경쟁.’
금산에서의 사흘은 그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 * *
“에휴, 또 병원이에요? 간호사로 취직이라도 하지 그래요?”
“따뜻한 인사 고마워.”
방어선에 도착한 상엽은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출혈이 꽤 많았는데, 하루 만에 꽤 괜찮아졌다. 그래서 퇴원을 하려는 순간에 송연지가 왔다.
“의뢰는 완료했어요?”
송연지는 헌터 아이가 없어서 상엽의 코인을 보지 못했다.
“완료했어.”
“유물이나 유산은요?”
“못 찾았어.”
“어휴! 아까워라!”
상처가 컸던 상엽은 유물이나 유산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난 일단 서울로 갈 거야. 넌 사냥터에서 온 거야?”
“산적 오빠 보러 온 건데요. 그리고 금산 사냥터는 제가 들어갈 곳이 아니에요.”
“왜?”
“위험하잖아요. 아직 저한테는 무리예요.”
상엽은 그제야 갓코인 유저들이 위험 사냥터를 구분해서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산적 오빠 정도면 부상 없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산에서 버티던 사람이 금산 정도에 다치다니.”
“상처가 나빴어. 약도 없었고.”
“그래도 다행이에요. 병원이라고 해서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런데 회복이 정말 빠르네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강화를 몇 단계나 한 거예요?”
그들은 서로의 스킬이나 강화에 대해서 자세히 묻지 않았다.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10단계는 훨씬 넘은 거 같은데.’
송연지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상엽의 신체 강화가 겨우 5단계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비밀이야.”
“쳇, 치사하게.”
“널 위해서 난 묻지 않을게.”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넌 이제 어쩔 거야? 단순히 병문안으로 오진 않았을 텐데.”
“대구에 갈 일이 생겨서요. 가는 길에 들렀어요.”
“알았어.”
상엽은 간단히 대답하며 병원을 나섰다.
“쳇, 나쁜 놈도 아니면서 나쁜 남자처럼 구네.”
송연지는 불만을 삼키며 상엽의 뒤를 따랐다.
상엽이 의뢰를 완료하고 레나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가진 코인은 840코인이었다.
300화이트 코인에 540그레이 코인이었고 이걸로는 어떤 강화도 할 수 없다.
새로운 스킬을 살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는 레나를 찾아왔다.
“용케 살아왔네.”
레나는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가죽 치마에 액세서리가 많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검은 가죽에 빨간 립스틱과 귀걸이가 자극적인 느낌이었다.
다리를 꼬며 무릎에 턱을 괸 그녀는 상엽을 보며 놀리듯 물었다.
“죽기 전에 유언이라 생각하고 비밀을 말해 주는 게 어때?”
“아직 안 죽어.”
“아니, 넌 곧 죽을 거야. 의지만 강하지 똑똑하진 않거든.”
“안 죽는다니까.”
“그럼 내기할래?”
레나는 상엽을 도발했다.
“무슨 내기?”
“넌 20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야. 무식하게 도전만 하다가 한 방에 가는 거지.”
“뭐?”
“20살만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한다면서? 그런데 그 시간은 안 올 거야.”
지금까지 덤덤히 받아넘기던 상엽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를 느끼고 온 탓에 레나의 말에 짜증이 치밀었다.
“만약에 내가 안 죽으면?”
“20살이 되는 날, 하루 동안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줄게. 뭐든지.”
“그 말 후회할 텐데.”
“대신 너는 그 비밀을 걸어. 유언을 남기는 거지.”
“왜 그렇게 내 비밀에 집착하는 거지?”
“전 세계에 너밖에 없으니까. 그 비밀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
상엽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어차피 죽으면 다 소용없는데. 좋아.”
“화끈한 건 마음에 들어.”
“그런데 조건을 바꿨으면 해.”
“어떻게?”
상엽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하루는 너무 짧잖아. 내년 3월까지 내가 살아 있으면 일주일을 주는 걸로. 어때?”
내년까지는 4개월이 남았고, 3월이면 7개월이 남았다.
“알았어.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그럼 유언부터 남길래?”
“좋아.”
상엽은 레나와 내기에 합의했다.
레나는 상엽 앞에 수정구 하나를 내밀었고, 간단히 설명을 했다.
“아르난의 수정구. 기억을 저장하는 거야. 네가 동의하면 기억이 저장되고, 죽게 되면 누구든 이 기억을 엿볼 수 있어. 물론 수정구는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3월이 되면 내가 돌려받는 건가?”
“맞아. 이걸 돌려받게 되면 내 일주일도 함께 받는 거지.”
“좋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이겨도 상점에 관련된 건 해 줄 수 없어. 이해하지?”
레나의 개인 시간만 가진다는 뜻이었다.
“충분해.”
“그럼 계약 성립.”
레나는 수정구를 상엽에게 내밀었다. 상엽이 이를 받자 수정구의 빛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사라지며 수정구 내부에서 검은 연기가 떠돌았다.
“쳇, 내 기억이 이렇게 기분 나쁘게 생겼다니.”
수정구를 돌려받은 레나는 벌써 내기에 이긴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에 상엽은 레나를 따라 하듯 비웃으며 물었다.
“뭐든지라고 했어. 맞지?”
“맞아.”
“난 20살이 되면 질펀하게 놀 거라고 했고.”
“기억해.”
레나는 상엽의 지적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자, 그럼 빨리 볼일 보고 나가 줄래? 그래야 빨리 죽을 테고, 난 이 기억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알았으니까 상점이나 열어.”
상엽은 곧바로 상점의 잡화 목록을 살폈다.
최하급 상점에 있는 물품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
-정령의 가루: 지혈 진통제 300코인
-잿빛 주문서: 상점 소환권 300코인
-흑점의 피부: 1회성 유물 보관함 500코인
-차원의 물방울: 초소형 아공간 가방 1000코인
-달빛 캔디: 피로 회복 영양제, 100코인
당장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직접 의뢰를 가기 전에는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한 물품이기도 했다.
“가방을 제외하면 모두 1회성이야. 유물 보관함은 하나의 조각을 유물 탐지에 걸리지 않게 해 주는 거야.”
“상점 소환권은 뭐지?”
“말 그대로야. 구입한 상점이 눈앞에 나타나는 거지.”
“널 부를 수 있다는 거네.”
“맞아.”
모두 좋은 효과가 있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정령의 가루, 잿빛 주문서, 그런데 달빛 캔디는 뭐야?”
“복용하면 3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피로가 꽤 회복될 거야. 수면 시간도 줄어들 거고.”
“캔디도 2개.”
“그럼 의뢰를 받을 코인이 없는데?”
“의뢰는 됐어.”
상엽의 말에 레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설마 그냥 계속 숨어 있으려는 거야? 내기에서 이기려고?”
“더 효율적으로 하려는 것뿐이야.”
“그게 뭔데?”
“내가 노가다꾼이거든.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상엽은 원하는 물품을 사고 레나의 대기실을 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태백산 계곡이었다.
예전처럼 배낭을 대충 숨겨 둔 그는 익숙한 풍경을 둘러보았다.
“일단 여기부터 정복하고 간다.”
그는 의뢰를 수행하면서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변종의 숫자가 적었고, 간헐적으로 만나는 다른 사냥꾼들도 문제였다.
“버는 돈은 적고, 위험은 크고. 수지 타산이 안 맞아.”
상엽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냥꾼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고 반박할 결론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 난 노가다야.”
상엽은 이곳에서 변종들을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다만 이럴 경우, 두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유물과 유산.
이것은 갓코인 유저들이 생명처럼 집착하는 물품이었다. 유물과 유산은 여러 가지 효용과 때에 따라선 단번에 갓코인을 뻥튀기시켜 주기도 한다. 하지만 상엽은 이를 모두 포기하기로 했다.
“매일 연장을 휘두르면 공사는 언젠가 끝나는 법이거든.”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한 상엽은 화이트 해머를 꺼냈다.
“반드시 살아서 누나를 살린다.”
그는 의지를 다지며 숲으로 들어갔다.
상엽은 목표를 세웠다.
‘하루에 500코인.’
10코인 변종은 50마리를 잡아야 하고, 20코인 변종이라면 그 절반을 잡아야 한다.
“목표 강화까지 사냥만 한다.”
가장 익숙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예전보다 목표가 조금 더 확고해졌다.
“좋아, 태백산의 변종들을 전멸시켜 주지.”
예전에는 가능하면 변종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싸우기보다는 소장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다.
사냥만 생각한다면 그에게 태백산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물론 위험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만득이 아저씨처럼 지도도 만들어야겠어.”
상엽은 태백산 주변의 지도를 꺼냈다.
“일단 계곡 주변부터.”
그가 최초로 지정한 8구역은 계곡이 중심이었다.
“그다음부터 깊이 들어가면서 난이도를 조절하자.”
등산로 근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도 있었고 계속해서 순찰과 감시 태세가 유지된다.
때문에 변종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등산로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첫 번째는 소백산까지 달려 볼까?’
그는 변종을 찾아 태백산에서 소백산까지 이동할 계획이었다.
‘지금은 사냥꾼을 만나는 게 더 위험해.’
그는 홀로 산속에서 만족할 만큼 성장할 생각이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우선 계곡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사 시작.
상엽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공사를 하듯 하루 일정을 무조건 소화했다.
첫날은 500코인을 맞추기 위해 하루를 꼬박 소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은 줄어들었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변종이 많은 지역으로 들어갔고, 추격하는 능력도, 피하는 능력도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상엽은 소장을 찾느라 설정한 8구역 중에 6구역으로 들어갔다.
지난 9일 동안 그가 모은 코인은 정확히 4500코인.
하루 목표량을 어떻게든 채우고 있었다.
‘역시 노가다가 최고야.’
그런데 6구역에 들어선 그는 지금까지와 달리 까다로운 상대를 만났다.
“역시 난 속도전에 약해.”
족제비가 최상위 포식자였고 그 밑으로 다람쥐, 들쥐 같은 설치류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정신 차리자.”
개체 수도 많고 속도전과 기습에 능한 것이 6구역 변종들의 특징이었다.
“다 나가. 이제 내 구역이야.”
상엽은 거침없이 6구역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