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4화. 강진시 물리치료사 >
작은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밀실, 나무 테이블을 두고 두 여자가 마주앉아 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증오 가득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살하고 싶어요.”
충격적인 말에도 맞은편 여자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여자의 차가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에 여학생이 살짝 놀라더니 이내 곱씹듯이 말을 이었다.
“···그냥 짜증나서요. 내가 유서 쓰고 죽으면··· 걔네는 평생 괴로울 거 아니에요. 살인자 꼬리표 달고, 그렇게라도 복수를···.”
“아니.”
여자는 학생의 말을 끊었다.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아, 살인자 꼬리표도 한 달이면 모두에게 잊혀질 걸, 그럴 애들이었으면 널 괴롭히지도 않았겠지.”
학생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경멸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세련된 옷차림, 깔끔하고 단정한 머리, 고가의 안경테, 딱 보아도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았고 부모 잘 만나서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나이에 우리나라 최고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그쪽이 뭘 알아요?”
학생의 울분 섞인 말에 여자는 멈칫했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살, 그거 되게 아파, 아파트 옥상이면 한 번에 콱 죽어야하는데 안 죽더라,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도 안 나와, 1분이 천 년같아, 지옥이 다른 게 지옥이 아니야, 죽기 직전 그 고통, 그게 지옥이지.”
“······.”
학생은 여자의 구체적이고 담담한 설명에 말없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여자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 그 말은 직접 겪어본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학생은 본능적으로 여자가 자신과 동일한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어요?”
“콱 다 죽여버리고···.”
여자가 한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학생이 흠칫 놀랐다.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경찰 도움 받았지.”
경찰이라는 말에 학생의 눈빛에 실망감과 허무함이 감돌았다.
“견찰··· 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충 수사하고 가해자의 부모들에게 구슬림당하여 물러났을 뿐.
그러나 학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지 여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진짜 경찰을 만났거든, 나 대신 분노해주는 경찰, 나 대신 가해자들 지옥으로 보내줄 경찰, 참 경찰.”
“에효··· 요즘 그런 경찰이 어디 있···.”
그때, 여자가 휴대폰으로 어떤 동영상을 하나 틀었다. 뉴스 영상이다.
작은 밀실에서 영상의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6년 만에 기적, 범죄율 1위 강진시가 6년 만에 대한민국 최저 범죄율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경찰관들이 입을 모아 강진서 특수팀에게 공을 치하했는데요. 특수팀은 일명 해수팀으로 스타경찰 신해수 경감이 이끄는 강력범죄전담 특별수사팀을 지칭합니다.
-특수팀은 올해 3년 만에 범죄율이 55프로 상승한 고당시 중부서로 파견이 잡혔습니다. 많은 고당시 시민들이 해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뉴스 영상에는 조폭인지 경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나와 기자들 앞에서 사진이 찍히고 있었다.
그중 가장 무섭게 생긴 남자가 손을 들어 살짝 휘젓자 기자들이 홍해 갈라지듯이 주루룩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여학생은 그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건 갑자기 왜 보여주는데요.”
여자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날 살린 경찰이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번에는 내가 널 살려줄게.”
여학생은 무언가 떨떠름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말이 신뢰가 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 일상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학생이 나가고, 여자는 겉옷을 챙겨입고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때, 중년 남성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함유리 교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함유리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빠! 여긴 왠일이야?”
“우리 딸 보고싶어서 왔지!”
함유리는 아빠와 살갑게 포옹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그 교수님이라는 호칭 좀 빼면 안 돼? 딸인데 안 친해보이잖아.”
“에이 왜, 나는 교수님이 좋아, 누구 딸이 교수님인 사람 나와보라고 해!”
“아 조용, 조용히 좀.”
“오늘은 상담 어땠어?”
“어, 옛날 생각 나게 하는 아이였어.”
함유리의 말에 아빠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죄책감이다. 그 모습에 함유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빠, 나 그때 생각하면 힘들지 않아, 오히려 좋지, 지금까지 달려오게 해준 원동력이잖아.”
“그래, 그렇구나, 고맙다. 고마워, 그분께도···.”
함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그분께도···.”
* * *
고즈넉한 한옥, 한 중년인과 젊은 여자가 툇마루에 앉아 사과를 베어먹고 있다.
“딸랑방구.”
아그작 아그작
여자, 경기북부경찰서 팀장 조아라는 뚱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사과를 씹어먹고는 느지막히 대답했다.
“아빠, 그렇게 부르지 마,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몇인데? 아빠가 보기에는 아직도 기저귀 차야 할 것 같은데?!”
“기, 기저귀, 하··· 내가 올해 서른··· 됐다. 됐어.”
“아직 앞줄이 삼이면 청춘이지, 만나는 남자는 없어?”
조감찬 의원의 말에 조아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가 돌연 사과를 집어던졌다.
“데려오는 족족 아빠가 다 쳐냈잖아! 얘는 힘이 약하다! 얘는 방범정신이 투철하지 않다! 얘는 인상이 너무 선하다! 얘는 인상이 너무 더럽다!”
“응? 그랬나? 하긴 좀 그렇긴 했어, 데려오는 애들마다 왜 다 기생오라비마냥 비쩍 마르고 인상도 좀··· 남자면 어? 자고로 범인들 몇 명쯤은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어야 하는 법이야.”
조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효··· 어련하시겠어요. 나도 물어봤었다니까, 내가 까였다고, 제발 그 남자 좀 포기하세요.”
“응? 뭘? 누구 얘기하는 줄 알고? 나 딱 정해둔 사람같은 거 없는데?”
“없기는 뭐가 없어! 원하는 게 딱 신해수 그 사람이랑 똑같잖아! 아주 그냥 그 사람한테 꽂혀가주구 다른 남자 백 명을 보여줘도 마음에 안 든다고···.”
조감찬은 투덜거리는 조아라의 말을 들으면서 부정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의 마음 속 기준이 신해수였던 듯하다.
“아니 근데 신해수 걔가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우리 이쁜 딸이 직접 말했는데 거절했다고? 감히? 아니 왜? 이거 이거 안 되겠구만!”
조감찬이 당장에 휴대폰을 꺼내어 연락처에서 신해수를 찾았다. 조아라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아니, 됐어 됐어!”
“아냐! 이놈은 혼쭐을 내야···.”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내가 만나볼게 내가.”
그제야 조감찬이 통화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멈추었다.
“딸랑방구가?”
“후··· 그래.”
입을 비죽 내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아라도 신해수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 우직한 성격과 시원시원한 타격력이 호감으로 다가왔다.
다만 3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조아라이기에 까이고 나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접근을 못했을 뿐이다.
‘용기있는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
조아라는 마음을 다잡고 신해수의 특수팀이 단체로 발령 난 고당시 중부서로 향했다.
오랜만에 샤랄라한 원피스에 킬힐로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각선미가 부각되는 옷차림을 했다.
지나가는 남정네들의 시선이 떼어지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죽지 않았음을 느끼며 정문에서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섯 시 반이 넘었는데도 그가 나오지 않았다.
“설마 야근하는 건 아니겠지? 전화 한 번 해봐야하나? 외근 나갔나? 아 생각해보니까 너무 무턱대고 찾아왔나?”
그렇게 혼잣말을 연발하고 있을 때, 마침 본관 문이 열리며 조폭으로 의심되는 덩치 여럿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 두목 포스를 풍기는 신해수가 보인다.
조아라는 그제야 방긋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타다다닥-
그때, 바람과 함께 누군가가 그녀의 옆을 스쳐갔다. 풀잎처럼 좋은 향이 뒤늦게 느껴졌다.
여성이다. 몸에 딱 붙는 레깅스에 후드티, 날씬하지만 적당량 이상의 근육이 붙어있는 이상적이면서도 무언가 파이터의 기운이 느껴지는 몸.
그 여성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마지막 계단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방향의 끝에는 신해수가 있었다.
“해수님!!”
신해수는 눈썹도 꿈틀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왼쪽 다리를 뒤로 빼고 두 손을 펼쳐 그녀를 받았다.
그녀는 매미처럼 두 팔과 다리로 신해수를 감싸안고 매달려 있었다.
해수는 익숙한 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몇 초 있다가 내려놓았다.
“기다리지 말라니까.”
“기다리는 게 더 재밌습니다.”
조아라는 그것을 보고 여동생인가 싶었다. 그런데 듣기로는 해수는 외동아들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보는 해수의 눈빛이 착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흠···.”
조아라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서 해수의 집과는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고당시의 한 넓은 삼겹살 가게.
신해수와 우강철, 신입에서 막내로 인정받은 김하민까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신해수가 집게를 들어 고기를 구우려고 하자 우강철이 기겁하며 그것을 빼앗으려 들었다.
“어엇, 세계적인 스타 선배님이 고기를 구우신다니요. 제가 굽겠습니다!”
“앉아, 이런 데서는 상급자가 하는 거야.”
“그러지 마시고···.”
“내일부터 특별훈련 들어갈까?”
특별훈련이라는 말에 김하민의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고, 우강철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해수가 말없이 고기를 굽고 있을 때, 익숙한 중년인 두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해수가 집게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형님들 오셨습니까!”
해수의 행동에 우강철과 김하민도 재빨리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딱 보아도 근육이 터질듯한 사내 세 명이 다른 중년인 두 명에게 90도로 인사를 한다. 그 모습은 가게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렀다.
“뭐야··· 또 조폭이야? 아 가게 잘못 골랐네, 나갈까?”
“벌써 굽고있는데 뭘 나가? 빨리 처먹기나 해, 뭔 일 나기야 하겠어?”
구석에 어떤 덩치들에게는 긴장감을 일으켰다.
“우리 애들은 아닌데, 얼굴은 낯익은데···.”
“알아볼까요. 형님?”
형님이라 불린 사내는 고민하다가 그들의 덩치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신해수 일행이 맞이한 중년인 두 명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터덜터덜 다가왔다.
“우하하핳!! 이게 얼마만이냐 돌격아! 근육몬 출동!!”
“출동입니다! 삐용삐용!”
“어이 신해수, 잘 지냈어? 팀장 생활 좀 적응했나?”
그들은 바로 곽반장과 오갱이었다. 서가 떨어진만큼 몇 개월만에 모이게 된 것이다.
해수가 그들의 앞접시에 고기를 한 점씩 놓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모이니까 예전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허, 허허 우리 돌격이 봐라, 좋다는 말도 할 줄 알고, 많이 편해졌나보다?”
오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캬 그러니까, 그거 생각난다 그거, 우리가 회식하고 있는데 그 뭐냐 용용파?”
“동동파.”
“그래 그 동동파 애들이 갑자기 피···.”
그때, 뒤쪽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들 선창혀라! 이 강냉이파가 고당시를 박살낸다!!”
“박살낸다아!!”
툭-
그 말에 이제 막 고기를 한 점 집어서 입에 넣으려던 해수의 손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형사들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저벅
신해수를 필두로 특수팀 형사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은 어림잡아 스무 명 쯤 되어보이는 덩치들, 그들은 해수의 근육에 멈칫했지만 숫자를 믿고 거들먹거렸다.
“뭐냐, 어디 식구여?”
우드득 우드득
맨 앞에 선 해수가 목관절을 풀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간단한 대답에, 덩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 강진시 물리치료사다.”
(외전 完)
이제까지 [경찰이 너무 강함]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 김기세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