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화. 급변하는 대성그룹 >
대성그룹 안기원 회장은 신해수의 반협박과 딸 안서은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뒤늦게 개과천선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칠성회의 한 기둥으로써 벌였던 죄들이 씻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넓은 거실, 소파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이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고, 맞은편 젊은이는 굳은 얼굴로 중년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인의 입술이 힘들게 떼어졌다.
“내가··· 자수하겠네, 조금만 시간을 주지 않겠나.”
“···기다리겠습니다.”
안회장은 약속했고, 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그의 딸 안서은을 생각하여 최대한의 존중과 배려를 표한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아지트.
-···대리는 준비했나.
아지트에 안회장의 착잡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정영수가 목에 걸치고 있던 헤드셋을 썼고, 해수도 가까이 다가와 이어폰 한 쪽을 귀에 끼웠다.
영수는 해수를 보며 외부 스피커 소리를 줄이고 이어폰 소리를 키웠다.
해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안회장을 배려해주기로 했으나 믿는 것은 아니다. 나쁜 길로 들어섰던 자는 언제 다시 그 길로 갈지, 아니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수는 안회장의 휴대폰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고, 직접 경찰에 출두하기 전까지 도청 중이었다.
“대리···.”
대리라는 말에 해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과 같은 때에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단어다.
그때,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회장님···
-실력은 확실하겠지?
-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비서의 목소리 끝이 떨려온다. 해수는 안회장이 비서의 설득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들려온 안회장의 목소리는 굳건했다.
-나를 오래 봐오지 않았나? 나는 한 번 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아, 그게 이 안기원이, 대성그룹이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야.
-···알겠습니다. 인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돈은 섭섭지 않게 주고, 돈이 적으면 제대로 일하지 않는 게 사람이야.
-예··· 회장님.
안회장과 비서의 대화가 끝나고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를 들어보니 거의 확실해보였다. 돈을 주고 안회장의 대리를 내세워 그간 지었던 죄를 자수하게 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보인다.
해수는 착잡한 눈으로 차가운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영수가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형님··· 괜찮아요?”
해수는 영수의 부름에도 대답 없이 가만히 있다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야지, 넌 그 대리가 누구인지 찾아보고, 쪽새한테 연락해서 안회장 비서 미행 붙여, 난 장수 이놈 만나러 간다.”
“···넵, 알겠습니다.”
영수가 의자를 돌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리던 그때, 해수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떤 액션도 취하지 마, 대비만 하는 거야.”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수는 해수의 명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고 씁쓸하게 대답했다.
* * *
황장수는 요즘 아지트 일은 제쳐두고 안서은의 경호에만 열심이었다. 가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안회장 경호도 나갔는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안회장과 막역한 사이처럼 보여 주변인에게 충격을 준다고 한다.
해수에게 안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장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영감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모르는 소리, 너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안회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았는지 수도 셀 수 없다.”
“흠··· 과거는 뭐 나도 천하에 개새끼인데 뭐. 그래도 내가 나름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데, 지금 안회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좀 더 지켜봐.”
장수의 확신에 찬 눈동자를 보고 해수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도··· 네 감이 맞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뭐든 나오면 알려주고.”
장수는 검지와 중지를 펴서 경례하는 자세를 취하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바나나우유를 들었다.
“알겠어, 스파이짓 열심히 할게, 쬽쬽.”
* * *
정영수가 안회장이 말한 대리라는 사람을 찾은 것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비서와 직접 접촉하고, 계약서까지 쓴 것을 보면 그가 대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확실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해수가 대리라 불린 자의 사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몇 살이라고?”
“서른하나요. 경력도 좀 이상하고··· 아무래도 헛다리 짚은 것 같아요. 그 비서도 동네 카페에서 직접 만난 걸 보면···.”
“치밀하군···.”
해수와 영수는 페이크를 의심했다. 분명 실질적인 인물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수가 더 찾아보았지만 대리로 의심될 만 한 다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대성그룹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 자리에 신해수도 있었다.
기자들은 대성그룹이 일언반구 없이 자신들을 부르자 궁금증에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대체 무슨 일이야? 기자 역대급으로 많이 불렀는데?”
“뭐 큰 합병이라도 있나? JK건?”
“아주 큰 건이라고 바람만 잡았지 뭐 감이 오는 게 없어.”
“아 궁금해 죽겠네.”
“뭐가 나오든 시시한 거면 죽을 준비 해라, 대성.”
그때.
저벅 저벅 저벅
기자들의 기대 속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비서와 임원진을 대동하고 나타난 안회장 본인이었다.
해수는 그가 대리라고 말했던 자가 나타나지 않고 본인이 나타나자 살짝 놀란 눈으로 안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단은 이르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게 결정지어질 테니.
척
안회장이 회견장 가운데에 자리잡고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착석하여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성그룹 회장 안기원입니다···.”
해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안회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선택이 무엇인지··· 한 번 내놓아보십시오.’
그리고 드디어, 안회장의 입이 열렸다.
“우리 대성은, 아니, 저 안기원은··· 그동안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천선생의 손아귀에 놀아나며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협조하고, 대한민국에 민폐를 끼쳤습니다.”
촤좍! 촤좌좌좌좍!!
가히 폭탄발언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구체적인 죄목이 나열되지도 않았는데 기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지금 기자님들께 우리 임원들이 직접 나눠주는 프린트에는 그동안 저지른 범법행위가 나열되어 있고, 제가 들고 있는 이 USB에는 구체적인 사항이 자세히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 안기원이 허락 및 지시한 것이고, 그에 따른 죗값을 달게 받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는 약속한 듯이 임원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유례없는 상황에 기자들은 미친 듯이 사진과 영상을 찍었고, 몇 초간 숙이고 있던 안회장이 허리를 펴고 USB를 들어보였다.
“저는 이것을 이 자리에서 곧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무서운 경찰에게 넘기고 자수를 할 것입니다.”
그가 돌연 회견장 테이블에서 벗어나 기자들에게 다가왔다. 기자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그의 목적지로 시선이 쏠렸고, 그 끝에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범죄자같은 덩치 큰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걸 받아주시오. 형사님.”
해수는 충격적인 안회장의 행보에 얼떨떨하게 있다가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USB를 보고는 모자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장과 USB를 몇 번 번갈아 보다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렇게, 역대급 사건으로 기록될 대기업 회장의 기자회견 자수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 * *
해수가 바로 수많은 기자들의 눈을 달고 경찰서로 가서 확인한 결과, USB 내용은 충실했고 증거도 알아보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특이했던 것은, 모든 범법행위에 안회장의 영향이 있었다는 증거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해수는 잠깐이나마 안회장의 진심을 의심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그럼··· 대리는 대체 뭐야?”
해수는 대리에 관한 진실을 취조실에서 김비서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 그, 혹시 신형사님 엑시트 모바일이라고 아십니까?”
해수는 문득 하루가 열심히 하던 게임이 떠올랐다. 아마 그 비슷한 이름인 듯했다.
“요즘 회장님이 그 게임에 푹 빠지셔서, 몇 달 동안 상당한 시간을 거기에 쏟아부으셨죠.”
“···회장님이요?”
“네, 회장님은 미래를 내다보셨고, 자신이 형을 살 동안 회장님의 캐릭터를 대신 육성시킬 대리인을 구하셨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도록 계약서도 작성하고 공정하게 고용했습니다.”
해수는 허탈하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야 그 대리라는 사람의 신상과 경력이 이해가 된다. 표면상 백수였지만 게임계 경력이 가득했던···
“게임이었다니, 엑시트 그 게임은 대체···.”
해수는 난생 처음으로 엑시트 게임을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 * *
안회장의 실형은 그 기자회견에서 발표되었던 내용과 파급력에 비해 매우 약소했다.
대신, 피해자들을 향한 보상, 추징금이 어마어마했다.
피해자들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그 시기가 언제인지까지 따져 보상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거기다 판결 직후, 재심하여 더 큰 실형을 때리라던 격분한 네티즌들도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대성그룹의 행보는 확실했다.
자신이 피해를 당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은 갑자기 몇 배로 불려서 들어오는 보상금에 꽁돈을 받은 듯이 기뻐했고, 분위기는 서서히 반전되다 못해 하늘로 치솟았다.
안회장의 실형과 어마어마한 보상금으로 인해 이미지가 세탁된 대성그룹은 이번 기회로 인해 더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으로 이미지가 거듭난 것이다.
기자회견 이후 주가가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 파산 직전이었던 대성그룹은 불과 2년 만에 거의 정상화가 되었다.
그러나, 대성, 아니 대성E&M의 대표이사 안서은의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콰광!
안서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거칠게 쓰러졌다.
“삼엔?!!”
안서은이 이토록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본 강비서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네, 네··· 그, 엑시트 모바일이 세계시장에도 통할 것 같은 싹을 보이니까, 공격적 인수작업에 들어간 듯 보입니다.”
안서은이 커다란 눈을 무섭게 뜨며 중얼거렸다.
“내가 게임은 엑시트가 처음이어도 삼엔의 악명은 우리 길드원들한테 귀에 피가 나도록 많이 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현질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게임을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고!”
“맞습니다. 조사해보니 삼엔사 게임은 확률이 0.001도 안 되는 뽑기와 강화 실패하면 아이템이 아예 소멸되는 캐시템같은 걸 들이대면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뒤쳐지기 때문에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고통스럽게 결제를 하는 게임들을 찍어낸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유저수는 적지만 매출이 높은 거죠.”
서은은 들고 있던 삼엔에 관한 서류를 꾸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삼엔에 넘어가면··· 엑시트 모바일도 분명 그런 BM 시스템을 도입하고, 천천히 오염될 거에요. 유저들은 떠나고··· 결국 저도 게임을 떠나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마음만 먹으면 전서버 1위를 찍을 수 있을 만큼 자금력이 넘치는 안서은이기에 BM시스템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 악독한 BM시스템으로 인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지고 유저가 떠나고 게임이 망할까 두려운 것이다.
쾅!
서은은 작은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고는 비장한 눈으로 말했다.
“엑시트 모바일, 우리가 인수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