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마지막 리셋 >
리셋 전.
신해수는 그 끔찍한 비극을 견디며 한쪽 구석에 놓인 탁상시계를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이윽고 열두시가 아슬하게 넘었을 때, 천선생이 총을 들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기회가 왔다.
그 찰나에 수많은 고민이 스쳐갔다.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상황이다. 오히려 천선생이 시간을 돌린 것을 눈치채고 더 안 좋은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해수는 이제는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지는, 처음 리셋이 되던 때를 떠올렸다.
교도소에서 못이 박힌 각목이 머리통에 박힐 때였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이전에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기로 돌아갔었다.
결심을 마친 해수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다. 단 한 번밖에 없었지만 그 한 번에 모든 것을 건다.
해수는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 *
“···나처럼 운 좋은 어른 된다!”
시야가 선명해졌다.
다가올 미래는 상상도 못하고 눈앞의 곽반장은 그저 거들먹거리며 기뻐하고 있다.
해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가슴깊이 담았다.
그가 당할 때 깨달았다. 해수는 자기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허술하고 하찮은 반장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반장님.”
“···어? 어, 왜 돌격이, 뭐 부탁할 일 있어? 감귤초콜릿 사줄까? 오메기떡 사주리? 아니다, 그건 니가 돈 줘라.”
해수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뭐야? 싱겁게, 부러우면 부럽다 그래!”
해수는 곽반장을 말리지 않았다.
* * *
효성교도소 앞.
한 중년 여성이 쭈뼛쭈뼛거리며 새까만 고급 승용차에 다가갔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깔끔한 수트를 입은 남성이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여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에 탔다.
그녀 옆에는 선글라스를 쓴 신해수가 앉아 있었다.
“우리 아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방, 그러니까 마실장이라는 사람 없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방 사람한테 직접 들었대요. 무슨 뭐 다른 지역 지원을 나갔다나 뭐라나.”
“그렇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건 착수금입니다.”
해수는 오만원 권이 두둑히 들어있는 봉투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닌데 이렇게나 많이···.”
예상대로다.
해수가 직접 확인할 수도 있지만, 마실장이 효성교도소를 빠져나왔다는 것은 교도소에 아직 천선생의 영향력이 끼친다는 뜻이다.
해수가 마실장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위험할 수 있어 다른 이에게 부탁했다.
해수는 차에서 내리는 중년 여성을 바라보다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이 바로 일이 터지는 날이다.
오늘, 차 사고로 죽기 직전인 사내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리셋을 외쳤으나 되지 않았다.
예상하기로는 리셋 전 기준점의 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아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해수는 더욱 마음을 다잡고 시간 내에서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했다. 더 이상의 리셋은 없다.
“내일 저도 연차 씁니다.”
해수의 갑작스런 발언에 오갱이 당황해했다.
“어? 너도? 형님도 없는데 갑자기?”
“네.”
“아니 무슨, 너 혹시 형님 따라가냐?”
“아닙니다. 아무튼 씁니다.”
해수는 막무가내로 휴가를 들이밀었다.
어차피 3년 동안 거의 휴가를 쓰지 않았던 해수이기에, 오갱은 그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스윽-
해수는 퇴근할 때 자신의 총과 총알을 몰래 챙겼다.
* * *
드디어 D-DAY.
곽반장은 챙이 넓은 밀집모자에 꽃무늬 남방을 입은 채 입꼬리를 귀에 걸고 주차장에 나타났다.
가족들과 함께 짐부터 싣고 있을 때, 돌연 어디선가 해수가 불쑥 나타났다.
“아잇 깜짝이야! 돌격이 니가 여긴 웬일이야?”
“잘 다녀오십시오.”
해수는 그에게 신발 하나를 내밀었다. 메이커를 잘 모르는 곽반장도 딱 보기에 가격에 상당해보이는 명품 신발이었다.
“뭐, 뭐야 이건?”
“선물입니다.”
“갑자기?”
해수는 돌연 곽반장을 차 의자에 앉히고, 직접 그의 신발을 벗기고 새로운 신발을 신겼다.
“이건 제가 처분하겠습니다.”
“야, 야! 그거 내가 세일해서 19,900원에 산···!”
해수는 이미 곽반장의 헌 신발을 들고 멀리 사라진 상태였다.
곽반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와이프와 눈을 맞추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드르륵 철컥.
곽반장의 차량과 거리가 멀지 않은 으슥한 곳에 주차된 봉고차에 해수가 올라탔다.
“오셨습니까?!”
“오라이 오라이.”
봉고차 안에는 쪽새가 운전대를 잡고, 조수석에는 황장수, 뒷문 옆에는 하루가 앉아 있었다.
하루는 해수가 타자마자 방탄조끼를 건네주었고, 해수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안에 착용하고 겉옷을 입었다.
황장수와 하루, 쪽새까지 모두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삑 삑 삑 삑
네비게이션 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낯선 기기가 일정하게 음을 내고 있다. 화면에는 네비게이션처럼 지도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빨간 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 봉고차가 아닌, 곽반장의 위치였다.
“따라붙어.”
“옛썰!”
곽반장의 차를 쫓아가는 길, 해수는 하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품에서 총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하루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받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해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그 가느다란 손에 총을 억지로 쥐여주었다.
해수가 그렇게까지 하자, 하루는 거부하지 않았다.
“마실장 보면, 주저없이 쏴라.”
“···네.”
천선생이 보낸 회사원들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곽반장 가족이 공항 주차장으로 들어가자마자 검은색 밴 두 대가 따라붙었다.
끼이익-
지하1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곽반장의 차가 지나가자마자 회색 봉고차가 밴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곽반장의 차는 쭉 앞으로 나아갔다.
클락션을 눌러도 회색 봉고차가 꿈쩍하지 않자, 밴에서 회사원들이 우르르 내렸고, 봉고차에서는 해수와 하루, 황장수가 내렸다.
우득 우드득
황장수가 목관절을 풀며 중얼거렸다.
“아따, 이 새끼들 하나같이 인상이 주옥같네.”
황장수는 여전히 자신의 인상이 선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타닷-
그가 나가기도 전에, 하루가 가장 먼저 허리춤에서 칼날이 휘어진 칼, 카람빗을 꺼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일당백이라고 불리는 정예 중에 정예 회사원들이지만, 그들 사이로 하루가 들어가 휘젓자 마치 하이에나들 사이로 뛰어든 사자와도 같았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곽반장과 가족들은 이전과는 달리 즐겁게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푹, 푹, 스걱-
“끄르르.”
진한 혈향이 코끝을 스친다.
1분18초.
하루가 밴 두 대에 타 있는 회사원 열 명을 처리한 시간이다.
관절을 열심히 푼 황장수가 나설 틈도 없었다.
입맛을 다신 장수는 해수와 함께 시체를 밴에 태우고, 네비게이션으로 밴의 이동경로를 확인했다.
이전에 머리에 검은 천을 씌우고 이동했기에 천선생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는 아직 몰랐다.
“있습니다. 두 차가 맞물리는 지점이, 목적지도 동일합니다.”
하루가 네비게이션과 운전자의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철저한 회사원들도, 임무에 실패하고 역추적을 당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은신처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출발한 신해수 일행이 도착한 곳은 어느 부둣가 폐 공장 앞이었다.
덜컥
차에서 내리자 풍겨오는 짠 내음에 해수는 이곳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들어가자.”
“잠깐, 여기 뒷문 있는데? 찢어져서 가야하는 거 아니야?”
예리한 지적이다.
해수는 돌연 다시 봉고차를 타더니 그 작은 쪽문을 봉고차 옆면으로 완전히 틀어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수가 끌고 온 시체 가득한 밴도 그곳에 주차했다.
이 정도면 아무리 괴물같은 마실장이더라도 쉽게 문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자.”
“어, 어 그래.”
배수진이다. 들어가면 도망칠 곳은 없다. 누구 하나는 끝이 난다.
“거기 누구 있-?”
운이 좋았다.
공장 안에는 지하실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문이 있다.
그곳을 찾으려면 오래 걸릴 법한데, 회사원 한 명이 거칠게 열고 얼굴을 빼꼼 드러내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퍼억!
해수는 바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는, 그를 끌어내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그들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깨닫고,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회사원들이 나오고 있었다.
퍽 퍽! 콰직!
“한놈, 두시기! 석삼!”
황장수는 하루와의 특훈으로 다져진 실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명색이 회사원인데 그들이 몇 합 주고받지도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푹 치이익-
하루는 조용히 드러누운 회사원에게 다가가 경동맥을 끊었다.
그러고는 해수의 눈치를 살짝 본다. 해수는 그녀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회사원의 목을 잡아 부러트렸다.
우드득-
회사원의 몸이 축 쳐진다.
해수는 일어나 아직 타오르고 있는 분노를 가득 담은 눈빛을 하고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늘 이 지하실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오는 건 우리 뿐이다.”
“오···.”
“예.”
* * *
같은 시각.
지하실 통제실에서는 천선생이 마실장과 영과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천선생이 그답지 않게 흥분한 어조로 화면에 나온 신해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여기를? 분명해, 분명 또 시간을 돌렸어! 한 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 무슨···!”
그의 반응은 격렬했다.
천선생은 자신이 계획한 바를 모두 이루고 살았던 사람이다. 계획이 틀어져도 항상 성공시켰던 사람이다.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고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사람이다.
얼마나 악독하든, 얼마나 순수하고 착하든, 얼마나 청렴하든 상관없이 그가 움직이고자 하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났고, 신해수는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 능력, 그로 인해 무수한 불확실성이 생겼다.
아무리 계획을 하고 노력해도 한 순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없어져야 한다. 그가 없어져야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그 불안감이 신해수라는 이름 석 자만 나와도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선생님, 어차피 저들 셋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는 제가 있고, 마실장님이 있지 않습니까?”
초조해하던 천선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실장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어 그래, 마실장.”
그가 마실장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 모습에 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자네는 저 자식을 찢어발길 수 있지?”
마실장은 감정없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 자네만 믿겠네, 저놈의 팔다리를 부러트려서 내 앞으로 갖다만 놔, 이제 교도소는 절대 들어갈 일 없을 거야.”
“예.”
마실장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천선생이 영을 불렀다.
“너는 저놈이 신해수를 잡느라 힘이 빠지면, 죽여라.”
“···예, 선생님.”
천선생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마실장을 필요에 의해 꺼냈지만, 그가 언제든 다시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컨트롤하기 어려울 정도로 덩치가 큰 사냥개는 위험하다. 필요를 다하면 바로 버려야 후환이 남지 않는다.
영이 자신과 항상 함께 해왔던 영업부 1팀 회사원 네 명과 함께 통제실을 나서 복도로 향했다.
복도가 꺾이는 지점, 갑자기 우악스러운 손이 튀어나왔다.
“컥!”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이 바로 벽에 얼굴이 꽂혔고, 뿌연 시야로 괴물같은 피지컬을 지닌 사내가 같은 팀 회사원들의 머리통을 손으로 쥐거나 벽에 박아 터트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마, 마실장, 왜···!”
마실장은 이제 한쪽 눈이 붉은 피로 시야가 가려진 영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어차피 다 죽일 거였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깊은 어둠을 닮은 목소리와 함께 마실장의 커다란 손이 영의 시야를 덮었다.
퍼석!
마실장은 손에 묻은 피를 영의 옷에 닦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