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암살 >
KD그룹 회장은 높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자신의 손녀보다 젊은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담장은 마치 성벽처럼 높다. 눈에 당장 들어오는 총을 든 현지인 가드들만 열 명이다.
KD그룹 회장은 총기가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회사원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필리핀으로 도망쳐 용병을 고용하여 자신만의 요새에 숨은 것이다.
회장은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할 삼엄한 경비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돌아서서 여자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타당 탕!
그때,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장은 화들짝 놀라 여자를 거칠게 옆으로 치우고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 문고리를 잡았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문을 열었다가 저격하면 어떡해? 열지 말아야지, 알아서 하겠지.’
그는 다시 뒤로 빠지며 다급히 무전기를 찾았다. 그러고는 무전을 치려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용병대장이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하들이 금방 처리할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보스.”
탕 탕- 탕!
용병대장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의 말을 반증하듯이 총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용병대장은 그 앞에서 무전을 쳤다.
“침입자는, 처리했나?”
-여기 러프 원, 완료.
회장은 그제야 긴 한숨을 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후··· 제 아무리 날고 기는 회사원이라고 해도, 총을 이길 순 없지, 멍청한 것들.”
“그럼, 편한 시간 되시오. 보스.”
“알았어, 빨리 꺼져.”
회장은 용병대장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말하며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그리고 용병대장이 침실 문을 여는 그 순간.
푹-
문을 아직 한 뼘도 열지 않았던 그때, 그 사이로 단도가 날아와 용병대장의 미간에 꽂혔다.
쿵
용병대장은 소리없이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꺄아아-”
그 모습에 구석에서 이불을 껴안고 있던 나체의 여자가 비명을 질렀고, 회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장에 있는 총을 찾았다.
저벅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윽고 검은 옷을 입은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이 서랍장에 있는 총을 집어 뒤돌아서는 순간, 단도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박혔다.
푹
“아악!”
회장은 익숙지 않은 고통에 그대로 총을 놓쳤다.
그는 공포에 젖어, 바닥에 있는 총을 다시 집을 생각도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사, 살려줘, 천선생, 천선생보다 두 배, 아니 열 배를 더 주겠다!”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사신, 영이 무감정한 눈동자로 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움직이는 자가 가장 구린 놈이다··· 라고 천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발-”
슥-
영은 주저없이 회장의 경동맥을 베었다. 그는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가 울컥울컥 쏟아내는 피가 바닥의 절반을 물들였다.
* * *
경기도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골프장.
성공일보 회장은 자신이 아끼는 골프채를 들고 여유롭게 잔디 위를 걷고 있었다.
그 뒤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가드가 따랐다.
“회장님, 지금은 위험한 시기입니다.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그의 가드는 예전에 천선생이 보내준 회사 출신 파견직 회사원이다.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섭섭치 않게 대우해준 만큼, 본 회사보다는 회장을 택한 가드였다.
그러나 회장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골프채로 홀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건 장사꾼 겁쟁이들이나 그러라고 하고, 천선생은 우리 못 쳐, 멍청한 것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잖아, 지금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 남아있는 것도 자기가 여기의 왕이라고 생각해서 있는 건데, 신하를 버리면 되겠어? 껍데기만 왕이면 뭐해, 거느릴 신하와 민중이 있어야지. 미치지 않는 이상 그럴 일 없어.”
“하지만···.”
가드는 불안한 마음에 반론을 하려다가 이제 막 공을 치려는 자세를 취한 회장을 보며 말을 삼켰다.
그래도, 자신이 옆에 붙어있으니 혹 일이 터져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터엉-
“어우, 회장님 나이스샷!”
옆에 있는 중소기업 사장이 열심히 딸랑거린다.
회장은 자신의 공이 날아간 곳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좁히며 말했다.
“저기 뭐가 있는데?”
“뭐가 말입니까? 잘 안보이는···.”
그때, 가드의 눈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핏-
푸르른 잔디에 새빨간 피가 일자로 소량 뿌려졌다.
털썩
“어멋.”
“응?”
회장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주변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급히 회장을 부축하려 했다.
굳어있던 가드가 제일 먼저 반응하고 회장의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회장님!”
회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멍청한 표정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있고, 뒤통수에는 뾰족한 바늘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바늘이 회장의 뇌를 관통한 것이다.
가드는 그것이 영업부 회사원의 솜씨임을 깨달았다.
“꺄아악!”
“회,회장님?!”
가드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바늘이 날아온 곳을 향해 발을 한 걸음 옮겼다가 멈추었다. 어차피 회장이 죽었으니 소용없다.
후계자의 눈에라도 들려면 지금 저자를 목숨 걸고 잡아야 하나, 그들도 망할 것이다.
가드는 돌연 돌아서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골프장 출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성공일보 회장이 당한 그날.
하진그룹 회장의 사무실, 통유리 창문 밖은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간혹 구름이 걷힐 때만 달빛이 간헐적으로 대지를 비추었다.
“흠.”
하회장은 기지개를 한 번 펴고는 겉옷을 입으며 퇴근 준비를 했다.
사무실은 물론 복도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한 명, 자신의 발소리만 들렸었는데, 어느새 두 명의 발소리로 늘어났다. 하회장이 발걸음을 멈추었는데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정면이다. 아니, 뒤에도 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괴한 두 명이 하회장에게 다가오고 있다. 둘이 동시에 허리춤에 손을 갖다대더니 칼날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꺼내었다.
“너, 너희들 누구야! 멈춰, 잠깐 멈춰!”
하회장은 겁 먹은 표정으로 벽에 딱 붙어 그들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타다닥-
이윽고 그들이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던 그때.
쾅!
옆에 화장실로 빠지는 길에서 신해수가 튀어나오며 괴한 한 명을 몸통박치기로 벽에 밀치고, 그의 뒷덜미를 잡아 반대편에 달려오던 괴한에게 던졌다.
퍼벅!
두 괴한은 서로 겹쳐져 넘어졌다가 금세 날렵하게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해수의 손이 둘의 멱살을 잡는 것이 먼저였다.
쾅-
해수는 둘의 멱살을 잡고 지면에서 30센티쯤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내리찍고, 뇌가 흔들려 정신이 없는 둘의 얼굴을 잡고 다시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찍었다.
쾅! 콰직!
둘은 뒤통수가 터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회장은 뒤에서 해수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저런 괴물이 회사 출신 말고도 또 있다니···!’
* * *
몇 시간 전.
딱딱 딱딱
하회장은 손톱을 뜯으며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금 전에 성공일보 회장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직 기사는 나가지 않았지만 정보원을 통해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대성하고 나만 남았어, 젠장, 괜히 했나? 그냥 못 본 척, 모른 척 눈 감을 걸 그랬나? 천선생에게 잘못했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봐줄까?”
하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마실장도 결국 작은 실수 하나 했다고 내쳐서 그 꼴이 난 거잖아. 천선생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어··· 어쩌지.”
띠리리리 띠리리리
“아잇 씨! 깜짝이야!”
하회장은 갑작스런 직통 전화에 화들짝 놀라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전화를 받았다.
“뭔가?”
-만나죠.
“내가 지금 너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는데!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신해수는 근처에 있었는지, 5분도 되지 않아 하회장 앞에 앉았다.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선택하십시오. 목숨, 부와 명예, 둘 중 하나를.”
해수의 제안은 하진그룹 하회장이 지금까지 칠성회와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을 자백 및 증거를 제출하는 것, 그리고 천선생이 했던 일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하회장에게 사회적인 죽음이냐, 실질적인 죽음이냐의 문제였다.
그는 고민했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죽고 남겨줄 수 있다. 하지만 제 자식들도 무엇 하나 실수하는 순간 천선생에게 팽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신해수라는 자가 도무지 천선생에게 질 것 같지 않다. 이렇게까지 그를 몰아세운 이는 이제껏 없었다.
천선생을 결국 잡아내고 칠성회에 가담 기업들도 어차피 모두 뒤집어 엎어버릴 것이다. 시간 문제다.
불과 10분 전만 해도 불안감과 억울함, 탐욕이 뒤섞인 눈빛이 텅 빈 눈동자로 변했다.
그 눈동자는 허망함만이 가득했다.
그가 눈동자를 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군 그래.”
* * *
“···실패했습니다. 준과 흰이 사로잡혔습니다.”
쾅!
천선생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한 올도 이마에 보이지 않는 깔끔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그의 새하얀 머리는 오늘따라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 늙은이가 둘의 기습을 막을 리가 없어, 누구야, 신해수?”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해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천선생의 인상이 이상하리만치 확 찌푸려졌다.
“또! 그놈인가, 시간을 돌렸나? 아니야, 미리 알고 방비해뒀을 수도 있어···.”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조금 정신없이 행동하다가 날카로운 눈으로 영을 보았다.
“그때 그 경찰서 앞에서의 일은 어떻게 됐어.”
“그대로 사망했습니다. 신해수가 살리지 못했습니다.”
천선생이 그제야 손가락을 탁 튕겼다.
“역시 그랬어,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한 거야, 호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잘 됐군, 고작 경찰 따위가··· 조잡한 재주 하나로 나에게 덤벼?”
천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늙은이들은 언제든 잡을 수 있으니까 제쳐두고, 신해수, 이 빌어먹을 새끼 먼저 잡는다.”
“예, 선생님.”
영은 절도 있게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살짝 들어올리며 천선생을 바라보았다.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던 천선생은, 요즘 신해수 관련된 일이면 과하게 감정에 휘둘린다.
* * *
KD그룹 회장과 성공일보 회장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일주일이 넘도록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신해수는 하회장에게는 간접경호로 하루를 붙이고, 안회장에게는 황장수를 붙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천선생 측의 반응은 오지 않았다.
강력반 사무실.
“오,오, 이야아!!!”
곽반장이 문자를 보다가 돌연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오갱이 다가가며 물었다.
“뭐 로또라도 당첨됐어? 사무실 시끄럽게 왜 이려?”
오갱의 시비에도 곽반장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에게 어깨동무를 거칠게 하고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내에게 온 문자, 제주도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마느님: 여행권 당첨됐어.
자세한 건 잘 몰라서 오갱이 곽반장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자주 가는 마트에서 행사하는데, 거기서 제주도 2박3일 가족 여행권 당첨됐다고! 앗싸 돈 벌었다으아!”
“오우, 좋네, 축하해요 형님.”
“반장님 축하드립니다!!”
“어 그래그래, 그러니까 니네도 일 열심히 해! 그래야 나처럼 운 좋은 어른 된다!”
곽반장은 내내 히죽거리다가 퇴근했다.
그는 금세 휴가를 썼다. 여행권이 기한이 짧아서, 빨리 가야 했던 것이다.
곽반장이 오랜만에 자리를 비운 강력반은 매우 바빴다.
사고사 사건과 살인사건이 하루아침에 일어났다.
사고사 건은 능력으로 막았지만 살인사건은 한 시간이 이미 지난 상태였기에 막을 수 없었다.
“후우···.”
해수가 조사를 다니다가 퇴근시간이 넘어서 그제야 사무실로 들어와 지친 몸을 의자에 누일 때였다.
“퀵입니다. 신해수 경위님?”
“예, 접니다.”
퀵서비스가 와서 해수에게 작은 박스 하나를 주었다. 그것을 뜯어보니 2G 휴대폰 하나가 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지잉
해수가 그것을 들자마자 바로 문자가 왔다.
[사진]
곽반장과 그의 가족, 와이프와 아들 딸이 놀고 있는 사진이다.
지잉
다시 문자가 울렸다.
-참 화목한 가정이야, 마음 아프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휴대폰 들고 경찰서에서 나와서 맞은편에 검은 택시를 타, 혼자.
해수는 아랫입술을 뜯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