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노블레스 호텔의 파티 >
노블레스 호텔 스카이 라운지.
층고도 높고 넓은 통유리가 서울 야경을 시원하게 비춘다.
마치 이곳에서 저 수많은 별빛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뭐라도 된 사람들이지만, 황장수만은 별천지에 온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안밖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를 안회장이 멈춰서서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넨 즐거워 보이는군.”
“예에, 신기한 게 많네요. 있는 놈들은 이런 좋은 데를 맨날 다니는 거 아니야.”
“맨날은 아니고··· 아무튼 나도 신경을 좀 써주지.”
황장수는 여전히 안회장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대답했다.
“열심히 신경쓰고 있으니까 걱정 마십쇼.”
“후···.”
그 사이 다른 회원들이 안회장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안회장은 재빨리 미소를 만들며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 때, 단상 위로 진한 남색 수트를 입은 미청년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잠시만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별들의 만찬 주최자님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한쪽에 자리잡은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음악을 연주했고, 깔끔한 수트를 입은 중년인이 올라섰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진짜 직접 왔네, 이런 자리에”
“나는 저 사람 처음 보는데, 누구라고?”
한 미모의 여성이 백치미를 뽐내며 동행인에게 묻자, 동행인이 대답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정승한”
“어? 아, 와···”
청와대 비서실장 정승한, 그는 비서실장이 되기 전부터 칠성회에 지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정승한입니다.”
깔끔한 인사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온다.
그는 장내를 둘러보며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여기 사실, 제가 또 귀한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나와주시죠.”
비서실장이 직접 귀한 분이라고 칭하자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며 저마다 추측하기 시작했다.
“귀한 분? VIP가 직접 오셨나?”
“저 분한테 귀한 분이면 VIP밖에 없지 않나? 아닌가?”
말을 하다가 문득 두려운 사람이 떠올랐지만, 회원들은 애써 그 불안감을 지웠다.
그때, 뒤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들 네 명을 거느리고 등장하는 중년인, 그의 머리가 머리카락 한 올도 내려오지 않은 깔끔한 올 백 머리에다가 염색을 하지 않았음에도 새하얗기 때문이다.
그런 머리는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 중에서 한 명 뿐이다.
“처,천선생···”
“선생님···”
천선생을 발견한 회원들은 모두 경악했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뚜벅 뚜벅
천선생과 그의 친위대들의 구둣발 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질 뿐이다.
천선생이 드디어 단상에 서서 비서실장이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는 마이크를 한 손으로 건네받았다.
그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마이크에 입을 댔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잘들 지내셨지요?”
“예”
“예, 예···”
몇몇이 억지로 대답했다. 이제 그의 권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뼛속 깊이 박힌 복종본능이 대답하게 만드는 것이다.
천선생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망각하고 있었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깨닫게 되었어요.”
그는 한 손에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새 술은 새 잔에 담아야 한다는 걸.”
사람들이 그의 말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천선생은 뜻풀이를 해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이었다.
“모두 후계자는 정하셨나요?”
아직 앞날이 창창한 5,60대가 다반사인데, 후계자 얘기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불만을 겉으로 표한 이는 없었다.
“오늘 이곳은 호텔 측 부주의로 인한 폭발 사고가 일어나요.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죠.”
회원들은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는 가지 않지만 순간 오싹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들 뒤에서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자들.
칠성회 회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천선생의 친위대다.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인 살인기계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천선생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진짜 파티를 시작해볼까요?”
천선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이 품에서 칼을 꺼내며 회원들에게 덤벼들었다.
“뭐,뭐야? 내가 누군 지 알아?”
푹, 치이익-
한 중년인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회사원에게 윽박을 지르다가 목에 새빨간 줄이 그어졌다.
그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연회장의 허공에 흩뿌려졌다.
“꺄아아악!”
“어헉!”
“오,오지마 오지마!”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바퀴벌레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절반은 노리개를, 나머지 절반은 내노라 하는 경호원을 데리고 왔지만 칠성회 회원이니만큼 천선생의 친위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푹 푹 서걱-
열 명 남짓한 회사원들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빙하던 직원들까지 무자비하게 죽였다.
한 순간에 천국잔치같았던 곳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숫적으로는 초대받은 회원들이 우세하기에 경호원들이 용기내어 그들을 상대했지만, 금세 목과 심장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래도 몇 몇 경호원들은 시간을 제법 끈다.
“저 놈들이 바로 그···”
황장수는 그들의 마술같은 움직임을 보고 눈치 챘다. 해수가 말했던 그 회사원들임을.
“안사장님 이쪽으로, 이쪽으로! 빨리!”
“어,어 허”
호칭이 잘못되었지만 안회장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안회장은 황장수에게 팔뚝이 잡힌 채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황장수의 목적지는 비상계단 문, 그곳에 무슨 자신감인지 한 놈이 지키고 있다.
단 한 놈뿐이라도 아무도 못 나가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가 황장수를 발견하고는 허리춤을 더듬어 칼을 꺼내었다.
장수의 품에는 어떠한 무기도 없다. 다만, 해수가 준 상체만 보호하는 특수 방검복을 입은 상태다.
“죽으러 오는-”
쾅!
그가 황장수를 향해 칼을 뻗을 때, 장수도 피하지 않고 마주 주먹을 뻗었다.
그의 칼은 중간에 장수가 뻗은 팔에 경로가 살짝 틀어져 허공을 찔렀고, 장수의 주먹은 그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끄···”
그는 비상문에 부딪혀 그대로 스르르 쓰러져 내렸다. 황장수는 그의 손에 쥔 칼을 빼앗아 바로 경동맥을 찌르고는 일어나 비상문을 열었다.
“안··· 아이, 아저씨! 얼른 여기로 나가요! 나가!”
안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황장수를 멍하니 보며 그의 이끌림에 따랐다.
지금 그가 사람 한 명을 죽인 것이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주저함이 없어 살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것은 분명 한 두번 죽여서는 나올 수 없는 솜씨였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막아!”
“하압!”
비상문에 한 명만 세워뒀지만,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상문을 힐끔힐끔 보던 팀장급 회사원이 외치자 회사원 두 명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워낙 치명적이기에 황장수는 무시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비상문을 몸으로 막았다.
훙 훙
맨 손을 선호하는 해수와는 달리, 황장수는 칼을 자주 쓴다. 칼을 써야 할 일이 별로 없었을 뿐.
황장수의 근육덩어리 몸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회사원들의 공격을 피하다가 한 명의 팔을 옆구리에 끼우고 곧바로 팔뚝과 쇄골에 칼을 박았다.
푹 푹!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차며 칼을 뽑자 다량의 피가 솟구치며 황장수의 얼굴을 적셨다.
“덤벼 이 살인마 새끼들아!”
또 다른 한 명이 충원되어 다시 2:1로 싸우지만 황장수가 금세 그들을 밀치고 비상문을 닫았다.
신입과 우강철을 훈련시키기 위해 항상 보여주는 하루와의 대련이 오히려 황장수의 특훈이 된 것이다.
같은 회사원 출신 하루와 이들의 공격 수법이 비슷한데, 하루가 월등히 빠르고 허를 찌르는 기술도 좋다.
이들은 하루에 비하면 쉬운 상대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천선생이 입을 열었다.
“영아, 가봐라.”
“예, 선생님.”
영이라 불린 사내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황장수가 빠져나간 비상문으로 향했다.
곧바로 떠나지 않고 황장수의 뒤에서 그의 싸움을 지켜보던 안회장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황장수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로 인해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얼굴에는 남의 것으로 보이는 피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아까 보았던 살인을 하는 모습과 겹쳐져 두려움을 자아냈지만, 그보다 고마움이 더 컸다.
신해수의 말이 맞았다. 딸 안서은이 사람을 잘 봤다.
경호 업계에서 날고 기는 경호원들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데, 무서운 회사원들을 압도하는 모습이.
그 전에 했던 괴짜같은 행동들은 깔끔하게 잊혀진 지 오래다.
황장수는 비상문을 몸으로 막으며 다급히 외쳤다.
“아저씨 엘리베이터로 가 엘리베이터로! 이 놈들이 아무리 막 나가도 여기 호텔에 있는 사람 싹 다 죽일 순 없어!”
급해서 반말에 호칭도 헷갈려서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황장수다.
안회장은 졸지에 대기업의 회장이 아저씨가 되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비상계단으로 두 층 내려가서 나가서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긴 18층이다. 그런데 네 개의 엘리베이터가 전부 1층에 있거나 이미 내려가고 있다.
탁탁탁탁-
엘리베이터가 오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진다.
그때, 저쪽 반대편 어두컴컴한 복도 끄트머리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내다. 안회장은 눈빛만 보고도 그가 회사원임을 확신했다.
안회장이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품에서 칼을 꺼내어 들고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안회장은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쳤지만 회사원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거의 다 따라붙어 회사원이 발을 바닥에 강하게 구르고 뛰어오르면서 칼을 안회장의 목 뒤에 뻗는 순간.
쾅!
비상문이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이 강하게 열리며 황장수가 튀어나와 공중에 떠 있는 회사원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콰광쾅!!
회사원은 그대로 벽에 부딪혀 강렬한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우드득-
황장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꺾으며 고개를 돌려 안회장을 보았다.
놀란 토끼눈을 한 안회장이 황장수를 바라보고 있다.
딩-동 18층입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황장수는 멍청하게 서 있는 안회장의 뒷덜미를 잡아 끌고 엘리베이터로 달렸다.
“가야 돼! 빨리!”
황장수와 안회장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막 닫힐 때.
텅-
워커발이 훅 들어왔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들어와 공격하기는커녕 한 걸음 물러났다. 풍기는 분위기나 행동에서 무언가 다른 놈들과는 다른 것이 느껴진다.
타다다닥-
그 뒤로 비상문으로 두 놈이 더 오는 것이 보였다. 이놈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는 사이 두 놈이 합류하면 이제 못 내려간다.
황장수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먼저 가!”
안회장은 그의 넓은 등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무엇도 안 된다.
안회장은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까지 상대방은 가만히 있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용기있네.”
“용기는 개뿔, 니넨 지금 나한테 다 뒤지는 거여.”
황장수가 바로 칼을 그에게 휘둘렀다. 그는 손쉽게 장수의 칼 끝을 피하며 발을 뻗었다.
퍽!
장수의 무릎 옆에 밀리며 중심을 잃었고, 그 사이 칼날이 날아와 장수의 뺨을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게 고개를 돌렸어도 목이 도려졌을 것이다.
채쟁 훙 훙- 푹!
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리 황장수라도 비등한 상대에다가 숫적으로도 불리하니 상처가 점점 늘어났고 지쳤다.
푸북 푹-
영의 칼이 황장수의 발등과 무릎, 손등을 차례대로 찍었다.
장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이를 악물었다.
영이 그를 내려다보며 칼을 높이 들어 처형의 자세를 취했다.
“가라.”
영이 황장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치던 그때.
타다다닥-
옆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며 칼을 들어올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누군가가 날아온다.
치이익- 서걱
칼날이 마치 춤을 추듯이 영의 칼날을 미끄러지듯 스쳐가 목을 앞뒤로 베었다.
영의 목에 혈선이 둥글게 둘러지더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