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칠성회 회담 >
사거리가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한 카페 입구.
곽수철 반장과 하루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데이트?”
“가출?”
그렇다. 둘은 서로 현피의 대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좀 꼰대같은 면이 있긴 해도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각대장과, 보자마자 공격부터 날리는 하루살이는, 그들이 받아들이기엔 현실과의 갭이 너무 컸다.
데이트라는 물음에 하루는 얼굴을 붉혔고, 곽반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출이라니, 이 나이에 무슨··· 돌격이는 어딨어?”
“아, 그, 데이트 아닙니다.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래? 여기 카페 온 거야? 들어와, 내가 살게.”
하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딸기 스무디 고르겠습니다.”
“어이쿠 대답도 빠르네, 꼭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둘은 카페로 들어가 음료를 시키고 한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곽반장과 하루는 이렇게 단 둘이서만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있어도 근무 중이었기에 사건에 관련된 말을 하거나 일에 집중하느라 어색할 틈이 없었다.
둘 사이에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그 와중에 둘은 공통적으로 카페 입구를 힐끔힐끔 보며 상대가 왔는지 주기적으로 체크했다.
“만날 사람은 아직 안 왔나봐? 친구?”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음, 네.”
그렇게 10분쯤 흘렀을 때, 슬슬 둘 다 약간 분노가 일었다.
곽반장은 하루 앞에서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 휴대폰을 꺼내지 못했고, 하루만 휴대폰으로 게임에 접속하여 각대장에게 귓말을 보냈다.
-하루살이: 왜 안옴
[각대장이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하루살이: 10분 줌
[각대장이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쬽쬽 춉춉-
시켰던 딸기스무디가 바닥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하루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하루의 손가락이 토도독 움직였다.
-하루살이: 10분 지남
[각대장이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하루살이: 오면 손가락 하나만 자르고 친구해주려고 했는데, 안되겠다. 넌 죽어야겠다.
[각대장이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으, 차가운 거 마셔서 그런가? 왜 갑자기 춥지.”
하루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곽반장은 알 수 없는 오한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두 손으로 팔뚝을 비볐다.
마침 불어온 에어컨 바람에 피부 위로 온통 닭살이 돋았다.
잠시 후,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일이 있어서, 친구 만나서 재밌게 놀아.”
“예, 잘 마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곽대장님.”
“대장 아니고 반장, 다음에 또 보자고.”
그렇게 둘은 건조하게 헤어졌다.
그날 밤.
-각대장: 왜 안 나왔냐, 쫄았냐?
-하루살이: ···죽고싶음?
-각대장: 역시 온라인에서만 깡패구나, 30분 넘게 기다려도 안 오더라, 그렇게 무서웠어?
-하루살이: 뻥쟁이, 넌 오늘부터 무한 척살임
-각대장: 아닌 적이 있었나? 너도 방심하지 마라, 이 아저씨 지갑 두껍다.
그렇게 현피는 무산되고, 서로의 증오심만 더욱 커지게 되었다.
곽반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하루살이의 말대로 사냥터에 나타났다 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하루살이때문에 사냥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 암울한 현실을 뒤로 하고 즐거운 일이 하나 생겼다.
1대 제자 서은최고가 자주 접속하여 노력하는 것은 물론, 가르치는 대로 쑥쑥 크는 것이다.
-서은최고: 스승님, 전설검 9강화 했습니다.
-각대장: ···그, 그거 비싼데? 얼마 들었어?
-서은최고: 따져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1억도 안 들었을 겁니다.
-각대장: 아··· 우리 제자가 참 착하네, 우리 더 돈독히 스승과 제자의 우애를 나누자꾸나.
서은최고의 고속성장으로 어느 정도 사냥터가 맞춰서 할 수 있을 때쯤, 곽반장은 하루살이의 절친 서으니당을 발견했다.
-각대장: 제자! 저거 죽여! 그때 그 원수의 절친이다!
각대장은 본인도 모르게 부모와 자식간에 싸움을 붙였고, 자신도 거들면서 서으니당을 몰아세웠다.
현실이 바쁜 만큼 아직 레벨이 낮아 각대장 한 명도 상대하기 힘든 서으니당은 조금씩 밀렸다.
-서으니당: 치사하ㄱㅔ
-각대장: 정의를 구현했을 뿐이다.
그렇게 위기에 빠졌을 때, 턱없이 비싼 즉시 순간이동주문서를 사용한 하루살이가 허공에 갑자기 나타났다.
전투는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서은최고가 사망하였습니다.]
[각대장이 사망하였습니다.]
-하루살이: 퉤
-서으니당: 감쟈
각대장은 차가운 사냥터 바닥에 누워 자신의 캐릭터와, 그 옆에 나란히 누운 서은최고의 시체를 짓밟고 있는 두 캐릭터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어? 하루? 서은?”
세상 삐딱하게 서있는 하루살이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은 서으니당.
지금 딱 저 구도로 하루와 안서은이 서 있었던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같다. 아이디도 본인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내 각대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절대 아니지. 그 악랄하고 악독하고 야비하고 약속 안 지키고 못생긴 하루살이가 하루일 리가 없지.”
부활을 기다리던 각대장은 하루살이와 서으니당에게 복수를 꿈꾸며 오늘도 와이프 몰래 비상금을 게임에 충전했다.
“하루살이, 내가 꼭 너 잡는다.”
물론, 각대장의 수사는 시작부터 실패한 수사였다.
* * *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사무실,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중년인이 검은색 바탕에 빨간 줄로 포장되어 있는 초대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이걸 놓고 갔다고? VIP 측에서?”
“예, 받으시면 바로 열어보시라고 첨언했습니다.”
“흠.”
지금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시국에 VIP와의 접촉은 좋지 않다. 중년인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다가 결국 빨간 줄을 풀고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초대장?”
쪽지는 다름 아닌 연회 초대장, VIP 실장을 의미하는 날인이 정확히 찍혀 있다.
날짜는 사흘 뒤.
한 기업의 총수들은 국내에 거주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사흘 뒤라면 하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귀국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일정이다.
그러해서 빨리 풀어보라고 한 듯했다.
많은 총수들이 전용기를 급히 띄울 그림이 뻔히 보인다.
중년인은 고민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가기는 찝찝하지만, 안 가면 불이익은 확실하겠지.”
같은 시각, 칠성회에 속한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또한 초대장을 받았다.
* * *
“흠···.”
대성그룹의 총수 안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수심 깊은 얼굴로 초대장을 바라보고 있다.
“꼭 가셔야겠어요?”
안회장은 전과는 달리 안서은에게 초대장을 받은 사실을 알렸고, 서은은 그를 말리려고 한달음에 본가로 달려왔다.
“나도 그놈들 낯짝 보기는 싫은데, 내가 안 가면 의심을 살 뿐이다. 인사치레라도 하고 와야지.”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뭐?”
마주한 서은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 눈동자에는 전에 거의 보이지 않던 걱정이 미세하게 묻어있다.
안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급히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안 돼, 네가 내 딸이라고 해도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은 출입할 수 없다. 수행원 한 명만 동행이 가능하다.”
“그럼 제가 수행원···.”
서은은 억지를 부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수행원이라도 실력이 출중한 경호원을 데려가야 한다.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떠올라 뒤돌아섰다. 저 멀리 출입문 쪽에서 서성거리며 미술품들을 구경하고 있는 황장수가 보인다.
“그 수행원, 황가드 데리고 가면 저도 안심될 것 같아요.”
“황가드?”
안회장의 눈이 황장수에게 향했다. 생긴 게 부담스러운 사람이지만, 신해수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의 실력이 외부에 드러난 적은 없어도 해수 못지않은 실력자라고.
“알았다··· 그보다.”
안회장의 수락에 안서은이 소녀처럼 기뻐했다. 안회장은 그런 딸을 보며 뜸을 들이다가 용기내어 말을 이었다.
“요즘 어디서 사냥하냐?”
“···네?”
안서은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 천진한 표정에 안회장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 아니다. 됐다. 이만 나가봐라.”
* * *
아지트.
“···그래서 내가 그 아재 경호하게 생겼다니까, 아으, 싫어.”
“뭐가 싫어요? 일당을 수백을 준다면서요. 나같으면 영혼이라도 바치겠다.”
“니가 얼굴로 웬만한 여배우 싸다구 갈기는 여자 경호하다가 늙다리 경호해봐라, 에휴 뭐 해봤어야 알지.”
“뭐요? 이 조폭 할애비같은 아저씨가?”
“뭐 임마? 너 다시 한 번 얘기해봐, 허리를 빨래 짜듯이 비틀어버릴 테니까.”
황장수와 쪽새가 투닥거리는 동안 신해수는 정영수 옆에서 모니터를 살폈다.
안 회장의 연락과, 황장수 지원 요청으로 인해 신해수도 칠성회의 회담에 관한 정보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은밀히 알아본 결과 갑작스레 일정을 바꾼 유명인사가 상당히 많았다.
최소 30명 이상의 각 분야별 정상들이 초대장을 받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들 모두가 칠성회 회원이었다는 것, 칠성회가 아닌 정상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칠성회가 아예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해수는 이 희대의 회담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준비하기 시작했다.
“쪽새는 현장에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무전하고, 영수는 시간 맞춰서 cctv 해킹할 준비 마쳐놓고, 하루는 게임하고.”
“넵!”
하루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해수는 그 근처에 가지도 못한다. 칠성회 회원들에게 요주인물로 낙인이 찍혔으니.
그런 만큼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다.
* * *
연회 당일.
안회장은 본가에서 나와 전용 차량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황장수와 마주쳤다.
“크흠, 가지.”
“예에.”
구수한 대답, 안회장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려 황장수를 쳐다보았지만, 그 능글맞은 표정을 보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칼같이 각을 잡고 행동하는 경호원들만 보던 안회장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머리 조심하시고, 왜 안 타시지? 내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네.”
안회장은 그의 가벼운 언행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딸이 붙여줬으니 오늘 하루만 넘기자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연회장 위치는 하진 그룹에서 올해 새로 지은 ‘노블레스’ 호텔의 스카이 라운지다.
그곳 정문에 들어서자 직원이 발렛파킹을 위해 다가왔다. 황장수는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안주머니에서 굵은 뿔테 안경을 썼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뿔테 안경을 쓰니 이상하고 험악한 인상이 되었다.
“그건 뭐지?”
황장수는 안경코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뽸션입니다. 뽸션.”
장수의 싸구려 발음에 안회장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비로 들어서자 세련된 유니폼을 입은 미모의 여직원들이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안기원 회장님. 안내팀 김용미입니다. 연회장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미 직원들이 초대장을 받은 인물들의 얼굴과 직함을 숙지하고 있는 것이다.
황장수는 헤벌쭉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어진 안회장을 뒤늦게 쫓았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가자, 입구에서 한 차례 검문이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전자기기를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모든 전자기기는 빠짐없이 이곳에 놓고 입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직원이 안회장의 이름이 적힌 고급스러운 메탈 상자를 들이밀었다. 안회장은 자연스럽게 시계를 풀고 휴대폰과 함께 그곳에 넣었다.
황장수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능글맞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그곳에 놓았다.
“화장실 갈 때는 찾아가도 되죠? 똥 눌 때 너튜브 안 보면 잘 안 나와서.”
황장수의 적나라한 표현에 그를 데리고 온 안회장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를 상대하는 여직원은 찰나에도 당황이 묻어나지 않는 그림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네, 걱정마시고 마음껏 즐기십시오.”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공항검색대처럼 아치형 문틀이 있었다. 그곳에 지나갈 때 황장수는 안경의 미간 쪽에서 아주 작게 정전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치직-
“···으음.”
아주 살짝,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졌다.
* * *
같은 시각, 황장수의 시선을 공유하던 아지트의 커다란 화면이 검은 화면으로 변했다.
정영수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철저하네.”
자리가 자리인지라 정말 초초소형에 맞춤형 안경으로 거의 육안으로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수준의 고가 아이템이었다.
해수는 의자에 걸린 겉옷을 챙기며 돌아서서 하루를 보았다.
“가자.”
“네!”
놓칠 수 없는 기회지만,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회사원들이 넘쳐날 것이다. 혹시나 충돌하게 될 경우에 상대 불가능한 인력은 희생만 부를 뿐이다.
해수는 하루만을 데리고 노블레스 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