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짝사랑 >
하루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땀이 흥건하다.
다행히 병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고는 바닥에 있는 쉐이크 병을 집으며 다시 TV를 보았다.
“안서은님이 경찰을 좋아했군, 누구를 소개 시켜줘야 하나.”
하루는, 연애에 관해서는 눈치가 없는 편이다.
* * *
[재벌3세에 미모까지 완벽한 그녀]
[대성E&M대표,우리가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 10가지]
[보스의 사생활 올해 최고 시청률 달성, 재벌3세의 힘?]
┗절대고수: 아버지 드디어 제 아를 낳아줄 여자를 찾았습니다.
┗야구매니저1: 초면에 사랑합니다
┗휘오레c: 눈나 나주거
┗몽환현재: 아니 저 얼굴에 저 삐쩍 마른 몸에 저 바스트가 말이 돼?
┗아담녀: 다 뽕이지 ㅄ아
┗미라크리: 니 얼굴에 뽕 했지?
┗시크민트: 쟤 고딩때 우리학교 일진이었던 애랑 존나 닮았는데, 재영고 23기
┗쵸춍: 도대체 뭐가 이쁘다는 거야? 그냥 존나 세상 편하게 살아서 피부 좋은 거 말고 딱히 없는데
┗페레가모: 그러니까, 나 남잔데 쟤 무매력
┗카사12: [나 남잔데 특] 여자
┗Kcw122: 안서은느님 연예계 데뷔 기원 1일차. 파티원모집 [1]
┗왕십리70: 나도 여신님 티비에서 자주 봤음 좋겠다. 내가 보생을 열 번 넘게 돌려보다니
┗혐생: 그냥 부모 잘 만나서 가만히 있다가 대표 되었으면서 잘난 척 지가 다 관리하는 척 말하는 거 존나 역겹네/ 딱 봐도 비서가 써준 거임
┗Kcw122: 안서은느님에 대해 10분만 조사해도 이딴 소리 안 할 텐데, 비록 출발선은 달랐지만 존나 능력파시다 안느님 욕하지 마라 뒤진다.
┗siela: 그 옆에 경호원 졸라 무섭게 생겼다. 조폭 아니야?
┗몽환현재: ㅇㅇ 나도 경호원 얼굴 보고 지림, ㅈㄴ시강
┗박규: 서은아 사랑한다!!
보스의 사생활 방송이 나간 직후, 너튜브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벌써 팬클럽까지 생성되려 했다.
그에 반해 젊고 예쁜데다가 돈까지 많고, 능력도 좋게 비쳐지니,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같이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도 적지 않았다.
인기 신인 배우 김강헌의 출연이 안서은에게 화제성으로 묻히는 느낌이 있었지만, 팬층이 달라서 강헌에 대한 말도 꽤 많았다.
특히 젊은 대표 안서은에게 쩔쩔 매고 각 잡힌 신병같은 행동이 남녀 모두에게 호감으로 다가왔다.
원래 한 번 촬영에 한 주 방송이 대부분이지만, 이번 촬영분은 2주 방송으로 나뉘어 송출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피디가 안서은에게 재출연을 요청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출연 스튜디오 방송 당일.
황장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전에 체크되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그의 말에 파트너 가드 정훈이 이죽거렸다.
“하, 아저씨, 방송은 원래 실시간으로 보충되고 빠지고 하는 거에요. 모르면 좀 가만히 있지, 열심히 일하는 척···.”
장수는 여전히 인상을 펴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 편하게 일하는 건 사전에 사고를 차단하는 거 아닌가? 넌 저기 쟤, 쟤, 쟤 잘 보고 있어, 특히 저 여자, 움직임이 영 수상하니까.”
“아 진짜 뭐 탐정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경호가 장난인 줄 알아?”
“닥치고 봐, 난 다른 애들 볼 테니까, 요즘 안대표님 악플도 많은 거 몰라?”
“그런 년놈들은 어차피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어요.”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는 거야, 만에 하나, 임마.”
정훈은 장수의 손에 떠밀려 흔들거렸다. 정훈은 한 발자국 떨어져 장수를 째려보며 속으로 화를 삭였다.
‘넌 진짜··· 언제 한 번 제대로 털어준다.’
“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안대표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송이 끝나고, 안서은이 촬영장을 벗어날 때였다.
연예인들이 한 번에 산개하듯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퍼져 있던 스테프들이 연예인들에게 달라붙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때, 후드를 푹 눌러쓴 어떤 여자가 서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은 유리병, 비타민음료 병이다. 그런데 뚜껑이 열려있고, 그곳에서 김이 스멀스멀 나온다.
“안서은!”
날카로운 외침에 안서은이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광기어린 눈과 마주쳤다.
“뒤져 이 썅년아!”
촤아악!
그녀가 들고 있는 비타민음료 병에서 정체불명의 액체가 튀어나왔고, 그와 동시에 안서은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치이이익-
“꺄아아악!”
“뭐,뭐야 저건!”
“잡아, 잡아!!”
안서은은 무언가 타는 듯한 끔찍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눈 앞에 자신을 가로막은 거대한 덩치를 올려다보았다.
황장수다. 그가 어느새 풀어헤친 수트 재킷의 끝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옆으로 넓게 펼치고 있었다.
“안대표님, 괜찮습니까?”
장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은을 내려다보며 꽉 끼는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견고한 재질로 만들어진 재킷의 등부분 섬유가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염산이다.
“꺄앗! 이거 안 놔?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야!!”
뒤늦게 나선 가드 정훈이 염산 테러를 저지를 여자를 제압했다.
서은은 장수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그 뒤에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여자를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요.”
그녀는 괜히 젊은 나이에 한 계열사의 대표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는 듯이,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경찰에 직접 연락했다.
그녀의 담대한 행동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한번 더 놀라고 감탄했다.
“보통이 아니네, 진짜배기야, 진짜배기.”
“어쩜 저렇게 젊은 아가씨가 강심장이지? 난 저때 온갖 호들갑 다 떨고 동네 오빠들 다 불렀을 텐데.”
“저 경호원도 대단하네요. 역시 경호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
경찰이 오고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염산테러를 가한 여성은 너튜브 닉네임 ‘시크민트’, 서은 관련된 영상에 빠짐없이 악플을 단 사람이었다.
그녀는 30대 중반에 이렇다 할 직장도, 기술도 없이 남자친구에게 기생하여 살다가 최근에 차여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범행 동기는 간단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너튜브 계정 시청기록에서 안서은 관련 동영상들을 보았고,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가 안서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에게 안서은은 열등감 버튼이었고, 염산 테러라는 끔찍한 일까지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지은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여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은에게 빌었지만, 선처는 없었다.
황장수 역시 자비가 없었다. 그는 여자를 경찰서에 넘기고,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고 나오는 길에 바로 안서은에게 말했다.
“얘한테 그 여자 잘 관찰하라고 했는데 안 봤어요. 직무유기에요. 직무유기.”
서은이 검지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다가 스윽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있는 정훈을 보았다.
정훈이 뜨끔하여 어깨를 떨며 백미러에 비친 안서은의 시선을 피했다.
“변명해보세요.”
“···죄송합니다.”
“저를 담당할 때 이런 일이 생겨서 다행이네요. 고객한테 일이 생겼으면 더 끔찍했을 거예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서은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차 세우세요.”
끼이익-
“내리세요. 내일까지 대성가드에서 짐 빼시고요. 그동안 수고하셨으니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훈은 고개를 푹 숙였고, 황장수는 지금까지 봐왔던 서은의 따뜻한 면모와는 전혀 다른 칼같은 행동에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녀와 밖에 나간 정훈을 번갈아 보았다.
너무한 처사 아닌가 싶어 살짝 미안해졌지만, 끄트머리에 자신을 째려보는 정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새끼는 인간이 안 됐구만.’
“강비서님.”
“아아, 아닙니다. 제가 해야죠, 제가, 저도 운전 잘 합니다요.”
황장수는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강비서를 붙잡고는, 자신이 재빨리 뒷좌석에서 내려 운전석에 탔다.
장수가 운전하는 차가 떠나가고, 정훈은 그 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이를 갈았다.
“황장수 이 개새끼··· 넌 내가 꼭 나락으로 떨어트려준다.”
* * *
정훈이 안서은 밀착경호에서 떨어져 나가자, 황장수를 질시하던 이팀장이 들어왔다.
그는 염산테러 사건을 자세히 확인했고, 황장수의 활약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오케이, 인정.”
“뭐? 니가 뭔데 인정이고 나발이야?”
“나름 괜찮은 친구네, 내가 옆에 두고 가르칠 만 하겠어, 너, 내 후배가 되라.”
“뭐래, 미친놈이?”
이팀장의 시기심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황장수가 염산 테러를 막은 이유도 있지만, 다시 밀착경호로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 가장 컸다.
“다행인 줄 알아라, 앞으로도 방심하지 말고.”
누구에게 다행인지 이팀장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안서은은 그 뒤로 연예계에서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 * *
딩- 동
윗집에 신해수와 하루, 옆집에 황장수가 사는 요새같은 집, 리드빌딩 901호에 벨이 울렸다.
하루가 벌떡 일어나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그녀를 재빨리 말렸다.
“언니 제가 나갈게요.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
“알겠다. 양보하지.”
새 교복을 입은 그녀는 김지안, 해수가 맡았던 사건의 피해자 삼남매 중 첫째다.
그때는 막 중학생으로 올라왔었지만,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둘째 지원은 초등학교 6학년, 셋째 지구는 아직도 열 살밖에 되지 않아 손이 많이 갔다.
삼남매의 집에 오랜만에 해수와 하루가 놀러와서 배달음식을 시켜먹기로 한 것이다.
친화력이 좋은 쪽새도 어쩌다가 삼남매와 친해져서 합류했다.
삑, 철컥-
지안이 문을 열고 치킨을 받으면서 배달원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
지안이 배달원을 알아보자, 그도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어, 김지안?”
“아, 네, 오빠··· 안녕하세요.”
“와··· 많이 컸네, 보기 좋다. 여기가 너네 집이야?”
집을 파악하는 멘트에 해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배달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썹이 살짝 아래로 쳐진 순한 얼굴에 꽤 멀끔하게 생겼다.
“네··· 오빠도, 보기··· 좋아요.”
“나? 하하, 그래 고마워, 어··· 그래, 맛있게 먹고.”
“네, 안녕히 가세요···.”
“그래! 안녕!”
남자는 시원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안은 아쉬운 듯이 느릿하게 문을 닫았다.
해수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지안, 저 남자랑 무슨 관계지?”
마치 집이 갑자기 취조실이 된 느낌이었다.
“아··· 그, 예전에 무서운 언니오빠들한테 끌려갔을 때, 오빠가 도와줬었어요.”
그때 둘째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저 형 그 형이지? 박지후? 선우? 저 형 누나가 좋아했어요!”
“박선후거든···.”
좋아했다는 말에 하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연애는 잼병이지만 남의 연애에 관심은 많다.
쪽새가 재빨리 치킨 박스를 뜯으며 물었다.
“그래서, 사겼어?”
“아니요···.”
“엉? 그래? 너 정도면 어디서 차이고 다니지는 않을 텐데? 고백은 했었어?”
지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쪽새가 손뼉을 딱 쳤다.
“딱 각이 나오네, 고딩때 이성친구 사귀는 애들은 다 양아치야 양아치! 보나마나 일진 여자애랑 사겼겠지, 저렇게 반반하게 생긴 남자는 안 놀아도 가만 두지 않거든.”
쪽새의 말에 지안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으면 저도 포기 안 했을 텐데··· 너무 좋아보였어요. 둘이.”
그녀의 기억너머로 선후와 사귀었던 여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단아하고 청순한, 순수한 미소를 지니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선후의 눈빛은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졌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둘 사이에 들어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지금은 헤어졌을 수도 있잖아? 번호라도 물어보지?”
“···아기 사진 있던데요. 휴대폰 화면에.”
그 말에 해수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썰미가 좋군, 누구 닮아서.”
해수의 칭찬에 하루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뿌듯해했다.
그나마 정상적인 포인트를 잡을 수 있는 쪽새가 물었다.
“근데 조카일 수도 있잖아, 젊은데, 아기 아빠라고?”
“외동아들로 알고 있는데···.”
“멋있네.”
기껏해야 이제 스물, 혹은 스물 하나인데 아이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응원받아야 마땅하다.
* * *
번쩍번쩍이는 지안의 집이 있는 리드빌딩에서 씁쓸함을 머금고 나온 박선후는 이내 휴대폰 배경화면에 있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사진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남들과 비교하면 불행 뿐이다. 주어진 현실과 주어진 행복에 집중하자!’
그는 다시금 화이팅을 다짐하며 배달 일을 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 으레 그러하듯이, 언제나 일이 순조롭지는 않다.
“이거 하나 먹었죠?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데?”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업체 측의 실수도 배달원이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다.
선후는 최대한 기분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예? 아니요. 여기 테이프도 붙어 있는데요.”
“웃어? 웃음이 나와?”
“아니요··· 죄송합니다.”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하, 그지새끼도 아니고··· 가요 가.”
“···네.”
선후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 정도는 운 좋게 끝난 거다.
그가 정한 일과 마무리 시간, 밤 열 시가 되자 집으로 들어갔다.
“이서야, 아빠 왔다!”
창백하고 병약한 얼굴이지만 따뜻한 미소를 품은 아내가 아기를 안고 그를 맞이했다.
“오빠 왔어?”
“우리 이쁜이 잘 지냈어? 아이구 우리 이서 좀 볼까?”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기를 보며 재충전하고 있는 그때.
쿵쿵쿵!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 무서운 소리에 잠자던 아기가 깨서 울고, 아내는 몸을 움츠렸다.
박선후는 미간을 좁히며 현관문을 열었고, 동시에 발이 날아왔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