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둘 다. >
텅-!
하얀 공이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푸르른 초원이 능선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짝짝짝!
“임사장님 나이스샷!”
한 남자가 골프채를 쥐고 있는 중년인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임사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김해권이, 이혼했다고 했었나?”
“예, 3년 됐습니다.”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벌써 그렇게 됐어? 와이프가 강···.”
“강선주입니다.”
“그래 강선주,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지 않았어? 왜 이혼을 하고 그래.”
김해권이라 불린 남자의 얼굴이 찰나 굳어졌다가 금세 펴진다.
“그러면 뭐하나요? 맨날 돈돈돈거리고, 어휴, 괜히 사장님 귀 더럽힐까 말씀 못드리겠네요.”
“그래? 아깝네···.”
김해권은 임사장과 함께 공이 착지한 쪽으로 골프카트를 타고 이동했다.
골프가 끝나고, 임사장을 먼저 보내고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길, 김해권은 임사장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하여튼 늙은이들이 더 밝혀, 대놓고 남의 와이프 몸매 품평이나 하고 말이야, 쓰레기새끼들···.”
김해권은 자신의 옆에 있는 여성 캐디가 듣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해권은 캐디에게 조언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탐욕이 넘치는 것들이 이 사바사바가 잘 먹혀서 나같은 영업들이 먹고 사는 거지. 세상이 다 그래, 너무 정직하면 숨막혀, 그지 되고 호구 되고··· 가자.”
캐디가 먼저 골프카트를 탔다.
그제야 해권의 눈에 캐디가 제대로 들어왔다. 모자를 깊이 눌러썼지만 숨길 수 없는 새하얀 피부, 딱 붙는 옷이 아닌데도 도드라지는 몸매, 그는 입맛을 다시다 본래 앉으려던 뒷좌석이 아닌 캐디 옆을 앉았다.
“처음 보네? 새로 들어왔어?”
“네.”
“딱딱하긴. 여기 더러운 꼴 많이 볼 텐데, 힘들면 이 오빠한테 연락해. 술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까.”
그가 운전석 쪽에 자신의 명함을 꽂았다. 캐디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 * *
쿵짝쿵짝쿵짝짝!
지하1층 황진이 노래방.
“쓰읍, 후··· 아 씨발 진상 걸렸네···.”
복도에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이 벽에 등을 대고 담배를 피고 있고.
“읍, 읍, 우우웩!”
어떤 남성은 여성에게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가다가 구석에 토를 한다.
“자자 들어갑니다. 들어갑니다~ 지나갈게요~”
그곳의 주방에서 나온 왜소한 체격의 웨이터가 쟁반에 과일안주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
그는 한 방에 들어가기 전, 베스트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안주 속에 감추었다.
끼익-
“자, 므찐 사장님들 아가씨들 맛있는 안주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해권이 임사장과 함께 업소 아가씨들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해권이 웨이터를 보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 너 뭐냐, 처음 보는 놈인데?”
“아이고 여기 애정이 많으시구나, 예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저는 스리스리 싹쓰리, 사장님들의 팁을 싹 쓸어버리려고 동해 건너 온 싹쓰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웨이터의 능글맞은 소개에 아가씨들은 물론 임사장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저것 보소, 대놓고 팁 달라고 까부네, 예끼 이 새끼야!”
임사장이 오만 원 짜리 지폐를 바닥에 던졌다. 웨이터는 재빨리 그것을 집고는 임사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만수무강하십시오!”
해권은 웨이터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가는 곳마다 신입들이 많이 보이네, 내가 봉으로 보이나?”
해권의 말에 옆에 있는 아가씨가 그의 팔을 가슴에 끼우며 애교를 부렸다.
“아잉 오빠, 귀엽잖아.”
“난 남자새끼들은 안 귀여워, 뭐 얼굴 보니까 쟤는 여장시켜도 되겠다.”
“푸흡, 대박, 우리도 쟤 왔을 때 그 얘기 했었는데.”
“닥치고. 오늘도 끝나면 알지?”
“당연하지, 시간 비워뒀어.”
해권은 임사장 옆에 있는 아가씨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거기 아가씨들, 알지? 우리 임사장님 오늘 화끈하게 모셔야 한다. 알았어?”
“예 당연하죠! 오빠 오늘 집 못 들어가게 해줄 거야.”
황진이 노래방은 윗층이 바로 모텔이다. 그렇게 김해권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모텔에 갔다가 주차장으로 나와 대리기사를 불렀다.
“후우, 프흐, 아, 씨벌 너무 많이 마셨나. 아까워 죽겠네, 서지도 않고, 어우···.”
그가 비틀거리며 차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람이 다가왔다.
저벅 저벅 저벅
“안녕하세요. 대리 부르셨죠?”
청아한 목소리, 해권은 머리를 털고 대리운전기사를 보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썼지만 피부가 하얗고, 검은 옷을 입었지만 딱 달라붙어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보였다.
“어, 어우, 이 새벽에 여자기사분도 오시네.”
“아, 네. 돈 버는데 밤낮이 따로 있나요.”
“그렇긴 하죠, 갑시다.”
그는 당연한 듯이 뒷좌석이 아니라 조수석을 탔다. 그리고 기사가 기어를 파킹에서 오토로 바꾸려고 할 때,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러자 기사가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몇 초간 있다가, 고개를 돌려 해권을 보았다.
움찔한 그가 손을 뗐다.
“에, 왜, 왜요. 아아 이런, 아이구 미안해요 미안해. 습관이 돼서, 얼른 갑시다.”
“예.”
차가 출발하고, 해권은 대리기사를 힐끔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 * *
툭, 툭툭.
누군가가 옆구리를 친다. 하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일어나십시오.”
“으으음···”
그때.
쩌억-!!
해권의 뺨이 순간 불로 지진 듯이 화끈해졌다. 반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혔다가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들었다.
“허어억!”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그 여성 대리기사가 옆에 앉아있고, 뒷좌석에는 웨이터 싹쓰리가 가운데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밖은 처음보는 곳이었다. 네온사인이 보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 곳이다.
기묘한 불안감이 온몸을 덮쳤다.
“뭐,뭐,뭐야 니네, 여기 어디야?”
옆에 있는 대리기사, 하루가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캐디가 대리기사로 왔는데도 못알아보는 거 보니, 많이 마셨나봅니다.”
해권은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다가 그제야 캐디와 대리기사가 같은 여자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투,투,투잡?”
“프흐.”
그의 대답에 뒤에 있던 웨이터, 싹쓰리 쪽새가 실소를 흘리며 검은 가방을 하루에게 건넸다.
하루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해권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골프장 회원권 결제 법인카드. 임사장, 박사장, 강사장, 김사장 등등을 접대, 성매매, 원조교제까지 알선하셨군요.”
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그동안의 행적까지 자료로 보여주자 해권은 당황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말했다.
“다,당신들 뭐야, 아,아니 이건, 그냥 영업이 영업, 펴,평범한 영업!”
하루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쪽새가 프린트로 뽑은 자료 한 뭉텅이를 건네었다.
“수주 마진 빼먹은 것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면 안 걸린 게 이상할 정도군요.”
하루가 자료를 해권에게 보여주었다. 해권은 이를 보고는, 회사에 제출하면 빼도박도 못하는 내용이란 걸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감빵 가는 건가요?”
“우리 경찰 아닙니다.”
하루의 말에 김해권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뒷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도둑입니다. 잘못 많이 하는 사람 협박하고, 돈 뜯어내는 도둑, 옛표현은 의적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너무 의외의 대답에 해권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네?”
“명진빌딩에 본인명의로 된 상가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거 하나 넘기시면 깨끗하게 폐기하겠습니다. 앞으로 경찰이 수사하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게, 사후처리 정확하게.”
“그, 그건 제 전재산···.”
해권이 쩔쩔매다 간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루는 기계처럼 감정없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만 이었다.
“등기 세탁 한 번 돌릴 겁니다. 당신이 상가를 줄 정도로 가깝지만, 몸은 당신과 먼 사람. 이혼한 강선주씨의 아들 명의로 돌리시면 저희가 알아서 회수하겠습니다.”
구체적인 방법까지 마련해온 걸 보니 진심이다.
기겁한 그가 두 손을 내저었다.
“저,절대, 절대 안 됩니다! 얼마, 얼마가 필요한데요?!”
“현금도 가능합니다. 상가 시세가 2억8천이던데, 2억까지만 받겠습니다. 상가 급매하십시오.”
“아, 으, 그, 그건···.”
하루가 머뭇거리는 그에게서 자료를 빼앗아 가방에 챙기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이 자료는 경찰에게 넘기겠습니다. 연결된 경찰이 있어서 수사는 바로 진행될 겁니다.”
“나,나,나는, 내가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데! 시팔!”
상대는 어차피 여자에다가 한 명은 비리비리한 사내, 지금 술에 취해 제 컨디션이 아니기에 싸우는 건 힘들더라도 도망칠 수는 있다.
그는 하루가 가지고 있는 가방을 확 빼앗으며 문을 열었다.
턱-
해권은 문을 열고 한 발을 바닥에 내린 상태로 정지했다. 문 바로 앞에 거대한 덩치에 터질듯한 근육,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공포가 치솟았다.
그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려고?”
하루가 뒤에서 말을 이었다.
“거부의사를 밝히셨으니 자료는 경찰에 넘기겠습니다. 수사가 진행될 때까지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가, 적당한 때에 경찰서 앞에 내려드릴 겁니다.”
해권은 포기한 듯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상가, 상가 매매···할게요.”
* * *
며칠 뒤.
김해권은 상가를 급매로 처리한 후,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신고하면 자신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 이뤄놓은 거래처도 잃고, 회사에서도 어마어마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감빵에 가는 것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탁-
차에 타고, 종이박스 안에 현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백미러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
“커허업!!”
그가 기겁하며 뒤돌아섰다. 뒷좌석에 황장수와 하루가 어느새 타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가 손을 뻗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시죠.”
그가 돈다발을 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다.
“못믿겠습니다. 이미 뒤통수를 칠 생각을 다 하고 접근한 사람들인데··· 선수금 1억, 모두 폐기하면 나머지 1억을 주겠습니다.”
“이미 폐기했습니다. 경찰도 당신의 혐의를 입증할 수 없을 겁니다.”
“···네?”
“그리고,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가 어리버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 황장수가 그의 돈다발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하루가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거리 앞에서 세워주시죠.”
돈은 이미 뺏겼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머뭇거리던 해권은 하는 수없이 그녀가 말하는 곳으로 데려가서 내려주고, 그 자리에 비상깜빡이를 켠 채 핸들에 머리를 박고 가만히 있었다.
한순간에 쌩돈 2억을 빼앗겼으니 상실감이 매우 큰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약속하긴 했지만, 정말 깔끔하게 처리했을지, 다음에 이런 일이 없을 지 확신할 수 없으니 매우 찝찝하다.
빵빵 빵- 빠앙!
그와중에 뒤에서 클락션이 울렸다. 작은 경차, 분홍색 모닝이다. 분명 젊은 여자이거나 아줌마다.
해권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감히 지금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때 시비를 걸었으니, 저 뒷차는 욕먹어도 싸다.
그는 창문 열고 뒤에 모닝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좀 돌아가 이 개새끼야! 빵빵거리지 말고!! 시파알!!”
그러자 분홍 모닝 차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내렸다. 체구가 2미터 가까운 거구에 흉악한 인상의 사내다. 광배근 때문에 팔도 옆구리에 붙지 않는 근육질이다.
저벅 저벅 저벅
해권은 그대로 얼어붙어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창문을 채 올리기도 전에 거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 너 뭐라고 했어. 야, 내려봐.”
그는 바로 쭈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니, 그게···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안 좋은 일 있다고 차 많이 다니는 도로에서 피해를 줘도 돼?”
“아,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빨리 차 빼, 쳐맞기 전에.”
“네,네 알겠습니다.”
울고싶은데 뺨맞은 격이다.
그는 혹시나 들릴까 하여 창문부터 꼼꼼히 닫은 뒤, 욕을 내뱉으며 집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기 직전.
지이이잉 척-
누군가의 발이 걸리며 문이 열렸다. 무서운 인상의 사내 둘이다.
이제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라든다.
사내 중 한 명이 목에 걸린 신분증을 보여줬다.
“경찰입니다. 김해권씨 되시죠?”
“···네?”
해권은 순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끔벅였다.
둘이 다가오더니 그의 팔을 한 짝씩 붙잡으며 말했다.
“횡령, 성매매, 뇌물 수수, 성추행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명할 기회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잉, 갑시다.”
“자, 잠깐만요.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