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쓰레기 처리 >
스카이라운지 카페.
김선태는 씩씩거리면서 하루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안서은의 뒷말에 선태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하루씨가 저번에 말했던 그 쓰레기가, 이 쓰레기에요?”
선태가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두, 둘이 아는··· 사이?”
“네, 요즘 흔히 말하는···.”
그때 하루가 끼어들며 대신 대답했다.
“베프.”
“베,베프···.”
서은은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쓰레기씨, 하루씨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제가 가장 아끼는 친구에요. 이제 우리가 소개팅을 이어갈 이유는 없는 것 같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김선태는 지금 물이 한참 엎질러졌더라도 이 배경도 외모도 완벽한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잡고 싶은데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서은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다.
“아버지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송양그룹 둘째아들이 망나니라서 이번 물산 협약 건도 재검토해보셔야겠다고.”
회사 얘기에 김선태는 순간 머리에 번개가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부진한데, 자신으로 인해 회사에 그렇게 큰 계약이 틀어지면 후계 구도에서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
“잠시만요. 우리 공과 사는 구분하죠, 제가 개인적으로 여자 좋아하는 거랑 일이랑은 상관 없잖아요.”
필사적인 항변에 서은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저도 세상이 그렇게 공평했으면 좋겠는데,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에 영향을 끼치더라고요. 면밀히 검토해보고 문제 없으시면 정상적으로 진행되겠죠, 찔리시나요?”
“네? 아,아,아니요?!”
서은은 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서 나가세요. 저는 제 베프랑 야경 보면서 한 잔 마시게.”
“······.”
보통은 이렇게 폭탄을 터트린 쪽이 먼저 나갈 텐데, 자신보고 먼저 나가란다.
김선태는 잠시 황당하여 멍하니 서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하루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이 빨대로 눈알 파버리기 전에, 썩 꺼져.”
“뭐,뭐?”
“썩.”
스으윽-
하루는 다리를 들어 하이힐 뾰족한 굽으로 김선태의 허벅지를 밀었다. 김선태는 그대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에야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문득 오기가 치민다.
벌떡 허리를 펴고 일어난 그가 하루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뒤로 확 당겼다.
“야이 시발년들아, 니네 다 짜고 치는 거지? 내가 존나 만만해보이냐? 나 김선태야, 송양그룹 김선태라고!”
치켜뜬 두눈에 분기가 가득하다.
고급 카페에 걸맞지 않는 격한 행동에 시선이 모였다. 한 커플은 휴대폰으로 그 행동을 동영상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서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맛은 좋네.”
하루가 그 상태에서 차분하게 김선태의 엄지를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꼭···.”
하루는 그의 엄지를 확 꺾으며 팔을 돌렸다.
으득
“어헉!”
너튜브로 인해 평소보다 더 운동을 많이 한 덕분에 근력도 악력도 훨씬 강해진 하루였다.
“물리치료를 동반해야 말귀를 알아들을까.”
우드득-
“끄아악!”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김선태를 한 바퀴 돌려, 한쪽 팔을 등 뒤로 뻗은 채 아무런 행동도 못하게 만들었다.
퍽 퍽!
그러고는 발로 그의 오금을 차 무릎이 바닥에 닿게 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공개적으로 두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모습이다.
하루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김선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예쁘디 예쁜 얼굴인데, 소름이 끼친다.
“저기 앞에 출구 보이지, 내가 손 놔주면 지체없이 저기로 꺼진다. 대가리 돌리면 목 돌려버린다. 가!”
하루가 손을 놓자, 김선태는 생존본능으로 출구로 뛰어갔다.
그제야 뒤늦게 다가오던 매니저와 남자직원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멈칫거린다.
김선태는 저 멀리 떨어져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문 앞에서 돌아서서 하루에게 소리쳤다.
“니네 두고보자! 절대 안 넘어가!”
하루가 미간을 좁히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 그 모습에 선태는 기겁하며 문열림 버튼을 연타하고, 문이 50센티도 열리지 않았을 때 게걸음으로 밖으로 다급히 나갔다.
그가 우스꽝스럽게 나간 직후, 문이 닫히자마자 도도한 표정으로 커피를 음미하던 서은이 잔을 내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하루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 여기서 맞선 보는 거 알고 왔어요?”
하루는 그녀의 표정변화에 미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때 이후로 저놈 뒷조사 중이었는데, 마침 발견해서 나선 겁니다. 저런 놈이 서은님과 한 테이블에 있는 것은 1분도 용납하기 싫었습니다.”
하루의 말에 서은이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와, 잘 했어요. 그런 놈이 하필 인상은 선해서, 순수한 사람으로 착각할 뻔 했어요.”
“해수님이 그랬습니다. 사기꾼들은 미소를 많이 지어서 인상이 선하고 신뢰가 가게 생겼답니다.”
“아··· 일리가 있네요. 근데 그런 멘트는 또 어디서 배웠어요? 아주 무섭고 멋있던데요? 물리치료를 동반해야 말귀를 알아들을까? 크!”
서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투를 따라하자, 하루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 그건, 강수대에서 근무할 때 해수님의 언행을 연구했습니다. 해수님은 손이 아니라 말만 해도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아··· 그렇구나, 그때 같이 있으셨지, 하하, 해수씨가 무섭긴 무섭죠, 특히 범죄자들한테는.”
“맞습니다.”
서은은 검지로 턱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음, 그런데 저 쓰레기씨가 이대로 깔끔하게 일을 끝낼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알아서 조치를 취하겠지만, 혹시나 저놈이 하루씨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바로 연락주세요.”
서은의 우려섞인 말에 하루는 김선태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넘어가는 게 저놈에게 가장 좋은 선택일 텐데, 두고 봐야죠.”
의미심장한 동문서답에 서은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빙긋 웃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일일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 * *
다음날.
쾅!
김선태는 현관문을 거칠게 닫고 차에 올라탔다. 그의 왼쪽 뺨은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선 자리 무산 및 여러가지 사항이 그의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 썅놈의 두 년들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할까···.”
김선태는 복수심에 이를 악물었다가, 그 도도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떠올라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리고 히죽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몸은, 몇가지 문제 정도야 애교로 보아넘길 만큼 훌륭했다.
그 멍청한 미소가 음흉한 미소로 바뀌며 혀로 윗입술을 핥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있네,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아먹는 방법.”
그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어, 난데, 두 년 신상 다 캤지? 그년들 미행 좀 붙여, 24시간 365일 어디서 뭐하는지 뭘 먹는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전부!”
* * *
강력반 사무실.
오갱의 자리에 팀원 세 명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오갱이 최근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이었다.
“···그러니까 얘네가 원래 채권 넘겨받아서 추심하는 애들인데, 지네가 대출을 더 해줘서 본래 대출금을 갚게 하고, 지네한테 떨어지는 배당금 먹고, 상대방은 대출이 또 생기고.”
근육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출을 다른 곳에서 못 받을 텐데, 어떻게 대출을 해준 겁니까?”
오갱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중고차, 차 구매 대출은 잘 나오거든, 걔네가 중고차도 파는데, 300만 원 짜리를 3000만 원이라고 계약서 작성해주고 돈을 받았다가 고객한테 다시 주거나, 아니면 대출금을 갚게 하는 거지.”
“와··· 사실상 거기서 거긴데 중고차를 파는 거네요.”
“거기서 거기도 아니야, 더 최악이지.”
해수가 오갱의 말을 받고 나지막히 말했다.
“대출금이 나오면, 대출을 갚지 않을 거야. 결국 고객의 대출만 더 늘어나겠지.”
두 근육 사이에 끼어있던 신입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예?”
해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듣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중고차 대출 사기건이다.
이미 채권추심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수중에 한 푼이라도 더 필요하다. 그런 자들이 대출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는다?
돈이 들어오기 직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막상 통장에 돈이 꽂히면 열에 아홉은 이 돈을 불릴 생각을 한다.
결국 악순환이 된다.
신입이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그 지옥같은 상황을 상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업체 이름이 뭡니까?”
탁-
오갱은 방향키를 눌러 한 회사의 로고를 띄우며 대답했다.
“행복드림.”
* * *
한 임대 아파트, 거실 베란다 쪽에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식탁 앞에는 의자에 여인이 앉아있다. 그녀의 눈 밑은 시커멓고 머리는 풀어헤쳐져 있다.
지잉-
진동에 그녀가 힘없이 가느다란 팔을 들어올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행복드림 조팀장: 강선주 고객님, 이번주까지 납부하실 금액은 5,776,310 원 입니다.
“후우···”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장난감을 내려놓고 엄마를 힐끔 본다. 그 눈빛이 미묘하다.
-어, 나 바빠, 빨리 얘기해.
“어, 바쁘다니까 본론만 말할게. 그거, 밀린 양육비 좀 지금 줄 수 있을까?”
-···또 그 얘기야?
“여보, 나, 나 진짜 힘들어, 최근에 담낭 수술까지 하고··· 여보 나 부탁이야, 제발 양육비 좀 줘.”
-여보는 누가 여보야, 이혼한 지가 언젠데. 그리고··· 나도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머니 최근에 암 수술하셔서 빚에 허덕이고 있어, 나도 힘들어, 내가 양육비 안 주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제발··· 조금만이라도, 3년 동안 세 번도 안 줬잖아!”
-하··· 진짜, 짜증나게 하네, 야, 그러면 신고해, 양육비 안 줬다고 신고하라고, 난 먹고 뒤질 돈도 없으니까.
“이러다 내가 죽겠···”
뚝-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하···.”
세상이 원망스럽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빠 없이도 모자람 없는 아이로 키우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 대가가 병이었고, 세월이 지날 수록 빚만 늘어났다.
강선주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혼자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지잉-
그때, 진동이 다시 울렸다.
-행복드림 조팀장: 아 그리고, 저희가 추천드린 생명보험, 심사 통과되셨습니다.
문자를 보는 강선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아들에게로 향했다.
스윽-
그녀는 홀린 듯이 아들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아들이 그녀를 보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다. 눈동자가 티없이 맑다.
“엄마?”
그녀는 어느새 아들의 두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베란다 문을 열고, 창문을 열고, 방충망까지 열고, 아이를 밖으로 내밀었다.
후우우웅-
14층이기에 거센 바람이 모자를 날카롭게 휘감았다.
아이는 무서울 법도 한데, 입을 앙 다문 채로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고,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엄마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담담하다.
강선주의 팔에 힘이 점점 풀린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아이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