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찰이 너무 강함-208화 (208/255)

< #208. 맞선 >

“···선이요?”

“그래, 송양그룹 둘째아들, 김선태.”

안회장의 입에서 선 볼 사람의 배경부터 나오자 안서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안회장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회성도 좋고, 실적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다고 하더구나.”

서은은 재벌의 딸로 태어난 만큼,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선 자리가 줄줄이 들어왔다. 그러나 웬만한 건 쳐냈고, 거르고 걸러서 안회장이 가져와도 서은이 받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용하여 권력을 더 탄탄히 하려는 목적이 보여서 그랬었다.

“······.”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다른 느낌의 눈빛이다. 이전에 신해수와의 거래 성사도 그렇고, 일도 아니고 전화나 문자 한 통이면 될 이야기를 여기까지 와서 말하는 걸 보면, 안회장보다는 진짜 아버지의 마음같아 보인다.

문득 오늘 해수의 아지트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서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선, 볼게요.”

서은의 수락에 안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정말이냐?”

서은은 눈을 깜박이다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최근 십수년간 아버지가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뒤늦게 물러난 안회장은 서은 뒤에 강비서를 힐끔 보고는 뒷짐을 지고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부담갖지 말고, 그 요즘 젊은이들은 번호 먼저 교환한다지? 그쪽이 먼저 연락하게 말해놓으마.”

“알겠어요.”

“그래, 음.”

안회장은 딸에게 왔던 목적을 이루고 난 이후, 한동안 어색하게 가만히 서 있다가 사무실을 나섰다.

*  *  *

-···맞선이라. 소개팅? 보통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지.

-카페? 죽여요?

-아, 하루씨는 카페 안 가봤나?

-헐, 누님 카페 안 가봤어요?

-대박, 20대 여성이 카페를 안 가봤다니, 현실성이 없다

그 다음날, 아지트에서의 대화다.

시작은 단순했다. 안서은이 게임챗으로 맞선을 나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해 물어오자 하루는 팀원들에게 의견을 물었었다.

하루와 해수 단 둘이라면 그녀의 배경을 알고 배려를 했겠으나, 마침 해수는 자리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충격에 빠진 반응에 하루는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날 바로 홀로 카페를 찾아갔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카페 카운터 뒤에 있는 메뉴를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앞에 그림으로 나와있는 메뉴는 한정적이어서 뭘 골라야할지 난감했다.

하루가 빤히 메뉴를 바라보고 있자,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

“손님, 찾으시는 메뉴 있으세요?”

하루는 당황했지만 훈련된 감정조절로 티를 내지 않고, 마치 카페를 많이 와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 카페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것으로 주세요.”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예, 그거.”

하루는 용기있게 주문을 하고 금세 나온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창문가에 긴 바가 있고, 원목으로 된 높은 원형 의자가 쭉 나열되어 있는 자리다.

‘이것으로··· 카페를 정복한다.’

하루는 아메리카노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텁 빨대를 물고 쭉 빨아들였다.

“풉, 펫, 퉤!”

그러고는 빨아들인 속도보다 더 빨리 내뱉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아메리카노의 쓴맛은 독약도 삼켰던 하루가 1초도 안 되어 뱉어내게 만들었다.

‘뭐가 이렇게 써, 이게 제일 잘 나가는 거라고?’

하루는 직원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돌려 멀리서 직원을 째려보았다. 직원은 일을 하다가 그 눈과 마주치고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정보입수를 위해 커뮤니티 사이트에 검색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아 빨면서 대충 키보드 두들기다가 왔지 나같은 잉여 많더라

-(링크) 여기 아메리카노 존맛 아아 장인이 장담

┗이새끼 라임 좀 치는데?

-아메리카노 대체품 없냐? 질리는데 이거만한 게 없네

┗아메리카노 맛있자노

┗뭐라카노?

┗하지마 형들

반응을 보니 직원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닌 것 같다. 하루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딴 걸 왜···?’

근성의 하루는 눈을 딱 감고 아메리카노를 다시 마시려고 입술을 빨대에 갖다 대었다.

그때.

“저기요.”

옆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가까운 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 확실해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깔끔한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혼자 오셨어요?”

“네.”

“아, 그러면 여기 자리 앉아도 되나요?”

남자는 하루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너무 가깝지도, 그러나 대화소리는 들릴 정도로 가까운 자리.

하루가 그 자리에 앉지 말라고 권한을 내세우기 애매한 자리였다.

“네.”

“감사합니다.”

하루는 이 남자가 귀찮게 굴까봐 아예 살짝 등을 돌리고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걸지 않았다.

5분에 걸쳐 아메리카노를 정복하고 카페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저벅 저벅 저벅

뒤에서 발소리가 빠르게 들려온다. 곧이어 카페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하루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좀 걸어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가 차키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툭-

남자는 감각이 무딘지 꽤 묵직해보이는 차키를 떨어트리고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차키는 날개모양의 앰블럼이 붙어 있었다.

이래봬도 경찰에게 가정교육을 받은 하루, 그녀는 곧바로 차키를 주워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꽤 가까이 다가가서 불러도 대답없이 걷는다.

“저기.”

일부러 무시하나 싶을 정도.

하루는 두 걸음 빠르게 걸어 바짝 따라붙어 그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야.”

“어, 어어 네, 아? 아까 그 카페에서 그 아리따운 분···.”

하루는 말없이 그의 차키를 내밀었다. 그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쩐지 어색한 얼굴이다.

“어, 내 차키? 아 떨어트렸구나! 와 진짜 고마워요. 이거 어쩌지, 제가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은데.”

“가세요.”

하루가 바로 남자를 지나치자, 이번에는 그가 따라붙어 하루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가시면 내 마음이 불편해요.”

하루는 정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민망하지도 않은 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붙잡고 있다.

“괜찮습니다.”

하루가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가려고 하자 다시 옆에 따라붙었다.

“아아, 그러면 내가 사례라도 하게 번호 좀 줘봐요.”

“괜찮습니다.”

하루가 무시하고 몸을 돌리자, 그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아, 되게 튕기네, 이러면 매력 없는데.”

하루가 걸음을 옮기려다 멈추고,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처음에 봤던 친절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억대 벌거든? 그 하루를 너한테 쓰려고 했는데, 그만 좀 튕기지 그래? 오랜만에 연기까지 했건만.”

하루는 말없이 그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더 이상 하루를 따라가지 않고 뒤에서 이죽거렸다.

“꼭 저렇게 지가 존나 비싼 줄 아는 년들이 있어, 저러다가 나중에 늙어서야 돈돈거리면서 무릎 벌리겠지.”

하루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여기서 고작 도발을 했다고 주먹을 쓸 수는 없다.

대신 저런 쓰레기를 아무런 처벌 없이 평탄한 일상을 보내게 할 수도 없다.

멀리서 지켜보던 하루는 그가 어떤 차를 타고 가는지, 차종과 차 번호를 외우고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지트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겉옷을 소파에 벗어던지며 소리쳤다.

“90그림자 그 88888, 소유자 어떤 놈인지, 그놈은 뭐하는 놈인지 알아봐.”

아지트에 거의 항상 거주하고 있는 정영수가 반사적으로 차량번호를 받아적으며 대답했다.

“이건 뭔데요?”

허공을 바라보며 그 남자를 떠올리는 하루의 눈빛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살짝 혼낼 새끼.”

“아, 오케이.”

저런 상태의 하루는 건들지 않는 것이 좋다.

고개를 끄덕인 영수가 피아노를 치듯이 손가락을 왔다갔다하며 한 번 풀고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  *

대성E&M 건물의 1층.

또각 또각 또각

“엇, 어업!”

“대,대표님, 오늘따라 빛이 나십니다. 아, 아니 오늘 더 빛나십니다!”

안서은은 약속시간이 되어 회사 내 헤어숍에서 메이크업을 하고 나왔다.

헤어 컬링으로 여신 머리스타일, 한쪽이 옆트임처럼 주름이 말려올라가 있는 베이지 원피스, 은은한 파스텔톤의 하이힐에 블랙 재킷을 어깨에 걸친 모습이 퍽 도도해보였다.

그녀가 외모에 힘을 준 모습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강비서나 김가드는 물론 지나가는 회사원들도 마주치면 멈칫멈칫했다.

그녀가 지나간 뒤에 모여든 회사원들이 수군거렸다.

“···저 정도면 자기가 그냥 연예인 해도 되지 않나.”

“그러니까, 대표가 얼굴로 압살하니까 연예인들 기가 죽지 죽어.”

“와··· 오늘 선 보신다고 했나, 남자 진짜 부럽다.”

정작 선 자리를 가는 서은은 그저 마음이 복잡할 뿐이었다.

선 자리는 5성급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카페였다.

카페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다음 코스로 식사를 하는 순서였다.

그곳에는 송양그룹 둘째아들 김선태가 먼저 와 있었다.

김선태는 휴대폰으로 안서은을 검색하여 사진을 둘러보았다.

“아, 왜 이렇게 안 와···. 흠, 이쁘긴 이쁜데. 요즘은 사진빨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근데 이 여자는 뭐 제대로 찍힌 사진이 없어.”

검색되는 사진이 다들 공식 행사에서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 뿐이다. 옆모습이나 대각선, 정면이어도 멀리서 찍어서 만족할만한 사진이 없었다.

“대성그룹 막내딸이라··· 성깔은 좀 있어 보이는데, 이 정도면 내 와이프 자격이···.”

그때.

또각 또각 또각

청력을 자극하는 힐 소리, 김선태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안서은을 보는 순간 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녀를 사진이 담아내지 못했다. 사진이 나쁜 의미로 사기꾼이었다.

김선태는 수많은 어리고 예쁜 여자연예인과 아이돌을 만나보았지만, 이처럼 기품과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자리잡은 미인은 본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안서은입니다.”

목소리까지 청아하고 정갈하다. 계획 변경이다.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대충 정략결혼처럼 인연을 맺고 사생활은 자유롭게 터치하지 않는 관계로 합의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영혼까지 올인해도 될 듯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기술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그녀를 붙잡기로 결심했다.

“아, 네, 기, 김선태입니다. 앉으시죠, 아아 맞다.”

김선태는 그녀에게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가, 다급히 나와 손수 의자를 빼주었다.

그 당황하는 모습이 퍽 순수해보여 서은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두근 두근 두근

그 미소를 보니 선태는 오랫동안 별 반응이 없었던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자리는 이미 집안과 집안이 서로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리,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리다.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서은이 한 손을 가슴에 대며 목을 살짝 숙였다. 예의도 바르다. 손에는 어지러운 매니큐어도 칠하지 않고 오로지 보호용으로 투명한 것만 칠해져 있다.

선태는 한눈에 반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여지없이 드러내며 입을 떼었다.

“아뇨, 일찍 온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봅니다.”

“···네? 갑자기 왜요?”

“안서은씨를 이제야 만난 걸 보면요.”

“아, 아하하···.”

서은의 어정쩡한 반응에도 선태는 굴하지 않고 온갖 사탕발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작은 것에도 서은이 미소를 지어주니 그녀도 자신에게 꽂혔다는 생각에 기분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저 잠시.”

“아, 네네, 다녀오세요.”

조금 시간이 지나, 서은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났다.

스윽

서은의 아찔한 뒷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벽에 가려지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시선을 가져올 때였다.

찌릿-

선태는 서은 바로 뒤에, 서은에게 가려져 있던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고개를 살짝 들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너, 너, 너?”

그곳에는 하루가 김선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 니가 왜 여기 있어? 너 나 스토킹했어?”

하루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응.”

“와, 야, 그러니까 그, 지금은 안 돼, 너 일단 꺼져, 빨리!”

“싫은데.”

“와 미치겠네, 아.”

그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재빨리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어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냐, 이게 목적이잖아, 어? 빨리 가.”

그가 하루에게 준 것은 백 만원짜리 수표였다. 하루는 그 수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요지부동이었다.

“모, 모자라? 야, 야 이거 다 가져, 제발 가라 좀, 모자라면 나중에 더 줄게.”

그가 몇 장을 더 주었지만 하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또각 또각 또각

서은이 멀리서부터 다가온다. 그는 결국 하루를 내쫓는 것을 포기하고 다급히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뭐하고 있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

그때, 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테이블로 다가왔다. 김선태가 기겁했고, 서은도 그제야 하루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하루가 수표를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이 아저씨가 이거 주던데, 전에 돈으로 몸 사려던 거 잊으라면서.”

하루의 말에 선태가 발악했다.

“무, 무슨 미친 소리야?!! 서, 서은씨, 저 여자 미친 여자에요. 그냥 무시해요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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