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살인범, 자수하다. >
불 꺼진 사무실.
스크린에 사람 형태의 그림자 몇 개가 긴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 큰 기업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네요.
-엄밀히 말하면 주가만 일시적으로 떨어질 뿐이지, 매출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오.
-그걸 누가 몰라서 얘기하나, 주인이 바뀌던지 주인이 바뀌기 위해 내부에서 피튀기게 싸우겠지, 결국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 아니요?
-자자, 지금 중요한 건 누가 KD를 이렇게 단숨에 무너트렸는가가 아닙니까? 그걸 알려고 모인 거잖아요?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맙시다.
-글쎄요··· 천선생일까? 아니면 신해수?
-풉, 신해수는 무슨, 일개 경찰이 무슨 힘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비웃고 있어, 지금 천선생이 어쩌다 저 꼴이 됐는 지 몰라? 무식하면 입을 닫고 있어야 반이라도 가요.
-누가 누구보고 무식하다는지, 천선생 저리 된 건 명확하게 마실장때문이구만.
-그 마실장이 신해수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멍청아
-뭐? 멍청이? 지금 말 다 했어? 니가 그런 거 아니야? 의심스러운데? KD가 망하기를 그쪽이 가장 바라지 않았나?
쾅!
-그 무슨 망발을!
-어허! 그만 그만! 지금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예민한 건 알겠는데, 우리끼리 싸워서 무엇하오? 아무튼, 몸을 사립시다. 오늘 회의는 이만 종료하죠.
-크흠···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해요.
-예, 그럼 다음을 기약하며, 다들 몸 조심하십시오.
삑-
스크린이 꺼졌다. 이제 통유리너머로 흐릿하게 비추는 달빛만이 사무실 안을 밝힐 뿐이다.
그곳에는 두 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스윽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덩치가 꽤나 위협적이다.
“재밌네요. 높으신 분들 입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니.”
“크흠”
신해수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중년인, 대성의 주인 안회장이 미간을 좁힌 채 목을 가다듬었다.
해수가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칠성회의 기둥 중 하나, KD가 급속도로 무너지는 꼴을 보고는 그제야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던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일성, KD, 칠성회 위에 군림하던 천상까지 무너졌다. 천선생과 회사원들이 아직 잡히지 않고 잠적하였지만, 백만년 견고할 것 같던 칠성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성이 돌아섬으로 인해 이제 세 군데가 남았고, 재력은 한 곳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되겠나?”
“뭘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흠···”
해수는 문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추어 섰다.
“따님이, 회장님의 선택을 좋아할 겁니다.”
“···”
해수의 말에 안회장은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
특수대 본부.
액션영화를 찍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던 괴한 단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잡아라.
시체뿐이고 흔적도 없어서 사막에서 바늘찾기에 버금가는 난이도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사력이 뛰어난 강력팀 세 팀의 능력은 뛰어났다.
“이 측면, 여기도 측면, 측면, 측면, 측면!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냐, 대 디지털 시대 아니야? 그래서 나온 게 이 얼굴이다 이거야.”
곽반장이 대형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실제 사진같은 해상도로 누군가의 얼굴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 친절해보이면서 날카로움을 겸비한 중의적인 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탄력있는 피부, 냉정해보이는 얇은 입술.
천선생의 몽타주다.
해수도 천선생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마음이 오묘했다.
특수대가 천선생의 진짜 신분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몽타주 외에도 괴한들이 머물렀던 지부 세 군데까지 확인했다.
몽타주를 보고 오갱이 중얼거렸다.
“참 묘~하게 생겼다. 근데 지금 몽타주가 이렇게 잘 나왔어도 돈 많은 놈이니까 이미 한국 뜬 거 아닙니까?”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강범이 맞장구를 친다.
“그러니까, 마진강 그 새끼 말대로라면 이 놈이 대한민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는 건데···”
“그러니까? 이게 반장님한테 은근슬쩍 또 반말하네? 기강 한 번 잡을까?”
오갱이 도끼눈으로 강범을 노려보았다. 강범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고쳤다.
“그러니까요···오.”
그제야 오갱이 만족스런 얼굴로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조아라는 두 팀장의 유치한 기강잡기 놀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색한 적막이 잠시 흐르고 있을 때, 해수가 손을 들었다.
“대장님 이거 파일 보내주십시오. 마실장에게 검수 좀 해보겠습니다.”
“아 오케이, 그 사람만큼 확실한 검증은 없으니까, 언능 다녀와.”
“옙.”
해수가 자연스럽게 막내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차키를 챙기며 벌떡 일어섰다.
“모시겠습니다!”
*
효성교도소 접견실.
해수가 휴대폰으로 천선생의 몽타주를 마실장에게 보여주었다.
마실장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천선생이 정면 사진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해수는 마실장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이 좋긴 좋네.”
“많이 접근했군.”
“접근은 무슨, 이미 딴 나라로 떴을 텐데.”
마실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천선생은 절대 자신의 왕국을 떠나지 않아, 왕이 왕국을 떠나면 다시는 왕의 자리에 앉지 못하니.”
그의 눈빛에서 확신이 보인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다.
해수는 바로 특수대로 복귀하여 곽반장에게 이 사실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아직 국내에 머물고 있다는 전제 하에 천선생과 괴한들을 찾아야 합니다.”
“흠··· 괴한들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마실장 말로는 50명 내외라고 하였습니다.”
해수의 말에 조아라가 어깨를 떨며 두 팔로 팔뚝을 감쌌다.
“그런 괴물같은 놈들이 그렇게나 많이··· 진짜 위험하다 위험해.”
조아라의 반응대로 그들에게 잘못 접근하면 특수대도 손쓸 틈 없이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다.
곽반장은 턱을 괴고 가만히 고민하다가 일어섰다.
“얘네가 진짜 철저히 숨어있을 거란 말이야, 지들이 유리한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음···”
“그들이 먼저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해수의 다음 말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곽반장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수배라···”
“예.”
곽반장이 다른 대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아라도, 강범도, 오갱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곽반장은 바로 전화기를 꺼내며 청소도구함으로 향했다.
잠시 후, 큰 소리가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아니 왜요! 왜?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잡겠다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우린 왜 만들었어요?”
곽반장의 반응만으로 통화내용이 예상이 되었다.
해수는 문득 마실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경찰은 못 잡아, 그 사람.’
“아 몰라 몰라! 난 무조건 진행할테니까 위에 보고해요! 끊어!”
곽반장이 전화를 끊고는 씩씩거리며 나왔다.
대원들이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두 손을 허리춤에 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히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일단 기다려보자고, 그 해수야, 너도 빽 좀 써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같은 팀이었던 형사들은 조감찬 전 청장과 오성주 의원이 해수의 빽이라는 것을 모두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해수는 바로 조감찬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거 당연히 공개수배를 해야지! 내가 청장에 있었을 때는 말이야! 이게 빽을 쓰고말고 할··· 후우, 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써볼게요. 신형사는 너무 걱정 말고, 수사만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조아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통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띵 디링 딩 띵띵-
그때,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내에 적막이 흐르고 있었기에 벨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강범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들었다. 그리고 끄려는 순간, 화면에 찍힌 저장명을 보고는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각을 잡고는 전화를 냉큼 받았다.
“예! 충성! 경감 강범! 전화 받았습니다!”
강범의 오버스러운 행동에 형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매우 높은 사람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쁜 소식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예, 예, 아··· 네, 저,전달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각이 잡혀있던 목소리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실망감이 묻어난다.
눈치 빠른 곽반장이 전화가 끊기기 전에 그의 전화기를 빼앗았다.
화면에는 [왕청장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단어이기에 막 말하려던 곽반장의 기세가 본능적으로 한풀 꺾였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그가 다시금 비장한 눈을 하고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충성, 특수대 대장 곽수철 경정입니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말도 없이 상대방을 바꾼 비매너를 책망하는 말투다.
곽반장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하지만 급한 건 같아서요. 강범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강범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봐요 곽수철씨,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요?
“청장님, 천선생 공개수배, 해야 합니다.”
-하···
수 초간의 침묵, 이후에 청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얘기 끝났어요. 지금 그 나쁜 놈을 빨리 잡는 것보다, 공개수배로 인해 증폭될 국민의 불안감에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래?
공개수배는 본래 수사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사용하는 수사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수배를 막는 이유로는 적당하지 않다.
“···”
곽수철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청장이 말을 이었다.
-공개수배 하지 않아도 잡을 수 있잖아? 특수대면 그만한 능력 있지 않아요? 믿겠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청···”
뚝-
청장의 전화가 끊겼다. 곽반장은 전화기를 바닥에 내리치려는 포즈를 취했고, 강범이 다급히 달려와 바닥에 엎어졌다.
곽반장은 미간을 좁히며 전화기를 강범에게 툭 떨어트리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구석 휴게실로 향했다.
천선생이 알고 명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천선생과 연관된 높으신 양반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천선생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특수대는, 이미 결과가 예정된 수사였다.
“하···진짜 더러워서 씨발.”
“이게 뭐냐, 이러면 우린 왜 모아둔 건데, 다른 범인이나 잡게 놔두지!”
곽반장은 자신이 경정이라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그 위에 권력에 눌려 마음껏 수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분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쾅, 쾅! 쾅!
곽반장은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고, 해수와 막내가 다급히 다가가 그를 말렸다.
*
다음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특수대가 해체되지 않아, 형식상 수사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모두가 의욕이 떨어져 분위기가 한없이 축 쳐져 있었다.
그러던 중, 밖에 나가 있는 조아라팀에게서 무전이 왔다.
-여기 조하나, 천성빌딩 실외주차장에서 익명의 시신 발견.
조아라의 무전에 곽반장은 물론 강범과 오갱의 팀원들도 모두 벌떡 일어났다.
곽반장이 바로 무전을 받았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강팀 보낸다. 보존 잘 해놔.”
-조하나 삼팔
오갱은 곽반장과 본부에 남고, 해수는 강남팀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다.
현장에는 고가의 정장을 입은 중년인이 천성빌딩 벽에 기댄 채 숨져 있었다.
얼굴은 절반이 뭉툭한 흉기에 맞아 망가져 있었고, 목과 배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중년인의 머리는, 마치 탈색을 한 것처럼 새하앴다.
“이 사람···”
해수의 반응에 조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천선생같아요.”
*
천선생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DNA 검사를 해도 대조할 사람이 없다.
이것 외에 중년인의 옷을 뒤지며 신분을 알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해수는 시신을 다각도로 사진을 찍고 마실장에게 확인시켰다.
마실장은 턱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사진을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비슷하네.”
“아니지?”
“나야 모르지, 내가 말했잖아, 경찰은 못 잡는다고.”
지이이잉-
그때, 문자 한 통이 왔다. 곽반장이다.
[곽대장님: 들어와, 어제 발견한 시체 살인범 자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