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기선제압 >
지하철 입구 계단.
한 모자를 쓴 할머니가 네모난 짐을 들고 계단에 가만히 서 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청년의 옷소매를 툭 쳤다.
“학생”
청년은 할머니를 발견하고 무선이어폰 한쪽을 빼며 물었다.
“예?”
“이거 좀 저 위까지만 들어줄 수 있나?”
가로세로 30센티의 정사각형 짐이다. 청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예, 주세요.”
할머니가 짐을 뭐 얼마나 무겁게 들었겠니 생각하며 번쩍 들어올리려는 순간.
“끄응!”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청년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아예 못 들 정도는 아니어서 낑낑거리면서 계단을 올랐다.
“무거우면 내려놓고잉”
“아,아니에요 아니에요. 후욱”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데, 눈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덩치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의 근육남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쁜 미녀가 있었지만, 그 남자 때문에 감히 시선을 줄 수 없었다.
“어이.”
“저,저요?”
청년이 지레 겁을 먹고 대답했지만, 남자의 시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남자가 돌연 계단을 내려와 한쪽 발을 들어 할머니를 향해 쭉 뻗었다.
퍽!
“허업!”
“어이쿠!”
청년은 기겁하며 짐을 놓치고 돌아섰고, 놀라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타다닥 탁-
자신에게 짐을 맡겼던 할머니가 뒤돌기를 세 바퀴 연달아 돌더니 중간 계단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것이다.
청년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순간 뇌정지가 와서 할머니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
신해수는 계단을 내려가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김쪽새”
김쪽새는 보성에서 안서은에게 아이스크림을 대신 팔게 했던 사기꾼이다.
파쿠르의 달인으로 하루도 쫓기 힘들 정도로 날랜 몸놀림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변장의 달인이기도 하다.
아이스크림 판매를 안서은에게 시켰을 때 이후의 행보를 확인해봤었는데, 변장은 아예 목적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하는 듯했다.
쪽새는 해수가 자신의 본명을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해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하루를 발견하고는 검지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어, 예쁜 누나 예전에 한 번 봤었는데··· 아 경찰! 나 잘못한 거 없는데?”
그는 자연스레 몸을 돌려 도망갈 자세를 취했다. 반대편에는 해수와 비슷한 풍채와 더 험악한 인상을 지닌 황장수가 서 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을 치려고 해.”
“아저씨 얼굴 보고 안 도망가면 그게 이상한 건데.”
“풉”
능글맞은 답변에 하루가 쿡쿡 웃었다. 그 모습에 쪽새가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해수와 황장수는 거리를 좁혔고, 쪽새는 도망가려다가 반항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되어 가만히 있었다.
해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쪽새, 알바 하나만 뛰자.”
“알바? 갑자기?”
***
유동인구가 많은 전통시장.
신해수 일행은 사람들 틈에 섞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통시장은 시시티비가 다른 곳보다 더 드문드문 있고, 사각지대도 많다.
해수는 사각지대로 들어서서 수산물을 파는 지하상가같은 분위기의 통로를 거닐었다.
중간에 한 건물과 이어져 있는 계단으로 빠졌다. 3층으로 된 건물로 대부분 음식점이고 3층에는 파리 날리는 법무사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수는 1층을 조금 특이하게 엄지로 눌렀다.
띡-
그러자 보통 엘리베이터에서는 나지 않는 낯선 소리가 울렸다.
지이이이잉-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1층인데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 김쪽새는 놀라며 손잡이를 잡았다.
“뭐,뭐야?”
황장수는 피식 웃었고, 해수는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지이이잉-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서고,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앞에 또 녹슨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닫히자마자 바로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수가 철문 옆에 도어락에 엄지를 댔고, 철컥 소리가 나며 철문이 살짝 뒤로 밀렸다.
끼이익-
“어우야···”
겉으로 봤을 때보다 세 배는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위아래 벽 모두 날것의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드문드문 약한 LED 조명이 켜져 있다.
한쪽에는 커다란 스크린 보드가 놓여 있고, 가운데에 테이블과 의자, 운동기구, 또 다른 구석 벽에는 거대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에는 모니터 여섯 개가 있고, 앞에 정영수가 앉아 있었다.
영수가 의자에 앉은 상태로 몸을 돌려 그들을 맞이했다.
“어? 저 할머니가 새 멤버에요?”
황당한 질문에도 쪽새는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해수는 영수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영수는 쪽새의 걸음걸이와 행동을 보고 할머니가 아님을 금세 눈치 챘다.
이곳은 해수가 구매한 상가로, 원래 있는 지하 1층을 개조했고, 엘리베이터를 바꾸면서 지하 1층 버튼을 없애고 지문인식으로만 내려갈 수 있게 바꿨다.
“여기에 지문 등록하고, 비상문은 저쪽.”
해수가 턱짓하자 쪽새가 고개를 돌렸고, 황장수가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계단이 나왔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을 하던 쪽새는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물었다.
“대체··· 그, 무슨 일을 하는 거에요? 겁나는데?”
“너를 위한 일이다.”
“···나를 위한?”
‘이게 뭔 개소리야···?’
나라를 위한 일이니,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김쪽새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해수였다.
해수는 몸을 돌려 팀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나는 특수본으로 출근한다. 구체적인 임무는 수사 방향 잡히면 정하지.”
그때 김쪽새가 해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랑 여기는 안 어울려, 이거 위험한 냄새가 다분해, 보통 알바가 아니야.”
해수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서랍장을 열어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달에 천, 선금.”
쪽새는 무슨 말인가 바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안을 살짝 보았다.
오만원 권이 묵직하게 들어 있다. 달에 천은 천 만원을 말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세금 없이 날 것으로.
김쪽새는 바로 저자세로 바꾸며 손을 비볐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다.
“사장님 주말 출근! 야근! 모두 가능합니다.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시죠, 사장님.”
“후에 일이 모두 끝나면 지급한 돈은 모두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위법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예예 알겠습니다요. 사장님 말씀대로 하죠.”
정영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해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신형님, 근데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해수는 하루를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그 사람은, 필요할 때만 꺼낸다.”
“···꺼내?”
영수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장수도 아무 말이 없지만 모르는 눈치고, 오직 하루만이 안색이 심각했다.
***
특수본부는 서울 광진구의 한 폐교 체육관에 설치되었다.
전국에 세 개의 날고 기는 강력팀이 합류했다.
경기북부 강력1팀, 서울 강남서 강력1팀, 강진 강진서 강력4팀.
경기북부는 조아라가 팀장으로 있는 강력1팀이었다.
그들이 먼저 와 있었고, 다음으로 도착한 강진서 강력4팀이 들어오며 그들을 보고 반가워했다.
“오! 북부 형님들!”
“크!”
그들은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부딪히고 이두를 강하게 쥐어짜 근육의 안부를 물었다.
“오, 예전보다 더 커졌네?”
“키햐, 형님은 승모근이 더 올라왔네요.”
“아 이걸 또 알아보네, 요즘 인클라인 좀 조지고 있거든요.”
“아 역시”
서로 자세를 바꿔가며 그동안 키웠던 근육을 살피는 팀원들, 그 모습에 조아라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수는 경기북부1팀이 합류한 것을 보고 조감찬 의원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었다.
조팀장이 오갱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해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또 보네요. 우연이라기엔 자주 겹치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때 조팀장의 옆으로 팀원 한 명이 다가와 깐죽거렸다.
“어어 뭐야, 우리 팀장 지금 작업 거는 거?”
조팀장이 눈을 감고 작게 냉소를 흘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 작업 좀 들어가자, 형석아!”
“예 형님!”
형석이라는 팀원이 다가와 깐죽거렸던 팀원의 두 팔을 붙잡고 들어올렸고, 조팀장은 그의 배에 펀치를 갈겼다.
퍽!
“니가”
퍽!
“아직”
팡!
“덜 쳐맞았지?!”
“커허억, 죄,죄송합니다. 충성···”
형석이 손을 풀자 팀원이 배를 부여잡고 스르르 쓰러졌고, 조팀장은 만족해하며 해수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장난이에요 장난, 팀원들이랑 워낙 친해서.”
“큭, 쿨럭, 우욱”
팀원이 살짝 위액을 쏟아낸다. 해수는 억지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그때, 체육관 문이 열리며 마지막 팀, 강남서 강력1팀 형사들이 들어왔다.
유일하게 강진서에 버금가는 강력사건을 맡는 강남서, 7개 팀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강력1팀.
그들은 해수의 팀만큼이나 모두 몸이 우락부락했다.
앞장서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형사는 해수와 비슷한 덩치에 비등한 근육, 그리고 민머리에 가까운 짧은 머리에 왼쪽 끝에는 도끼에 찍힌 흉터같은 것이 길게 나 있어서 더욱 인상이 흉악해보였다.
그는 경기팀과 강진팀을 살짝 보고는 미간을 좁히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씨 먼지”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오갱은 팀장이라고 먼저 한 걸음 다가가 그들을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강남서 형사님들, 앞으로 잘 해봅시···”
탁 탁-
흉터 사내는 손으로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면서 그대로 지나쳤다. 한 성격 하는 오갱의 입이 순간 경직되었다.
막내가 욱하여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아, 에 뭐, 강범이요.”
오갱은 강범이라는 이름이 강남서 1팀 팀장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강범은 오갱의 손을 힐끔 보았다가 대답만 하고는 그대로 지나갔다.
그 뒤로 강남팀 팀원 네 명이 오갱을 본 체 만 체하며 지나갔다.
오갱은 가만히 있다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강범이 당연하다는 듯이 가운데 쪽 책상으로 가서 뒤돌아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다시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중간에 조아라에게 멈추었다.
“뭐야, 이름이 어쩐지 여자같다 했더니, 진짜 여자였어?”
“습, 거 말이 좀···”
한 팀원이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조아라가 말리며 입을 열었다.
“예 뭐, 솔직히 피지컬이 딸려서 남자들만큼 날뛰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뇌지컬은 안 딸리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건 두고 보면 아는 거고··· 그럼 거기가 강진서 4팀?”
조아라에게 맞았던 팀원이 욱하여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타깃 변경에 멈추었고, 오갱과 그의 팀원들이 강범의 말에 반응했다.
“예 우리가 강진서 강력4팀입니다만.”
방금 전 대놓고 기선제압을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여서 오갱의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강범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바빠 죽겠는데 강남도 1팀이 왔는데 4팀이라··· 강진서 미친 거 아니야?”
“···뭐요?”
오갱이 살짝 눈을 추켜떴다.
그때, 강범이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손뼉을 쳤다.
“뭐 아무튼, 이미 높으신 양반들이 모아놨으니까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지시에 잘 따르길 바란다. 우리 서에는 안 그랬다.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이딴 소리 쳐 할 거면 당장 나가고.”
강범은 이미 당연하게 자신이 특수본의 리더가 된 것마냥 말했다.
그의 말에 조아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고, 오갱은 인상을 쓰며 목관절을 풀었다.
그때 강범이 손가락으로 오갱을 가리키며 까딱거렸다.
“불만 있는 표정이네? 나와봐.”
검지 끝이 정확히 오갱을 향해 있다.
오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참아야 하나 초반에 기 빡세게 잡아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니가 나갈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갱이나 그의 팀원, 조아라의 팀원 목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이곳에서 들리지 않았다. 다른 방향이다.
강범도 그것을 눈치 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야?”
터벅 터벅 터벅-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슬리퍼 끄는 하찮은 발소리, 어둠 속에서 배가 살짝 나온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저씨, 곽반장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이 새끼야, 니네 대장이지, 어디서 우리 새끼들한테 대장노릇하려고 지랄이야, 쳐 맞을라고.”